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출국장 앞. 천장을 울리는 건조한 출국 안내 방송과 캐리어 바퀴가 대리석 바닥을 구르는 마찰음들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하지만 내 모든 신경은 오직 내 앞에 선 한 남자, 강영현에게만 온전히 집중되어 있었다.
출국을 일주일 앞두고 빗속에서 서로의 바닥까지 내보이며 쏟아냈던 절절한 화해와, 그날 밤 서로의 살갗에 지독하게 새겨 넣었던 농밀한 온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우리는 지난 일주일 동안 정말 단 1초도 떨어지지 않으려 발악하듯 서로를 탐하고 끌어안았다. 그리고 마침내, 야속하게도 그 유예 기간의 끝이 도래했다.
"여권 챙겼어? 런던 도착하면 춥다니까 겉옷은 기내에 들고 타고." "응. 다 챙겼어."
덤덤한 척 내뱉으려 했지만, 내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 미세한 떨림을 귀신같이 알아챈 영현이 손에 쥐고 있던 여권과 탑승권을 코트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고는, 나를 자신의 너른 품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하아… 진짜 발길이 안 떨어진다." 그의 두꺼운 팔이 내 허리를 부서져라 옭아맸다. 내 정수리에 얼굴을 묻은 그의 깊은 한숨이 정수리를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평소 그에게서 나던 시원하고 묵직한 비누향 향수 냄새가 오늘따라 유난히 더 짙고 아리게 느껴졌다.
"울지 마. 뚝 해. 네가 울면 나 진짜 출국 심사대 안 넘어가고 티켓 찢어버릴지도 몰라." "누가 운대… 안 울어."
나는 애써 눈물을 꾹 참으며 그의 넓은 등을 마주 안았다. 수트 위로 느껴지는 그의 단단한 어깨뼈와 일정한 심장 박동. 이 온기를 당분간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이 명치끝을 묵직하게 짓눌렀지만, 나는 그를 위해 애써 활짝 웃어 보였다. 우리는 서로의 미래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서로를 더 높은 곳으로 밀어 올려주는 날개가 되기로 빗속에서 약속했으니까.
"영현아. 가서 기죽지 말고, 하던 대로 다 씹어먹고 와. 너 일할 때 제일 멋있는 거 알지?" "당연하지. 내가 누구 남친인데."
그가 나를 품에서 살짝 떼어내고, 두 손으로 내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비행기 탑승을 알리는 마지막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영현의 눈동자 속에 흔들리는 내 모습이 가득 찼다.
"10개월. 아니,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빨리. 내 모든 걸 다 걸고 런던 지사 실적 박살 내고 당당하게 복귀할게. 그동안 서울 하늘 아래서 딴 놈들 쳐다보지도 말고, 내 생각만 해. 알았지?" "알았어, 이 잔소리꾼아. 너나 금발 미녀들 조심해."
그의 입술이 내 이마에, 콧등에, 그리고 마침내 입술 위로 깊고 진하게 내려앉았다.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출국장 한복판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오직 우리 둘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입술이 떨어지고, 그는 아쉬움을 뚝뚝 흘리며 뒤를 돌았다.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기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며 나를 향해 손을 번쩍 흔들었다.
물리적인 거리는 이제 0cm에서 8,800km로 벌어지겠지만, 우리의 궤도는 이미 서로를 중심으로 완벽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떠난 빈자리에 남은 건 이별의 슬픔이 아니라, 더 단단해진 신뢰와 지독한 그리움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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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현이 런던으로 떠나고 한 달이 지났다. 서울의 여의도와 런던의 템즈강, 두 도시 사이에는 9시간이라는 거대한 시차가 존재했다. ㅇㅇ의 고단한 퇴근길은 그의 분주한 아침 출근길이었고, ㅇㅇ의 나른한 자정은 그의 치열한 오후 업무 시간이었다.
