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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7

가방 속의 시한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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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했던 수요일 밤이 지나고, 주말을 앞둔 금요일 저녁이었다. 각자의 회사에서 치열한 한 주를 보낸 우리는 여의도의 한 와인바에서 마주 앉았다. 평소라면 이번 주에 있었던 각자 업계의 이슈들이나 진상 고객 이야기를 안주 삼아 떠들었겠지만, 오늘 영현의 입술은 묘하게 굳어 있었다.

"강영현, 너 무슨 일 있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조용해. 회사에서 깨졌어?" 내 물음에 영현은 와인잔의 기둥만 만지작거리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냥. 이번 주에 유독 야근을 많이 했더니 피곤해서 그런가 봐."

그가 화장실을 간 사이, 그의 의자에 걸쳐져 있던 서류 가방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가방을 주워 올리려다, 반쯤 열린 틈 사이로 삐져나온 영문 공문 하나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Notice of Selection for London Branch Dispatch - Kang Young-hyun]

숨이 턱 막혔다. 런던 지사 파견. 영현이 입사 초부터 그토록 열망했던, 그의 커리어에 날개를 달아줄 3년짜리 장기 파견 프로젝트였다.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각자의 업계에서 구르며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 얼마나 치열하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지 서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 파견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 없었다.

자리로 돌아온 영현은 내가 굳은 얼굴로 공문을 쥐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사색이 되었다. "ㅇㅇ아, 그거..." "너 이거 선발된 거야? 언제?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안 갈 거야. 어차피 안 갈 거라서 말 안 한 거야."

영현이 내 손에서 공문을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빼앗아 가방 깊숙이 쑤셔 넣었다. "안 간다고? 미쳤어? 네가 이 기회를 어떻게 잡았는데!" "기간이 3년이야. 게다가 출국은 다음 달이고. 나 이제 겨우 너랑 닿았어. 20년을 돌고 돌아서 이제야 내 옆에 뒀는데, 널 두고 3년을 어떻게 가."

그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올곧은 시선이 너무나 두렵고 무거웠다.

주말 내내 우리는 이 주제로 팽팽하게 맞섰다. 영현은 '사랑'을 방패로 내세웠고, 나는 '너의 미래'를 무기로 그를 밀어냈다. 서로 다른 회사, 전혀 다른 업계에 몸담고 있지만, 30대 대리 직급이 가지는 커리어의 무게감은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대학 시절 경영학회 선배이자, 영현과 같은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주희 선배를 찾아갔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ㅇㅇ아. 영현이가 지금은 너에 대한 감정에 취해서 다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지? 근데 현실은 달라. 영현이, 저거 안 가면 당장 동기들한테 승진 밀려. 3년 뒤에, 다른 동기들이 런던 다녀와서 과장 달고 본사 핵심 부서 꿰찰 때, 영현이가 웃으면서 축하해 줄 수 있을까?" "……." "네가 영현이 발목을 잡았다는 죄책감, 넌 견딜 수 있어? 그리고 영현이는, 자기가 선택한 거라 해도 무의식중에 널 원망하지 않을 자신 있을까? 사랑만으로 버티기에 우리 나이의 커리어는 너무 무거워."

선배의 현실적인 조언은 명치에 꽂히는 비수 같았다. 나는 영현이 지난 20년 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안다.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의 가장 찬란하게 빛날 시간을 앗아가고 있다는 죄책감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다.

일요일 밤, 영현의 자취방. 나는 결심을 굳히고 그를 마주했다. "영현아. 파견, 수락해. 나 때문에 네 인생의 중요한 궤도를 틀지 마."

내 단호한 목소리에 영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김ㅇㅇ. 너는 내가 그렇게 쉽게 내린 결정 같아? 내 궤도는 너야. 네가 없는 런던은 나한테 아무 의미 없어." "그럼 나는! 네가 나 때문에 평생 후회할지도 모르는 선택을 하는데, 내 마음은 어떨 것 같아? 넌 나를 배려한다고 하지만, 그거 나한테는 평생 갚지 못할 부채감이야!"

