거짓말처럼 10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런던의 차가운 빗속에서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히드로 공항에서 눈물 대신 확신을 나누며 헤어졌던 그날의 약속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나는 여의도에서 연달아 굵직한 마케팅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며 당당히 팀 내 최고 고과를 받아냈고, 런던의 강영현은 말 그대로 지사를 집어삼켰다. 그가 따낸 유럽 바이어들과의 독점 계약 건은 한국 본사 임원진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결국 당초 3년으로 예정되어 있던 그의 파견 기간은, 본사의 전례 없는 '특별 조기 복귀' 명령과 함께 딱 10개월 만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김 대리, 아니지, 곧 김 과장인가? 오늘 일찍 퇴근해. 그동안 고생 많았어." 금요일 오후, 팀장님의 기분 좋은 농담을 뒤로하고 나는 평소보다 일찍 회사 로비를 나섰다. 유난히 맑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여의도의 저녁. 영현이 런던에서 돌아오기까지 딱 일주일이 남은 시점이었다. 매일같이 영상통화로 카운트다운을 하며 하루하루를 지우던 우리는, 서로를 마주하게 될 다음 주 금요일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여의도 공원을 가로질러 걷던 중이었다. 익숙한 커피 향과 가을의 낙엽 냄새 사이로, 문득 아주 짙고 서늘한 비누향 향수가 코끝을 스쳤다.
환청처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곳, 여의도 공원의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런던의 찬 공기를 머금은 듯 날렵하게 떨어지는 짙은 네이비 수트. 한 손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리지어 꽃다발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나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고 있는 사람. 일주일 뒤에나 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강영현이 그곳에 있었다.
"강... 영현...?" 놀란 마음에 입술만 달달 떨며 그 자리에 굳어버리자, 영현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제 품으로 와락 끌어당겼다. "놀랐지. 일주일 먼저 왔어. 도저히 못 참겠어서, 어제 인수인계 끝나자마자 제일 빠른 비행기 표 끊어서 날아왔어." 그의 넓은 가슴팍에 얼굴이 묻히자, 10개월 동안 모니터 너머로만 상상해야 했던 그의 단단한 체온과 규칙적인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그의 코트 자락을 꽉 쥐며 그의 품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이 거짓말쟁이야... 진짜 일주일 남았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미안해. 근데 나 진짜,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하루가 1년 같았단 말이야." 그가 내 눈물을 커다란 손으로 닦아내더니, 여의도 공원을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입술에 깊고 뜨겁게 입을 맞췄다. 8,800km의 롱디가 완벽하게 끝나는 순간이었다. 10개월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우리의 온도는 닿자마자 델 듯이 끓어올랐다.
긴 입맞춤이 끝나고, 영현은 내 손을 꽉 잡은 채 공원 벤치로 나를 이끌었다. 그는 벤치에 나를 앉혀두고는, 갑자기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선선하게 불어오던 가을바람이 일순간 멈춘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단단했다. "ㅇㅇ아. 런던에서 진짜 뼈저리게 느꼈어. 내 인생에 가장 완벽한 성과는 억대 계약도, 초고속 복귀도 아니야. 20년 전부터 내 옆에 있었던 너, 그 하나뿐이더라." 그가 수트 안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내 열었다. 런던 포토벨로 마켓에서 임시로 끼워주었던 낡은 은반지가 아니라, 밤하늘의 별을 통째로 박아 넣은 듯 영롱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친구로서의 20년도 끝냈고, 런던에서의 10개월 롱디도 끝냈어. 이제 우리 사이에 남은 건 평생 하나야. 김ㅇㅇ, 내 아내 해라. 남은 평생 네 궤도는 나한테만 고정시켜 줘." 눈물로 범벅이 된 채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자, 그가 내 약지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 넣고는 다시 한번 내게 진하게 입을 맞췄다. 20년을 돌고 돌아 기어코 서로에게 안착한, 가장 완벽하고 낭만적인 프러포즈였다.
그날 밤, 우리는 내 자취방에서 10개월의 갈증을 해소하듯 서로를 치열하게 품에 안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대망의 귀환 신고식이자 프러포즈 소식을 알리기 위해 광진구의 본가로 향했다. 토요일 점심, 예고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선 우리의 모습에 거실에 모여 있던 양가 부모님 네 분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영현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말을 맞아 우리 집에 놀러 와 계셨던 것이다.