처음엔 이 엇갈린 시간이 숨 막히게 답답할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겪어본 롱디(장거리 연애)는, 20년 지기였던 그들에게 오히려 묘한 애틋함과 색다른 텐션을 선물해 주었다.
[자기야, 나 지금 퇴근했어. 여의도는 이제 어두워지네. 거긴 해 떴지?] [응. 방금 샤워하고 나왔어. 아, 진짜 피곤한데 네 얼굴 보니까 살 것 같다.]
저녁 7시. 횡단보도 앞에서 켠 영상통화 화면 너머로, 머리에 수건을 얹고 물기를 털어내는 강영현의 나른한 얼굴이 나타났다. 런던의 아침 햇살을 등진 그의 젖은 머리카락과 살짝 드러난 어깨선은 화면 너머로도 훅 끼쳐오는 관능미가 있었다.
"아침은 먹었어? 또 빵 쪼가리 먹은 거 아니지?" "어쩔 수 없잖아, 여긴 샌드위치밖에 안 파는걸. 아, 진짜 네가 끓여준 김치찌개에 계란말이 먹고 싶다. 미치도록 먹고 싶어."
영현은 화면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앓는 소리를 냈다. 대식가인 그에게 런던의 퍽퍽한 음식들은 꽤나 고역인 모양이었다.
"조금만 참아. 내가 주말에 국제 소포로 컵밥이랑 볶음 김치,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간식들 꽉꽉 채워서 보낼게." "진짜? 와, 김ㅇㅇ 최고. 근데 사실 컵밥보다 네가 더 고파. 나 너 안아본 지 벌써 32일째야. 모니터 뚫고 들어가서 확 안아버리고 싶네 진짜."
그의 노골적이고 투정 섞인 말에 주변을 걷던 퇴근길 인파의 눈치가 보여 ㅇㅇ는 황급히 화면을 가리며 킥킥 웃었다. 그들의 연애는 거리가 멀어진 만큼 표현의 농도가 짙어졌다. 언제든 만날 수 있었던 시절에는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보고 싶다', '안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들이, 이제는 매일 통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가장 중요한 사랑의 표현이 되었다.
자정 무렵, ㅇㅇ이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할 때면 영현은 한창 바쁘게 일하고 있을 런던 지사의 오후 3시였다. [강영현(내남친) : 나 지금 바이어 미팅 들어가. 내 사랑, 이불 잘 덮고 푹 자. 꿈에서 내가 데리러 갈게.] 침대에 누워 그가 보낸 텍스트를 읽으며 스르르 잠에 빠져드는 순간. ㅇㅇ이가 잠든 밤하늘의 달과 그가 일하고 있을 낮의 태양이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되어, 지구 반대편의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찾은 시차의 묘미였다.
ㅇㅇ이가 여의도에서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따내며 에이스로 자리 잡아가고 있을 무렵, 런던 지사에서의 강영현은 그야말로 전설을 쓰고 있었다.
그의 고등학교 시절 캐나다 유학 경험은 이곳에서 빛을 발했다. 완벽한 영국식 악센트의 바이어들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는 유창하고 세련된 영어 구사력,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날카로운 숫자 감각, 그리고 특유의 여유로우면서도 공격적인 협상 스킬. 런던 지사 사람들은 그를 '미스터 강' 혹은 영어 이름인 '브라이언(Brian)'이라 부르며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Regarding the European expansion plan, it looks like the numbers are missing a key variable. (그래서, 유럽 시장 확장 계획에 관해서는... 당신들이 제시한 수치에는 아주 중요한 변수가 빠져 있습니다.)"
런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고층 빌딩의 유리 회의실. 네이비색 맞춤 수트를 입고 단상에 선 영현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레이저 포인터로 스크린의 오류를 정확히 짚어내며, 현지 파트너사 임원들의 기선을 완벽하게 제압했다.
"We need to recalculate the margins based on the new logistics routes. I'd like to see the updated numbers by tomorrow morning. (새로운 물류 루트를 기반으로 마진을 재계산해야 합니다. 내일 아침까지 수정된 데이터를 기대하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바이어들이 땀을 쥐며 회의실을 나설 때, 런던 지사 팀원들은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God, Brian. You were brutal today. (세상에, 브라이언. 오늘 당신 정말 무자비하더군요.)"