내 입에서 나온 '부채감'이라는 단어에 영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부채감...? 내가 널 20년 동안 짝사랑하다 간신히 내 사람으로 만들었는데, 네가 그걸 부채감이라고 표현한다고?" "현실을 봐! 너 나중에 나 원망할 거잖아! 내가 네 앞길 막았다고!"

"내가 널 왜 원망해! 내가 안 간다는데 네가 왜 날 억지로 등 떠밀어!"

처음으로 서로에게 고성을 질렀다. 20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서로를 향한 날 선 모습이었다. 영현은 배신감과 상처로 얼룩진 얼굴을 쓸어내렸고, 나는 눈물을 꾹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 위했기에, 역설적으로 서로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내고 있었다.

"우리... 조금 떨어져서 생각하자." 현관문을 나서기 전, 내가 뱉은 말이었다. 영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붉어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듯 바라볼 뿐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의 연락은 끊겼다. 아침저녁으로 울리던 알람도, 퇴근길 정류장 앞의 기다림도 사라졌다. 나는 회사 업무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일부러 야근을 자처했고, 다른 부서의 일까지 떠맡았다. 몸을 혹사시키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마포대교를 건너 강영현에게 달려가 "가지 마, 그냥 내 옆에 있어"라고 이기적으로 매달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건너편 건물, 전혀 다른 업계의 회사에서 일하는 영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직속 후배를 통해 건너건너 들려온 소식은, 그가 결국 런던 파견을 수락했다는 것과 미친 워커홀릭이 되어 파견 준비와 인수인계에 밤을 새우고 있다는 이야기뿐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미래를 지켜주기 위해 이별에 가까운 시간을 선택했지만, 각자의 일상에서 서로의 '온도'가 빠져나간 자리는 지독하게 시리고 아팠다.

강영현의 출국이 딱 일주일 남은 목요일 저녁이었다. 야근을 마치고 텅 빈 사무실을 나서는데, 밖에는 세찬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도 없이 로비에 서서 멍하니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았다.

문득, 작년 이맘때 비가 오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는 친구였던 강영현이 내 회사 로비까지 우산을 들고 뛰어와, 내 어깨가 젖지 않게 자기 쪽으로 우산을 훅 기울여주었었다. 그 사소하고 다정했던 온도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잘한 걸까. 진짜 이게 맞는 걸까.' 강영현을 밀어낸 내 결정이 이성적이고 어른스러운 배려라고 믿으며 버텼던 한 달. 하지만 일주일 뒤면 그가 진짜로 8,800km 밖으로 떠난다는 현실이 피부로 와닿자, 내가 쌓아 올렸던 이성이라는 모래성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빗속으로 걸음을 내디디려던 찰나였다. "김ㅇㅇ."

빗소리를 뚫고 들려온 익숙하고도 짙은 목소리. 고개를 돌린 곳에는, 한 달 동안 보지 못했던 강영현이 흠뻑 젖은 수트 차림으로 서 있었다. 우산조차 쓰지 않은 그의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너... 영현아, 비도 오는데 왜..." 놀란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다가가자, 그가 거칠게 내 손목을 낚아챘다. 한 달 만에 닿은 그의 체온은 빗물 때문인지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나를 내려다보는 두 눈만큼은 델 것처럼 뜨거웠다.

"네가 가라고 해서 간다고 했어. 네가 원하니까, 내 미래를 위해서라니까 수락했어. 출국 준비도 다 끝났어." 그의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로비의 공기를 찢었다. "근데, 네가 없는데 런던이 다 무슨 소용이야. 널 못 보는데 내 커리어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

그의 처절한 외침에, 내 안에서 억지로 틀어막고 있던 감정의 댐이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그럼 어떡해...! 네가 나 때문에 그 아까운 기회를 버리고, 나중에 날 원망하면 어떡해!" "내가 왜 널 원망해, 이 바보야! 널 두고 가는 지금 내 마음이 지옥인데!"

나도 모르게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의 젖은 가슴팍을 주먹으로 치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나도 너 보내기 싫어...! 네가 없으면 매일 퇴근길이 얼마나 외로운데... 나도 너랑 떨어지기 싫다고, 진짜 무서워 죽겠다고...!"