"어머! 영현아! 너 다음 주에 온다며!" 엄마가 기절할 듯 놀라 소리쳤고, 아빠와 영현의 아버님은 들고 계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나셨다. 영현은 씩 웃으며 내 왼손을 번쩍 들어 올려 부모님들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저희 어제 프러포즈했습니다. 저 김ㅇㅇ 데려가려고 미친 듯이 일해서 일주일이나 빨리 왔습니다!"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본 순간, 거실에는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감동의 눈물이라도 흘리실까 싶어 묘하게 긴장하던 찰나, 아빠가 별안간 영현의 등짝을 스매싱하듯 후려치셨다. "아악! 아버님!" "이놈 자식아! 사귄다고 했을 때부터 당장 식장 알아보라고 내가 그렇게 등을 떠밀었는데, 이제 와서 프러포즈?! 내 딸을 10개월이나 홀수발 들게 만들어놓고 자랑이다 이놈아! 게다가 요즘 예식장 잡으려면 최소 1년 전에는 예약해야 하는 거 몰라?!" 아빠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영현의 아버님 역시 거들고 나서셨다. "내 말이! 영현이 이 녀석아, 프러포즈야 당연한 거고, 결혼 준비는 여태 하나도 안 했단 말이냐? 어휴, 이 철없는 놈들을 어쩌면 좋아."
하지만 험악한 분위기도 잠시. 두 분의 입꼬리는 이미 씰룩거리고 있었다. 이때,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시던 엄마와 영현의 어머니가 여유롭게 웃으시며 소파 아래에서 두꺼운 파일 철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턱, 하고 올려놓으셨다. "어휴, 남자들이란. 그럴 줄 알고 우리가 지난 10개월 동안 다~ 알아봤지!" "네...?" 나와 영현이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엄마가 파일을 쫙 펼쳤다. 그 안에는 강남 일대의 인기 웨딩홀 잔여 타임 리스트부터 시작해서,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숍 랭킹, 심지어 내년 봄까지의 길일이 붉은 펜으로 동그라미 쳐진 달력까지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보자, 강남 쪽 S 웨딩홀이 내년 4월 둘째 주 토요일 점심에 딱 한 타임 남았대. 여기가 밥도 맛있고 주차도 편해. 드레스는 ㅇㅇ이가 어깨선이 예쁘니까 실크로 유명한 A 숍이 낫겠고. 스튜디오는 자연광 예쁘게 들어오는 곳으로 이미 가계약 걸어놨다." 영현의 어머니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속사포처럼 브리핑을 시작하셨다. 아빠와 영현의 아버님도 질 세라 태블릿 PC를 꺼내 들었다. "신혼집은 영현이 마포 자취방 빼고, 여의도랑 마포 중간인 공덕 쪽 아파트 전세로 알아보자. 어제 부동산 소장님이랑 통화해 놨어." "그래그래, 혼수는 우리가 알아서 채워줄 테니까 너희는 몸만 들어가!"
불과 5분 만에, 20년을 한 가족처럼 살아온 두 집안의 어른들은 완벽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결혼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정작 결혼의 당사자인 나와 영현은 소파 구석에 쭈그려 앉아, 이 무시무시한 추진력과 정보력에 기를 펴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자기야... 우리 결혼식인데 우리 의견은 아예 없는 거야?" 내가 귓속말로 속삭이자, 영현이 끅끅대며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였다. "냅둬. 어르신들 10개월 동안 이거 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으셨겠어. 우린 그냥 사진 예쁘게 찍고 입장만 잘하면 될 것 같아." 영현이 테이블 아래로 내 손을 꽉 쥐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내 평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을 이렇게 넘길 수는 없었다.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엄마! 아빠! 어머님, 아버님!! 아니, 우리 결혼식은 우리가 알아서 한다구우우~~~!!" 나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거실에 울려 퍼지자, 열심히 웨딩홀 브로슈어를 보시던 네 분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의 입에서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영현도 바닥에 쓰러질 듯 웃으며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알았어, 알았어! 너희가 다 해라! 우리는 그냥 돈만 낼게!" 가장 편안하고, 가장 소란스러우며, 가장 완벽한 가족의 풍경. 20년의 우정이 사랑으로 변하고, 그 사랑이 수많은 계절과 시차를 뛰어넘어 마침내 영원한 가족이라는 종착지에 닿았다. 왁자지껄한 부모님들의 웃음소리 사이로, 강영현이 내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랑해. 내 처음이자 마지막, 영원한 내 편."