금발의 매력적인 영국인 동료 '클로이'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서류를 건네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영현은 런던 지사에 부임한 첫날부터 뛰어난 업무 능력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턱선과 훤칠한 피지컬로 지사 내 모든 여성 동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오죽하면 타 부서 여직원들이 일부러 해외영업팀 층에 커피를 마시러 올라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를 향한 숱한 관심과 호의에도 불구하고, 영현은 사적인 감정 교류를 철저하게 차단하는 거대한 철벽 그 자체였다.
"It had to be done. Business is business.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니까요.)" 그는 클로이의 미소에 그 어떤 동요도 없이, 건조하게 서류만 받아 들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피도 눈물도 없이 실적만 갈아치우는 기계. 런던 지사에서 강영현에게 붙은 또 다른 별명은 '아이스 몬스터'였다.
금요일 퇴근 시간. 런던의 잦은 비가 창문을 때리며 내리고 있었다. 한 주간의 고된 업무가 끝나고, 지사 직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근처 펍(Pub)으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Brian! We're heading to a pub near Soho. You should come join us tonight. It's been a month—you need a break. (브라이언! 우리 소호 근처 펍에 갈 건데, 오늘 밤엔 꼭 같이 가요. 온 지 한 달이나 됐는데, 당신도 휴식이 필요하잖아요!)"
클로이가 자신의 외투를 챙기며 영현의 책상 앞에 멈춰 섰다. 그녀의 눈빛에는 단순한 동료애를 넘어선 짙은 호감이 묻어 있었다. 주변 동료들도 이번엔 꼭 같이 가자며 그를 부추겼다.
하지만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던 영현의 대답은 늘 그렇듯 칼 같았다. "I appreciate the offer, Chloe, but I’ll have to pass tonight. (제안은 고맙습니다만, 클로이. 전 빠져야겠습니다.)"
“Come on, just one drink! Are you really going to go back to that empty flat again? (에이, 딱 한 잔만요! 정말 또 그 텅 빈 아파트으로 돌아갈 건가요?)" 클로이가 살짝 입술을 내밀며 그의 팔에 슬쩍 손을 얹으려던 찰나였다. 영현이 의자를 뒤로 빼며 그녀의 손길을 자연스럽고도 단호하게 피했다.
“I’m not going back to an empty flat. I have a very important appointment.(빈집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선약이 있거든요.)" "An appointment? With whom? (선약이요? 누구랑요?)"
그때, 영현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스마트폰 화면이 밝아졌다. 화면에는 서울 여의도 윤중로 벚꽃 아래서 환하게 웃고 있는 ㅇㅇ와 ㅇㅇ를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영현의 투샷이 배경화면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 화면을 힐끗 내려다본 영현의 차가운 눈매가, 순식간에 봄눈 녹듯 부드럽게 휘어졌다. 런던 지사 사람들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지극히 무장해제된 다정한 미소였다.
"With my fiancée in Seoul. It’s almost her bedtime—and I never miss our call. Have a good weekend, everyone. (서울에 있는 제 약혼자랑요. 곧 그녀가 잘 시간이라, 전 우리의 통화 시간을 절대 놓치지 않거든요. 다들 좋은 주말 보내십시오.)"
영현은 '약혼자'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하며, 클로이의 굳어버린 표정을 뒤로한 채 미련 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런던 지사에 '미스터 강의 전설적인 한국인 여자친구'에 대한 소문이 확고하게 뿌리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타국에서, 그 어떤 유혹이나 호의도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는 완벽하고도 지독한 순정남이었다.
런던의 차가운 비를 뚫고 플랫으로 돌아온 영현은 젖은 코트를 벗어던지기가 무섭게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는 서둘러 영상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화면이 연결되었다. [어, 자기야! 퇴근했어?]
화면 속, 곰돌이가 그려진 편안한 수면 잠옷을 입고 침대에 엎드려 있는 ㅇㅇ의 모습이 나타났다. 방금 전까지 런던의 이방인으로서 견고하게 세우고 있던 영현의 긴장감이, ㅇㅇ의 목소리 하나에 모래성처럼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응. 방금 집에 왔어. 넌 벌써 졸려 보이네, 눈이 반쯤 감겼어." [너 전화 기다리느라 꾹 참고 있었지. 오늘 런던 비 온다며, 비 맞은 거 아니야?]
화면 너머의 ㅇㅇ이가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자, 영현은 핸드폰 화면 속 ㅇㅇ의 미간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는 시늉을 했다. "우산 쓰고 와서 괜찮아. 아, 오늘 팀원들이 펍에 가자고 꼬시는 거 뿌리치고 오느라 힘들었다."
그의 장난 섞인 투정에 ㅇㅇ는 피식 웃었다. [가서 맥주라도 한잔하고 오지 그랬어. 런던 인싸 다 됐다며, 미스터 강.] "내가 거길 왜 가. 금발 미녀들이 나한테 눈독 들이면 어쩌려고. 난 철벽 방어 치느라 바쁘거든." [어련하시겠어. 너 내 배경화면 해놓고 다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지? 최 사원이 다 일러바쳤어. 런던 지사에 '서울의 약혼녀'라고 소문 쫙 났다고.]
ㅇㅇ 놀림에 영현은 쑥스러운 듯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카메라 방향을 돌려 자신의 왼손을 화면 가득 비췄다. 런던 포토벨로 마켓에서 우리가 함께 끼웠던 낡고 빈티지한 은반지가 그의 약지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약혼녀 맞잖아. 나 이 반지 한 번도 뺀 적 없어. 이거 보면서 하루에도 열 번씩 다짐해. 이 낡은 반지, 진짜 다이아몬드로 바꿔서 네 손에 끼워주는 날까지 미친 듯이 일만 하겠다고."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무겁고 진득한 진심에, ㅇㅇ는 잠기운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영현아...] "그러니까 서울에서 누가 밥 먹자고 플러팅해도 철벽 팍팍 치고 있어. 나 지금 예상보다 실적 두 배로 초과 달성 중이야. 3년? 웃기지 마. 나 내년 가을엔 무조건 복귀 발령 내서 들어갈 거니까."
그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는 언제나 ㅇㅇ를 안심시켰다. 떨어져 있는 시간은 결코 그들을 멀어지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각자의 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내며, 서로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는 이 시간은 20년의 우정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눈부신 사랑의 과정이었다.
"ㅇㅇ아." [응.] "창문 열어봐. 거기 달 떠 있어?"
그의 말에 ㅇㅇ는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살짝 걷었다. 여의도의 고층 빌딩 사이로 밝은 달이 떠 있었다. [응. 보여.]
"나도 지금 템즈강 위로 뜬 달 보고 있어. 신기하지. 9시간이나 차이 나는데, 우리가 보는 달은 똑같아."
영현의 말대로였다. 그들의 시간과 공간은 엇갈려 있었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달은 하나였고, 그들이 향하고 있는 미래의 궤도 역시 완벽하게 하나로 포개어져 있었다.
[보고 싶어, 강영현.] "내가 더. 많이 사랑해, 내 전부."
핸드폰 배터리가 뜨거워질 때까지 이어지던 통화는, ㅇㅇ이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고 나서야 끝이 났다. 런던의 좁은 아파트 안, 모니터에 비친 ㅇㅇ의 잠든 얼굴을 한참 동안 쓰다듬던 영현은, 다시금 차가운 '미스터 강'의 눈빛을 장착하고 노트북을 열어 남은 업무를 시작했다. 사랑하는 여자가 기다리는 서울로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기 위해, 런던의 실적 괴물은 오늘 밤도 시차를 잊은 채 치열한 하루를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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