[외전 1] 20년의 종착지, 그리고 새로운 출발
따스한 봄 햇살이 쏟아지는 4월의 주말. 마침내 우리의 결혼식 당일이 밝았다. 신부 대기실은 아침부터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화려한 실크 드레스를 입고 앉아있는 내 곁으로, 이제는 당당한 사내 커플이 된 마포 해외영업팀 최 사원과 여의도 마케팅팀 박 대리가 활짝 웃으며 들어왔다.
"김 대리님! 아니, 이제 형수님인가요? 세상에, 오늘 진짜 여신 같아요!" "두 분 진짜 축하드려요. 저희가 연애 조작단으로 활약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결혼이라니 눈물이 다 나려 그래요." 축하 인사를 건네받으며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턱시도를 입은 강영현이 들어왔다. 앞머리를 단정하게 넘기고 나비넥타이를 한 그의 모습은, 20년 동안 수없이 봐왔던 그 어떤 모습보다 눈부시게 잘생겨서 나도 모르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우리 신부, 안 떨려? 손 엄청 차갑네." 영현이 다가와 내 두 손을 꼭 쥐며 다정하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도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너야말로 긴장한 거 다 티 나. 아까 보니까 아버님들보다 네가 더 굳어있던데." "당연하지. 내가 20년을 짝사랑한 여자랑 드디어 식장에 들어가는 날인데, 어떻게 안 떨어."
그의 직진 멘트에 대기실에 있던 친구들이 꺅꺅거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내 예식 시작을 알리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버진로드 앞에 섰다. 어두워진 홀,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조명과 수많은 하객들의 박수소리. 아빠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대신, 우리는 처음부터 두 손을 꽉 맞잡고 동시 입장을 선택했다.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우리는 서로의 보폭을 맞추며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디뎠다. 떡볶이를 나눠 먹던 어린 시절부터, 마포와 여의도 사이를 오가던 비밀 연애, 그리고 8,800km를 뛰어넘은 런던 롱디까지. 우리가 함께 걸어온 20년의 시간이 버진로드 위로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주례 단상 앞에 서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강영현의 깊고 까만 눈동자 속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내 베일을 살짝 넘겨주더니, 수많은 하객들 앞에서 아주 부드럽고 경건하게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친구라는 이름의 긴 터널을 지나, 마침내 부부라는 이름으로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영원한 새로운 출발선에 서는 순간이었다.
[외전 2] 완벽한 시차 적응, 하와이의 밤
결혼식이 끝나고 도착한 신혼여행지, 하와이. 탁 트인 와이키키 해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호텔 스위트룸 발코니에 나란히 앉아, 우리는 시원한 샴페인 잔을 부딪쳤다.
"하아... 진짜 끝났다. 나 오늘 하루가 10년 같았어." 내가 피곤한 듯 영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그가 자연스럽게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이마에 뽀뽀를 세례를 퍼부었다. "고생했어, 강 부인. 오늘 하루 종일 웃느라 볼 아프지." "강 부인이라니, 어감 진짜 어색하다. 근데 기분은 좋네."
살랑이는 하와이의 밤바람과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우리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런던과 서울에서 서로 각자의 밤과 낮을 견뎌야 했던 10개월의 시간들이 새삼 아득하게 느껴졌다. "영현아." "응?" "우리 이제 시차 안 나. 네가 퇴근할 때 나도 퇴근하고, 네가 잠들 때 나도 잠들어. 9시간이나 차이 나던 시간이 이제 0초야." 내 말에 영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샴페인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나를 번쩍 안아 올려 발코니에서 실내 침대로 향했다.
"시간만 0초인 게 아니지. 거리도 0cm야."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눕혀진 내 위로, 그의 단단한 몸이 겹쳐졌다. 은은한 조명 아래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하와이의 열기보다 더 뜨겁고 노골적인 텐션이 일렁이고 있었다. "런던에서 진짜 뼈저리게 배웠어. 네가 내 옆에 있을 수 있을 때, 1분 1초도 허투루 쓰면 안 된다는 거."
그가 내 입술을 삼킬 듯이 파고들며 짙은 숨을 뱉어냈다. 오랜 장거리 연애의 시차를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숨 막히게 다가오는 그의 온도는 그 어떤 밤보다 황홀했다. 서로 다른 시간 속에 살던 두 사람이 마침내 완벽하게 같은 시간을 공유하게 된 하와이의 밤. 우리의 시차 적응은 그 어떤 순간보다 뜨겁고, 농밀하며, 완벽하게 끝맺음을 하고 있었다.
최애의 온도 -강영현 완결 @fly/my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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