어른스러운 척 포장했던 이기적인 배려가 벗겨지고, 날 것 그대로의 나약한 진심이 쏟아져 내렸다. 내가 그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그가 없는 3년의 시간을 내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었는지.

내 엉엉 우는 소리에 강영현의 굳어있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는 내 주먹을 쥔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더니, 이내 나를 자신의 품으로 부서져라 꽉 끌어안았다.

"하아... 진짜, 김ㅇㅇ..."

그는 내 정수리에 얼굴을 묻고 깊고 떨리는 숨을 토해냈다. 젖은 수트 너머로 그의 빠르고 거친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미안해. 내가 병신 같았어. 네가 밀어내도 끝까지 버텼어야 했는데. 시차 9시간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내가 널 안심시켰어야 했는데."

그의 커다란 두 손이 내 젖은 뺨을 감싸 쥐었다. 붉게 충혈된 그의 눈동자에서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이 떨어져 내 뺨에 닿았다.

"ㅇㅇ아. 나 너 20년 기다렸어. 다른 놈들 옆에서 웃는 거 보면서도 꾹 참고 기다려서 간신히 내 여자로 만들었어. 그깟 런던 3년? 20년 짝사랑했던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그의 목소리는 비에 젖어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확고했다. "매일 영상 통화할게. 휴가 때마다 무조건 한국으로 날아올게. 너도 연차 내고 나한테 와. 내가 진짜, 미친 듯이 일해서 3년 안 채우고 무조건 조기 복귀할게. 그러니까..."

그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며 애원하듯 속삭였다. "나 밀어내지 마. 나 버리지만 마. 알았지?"

나는 대답 대신 까치발을 들어 그의 젖은 목에 팔을 단단히 감았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포갰다. 한 달 동안의 지독했던 냉전과 불안, 그리움이 단 한 번의 깊고 절박한 입맞춤으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빗물이 두 사람 사이를 적셨지만, 서로의 입술을 탐하는 온도는 그 어떤 불꽃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택시를 타고 내 자취방까지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강영현은 젖은 구두를 대충 벗어 던지고 나를 문벽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닫힌 문 너머로 바깥의 빗소리가 차단되었다. 오직 거칠게 헐떡이는 우리의 숨소리만이 좁은 현관을 가득 채웠다. 영현의 두 손이 내 젖은 머리카락을 파고들며 뒷목을 단단히 움켜쥐었고, 그의 입술은 아까보다 훨씬 더 탐욕스럽고 집요하게 내 숨을 앗아갔다.

"하아, 강영현... 옷 젖었..." "상관없어."

그는 내 말을 집어삼키며, 내 허리를 감싸 안고 그대로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내 다리가 반사적으로 그의 허리를 감았고, 그는 나를 안은 채 비틀거리며 침실로 향했다.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눕혀진 내 위로 그가 무겁게 몸을 겹쳐왔다. 젖은 셔츠 사이로 느껴지는 그의 단단한 근육과 뜨거운 체온. 평소의 다정하고 배려 넘치던 강영현은 온데간데없고, 10개월의 공백을 앞두고 사랑하는 여자를 자신의 존재로 꽉 채우고 싶어 하는 수컷의 본능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너 진짜... 지난 한 달 동안 사람 피 말려 죽이는 줄 알았어." 그가 셔츠 단추를 거칠게 풀어 내리며,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밤은 네가 밀어내도 안 봐줘. 내 품에서 도망치려 했던 벌칙이야."

방 안의 공기는 화상을 입을 것처럼 펄펄 끓어오르고 있었다. 영현의 뜨거운 입술이 내 목덜미와 쇄골을 타고 내려올 때마다, 나는 전류에 감전된 듯 몸을 떨며 그의 넓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아... 영현아..." 내 입에서 새어 나온 억눌린 신음에, 그가 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췄다. 땀에 젖은 앞머리 사이로 빛나는 그의 까만 눈동자에는 지독한 갈증과 애착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한 번만 더 불러봐. 내 이름." 그는 내 손목을 결박하듯 침대 시트 위로 꾹 누르며,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뺨을 부드럽게, 그러나 도망칠 수 없게 움켜쥐었다.

"사랑해, 김ㅇㅇ. 런던에 가든, 지구 반대편에 있든 넌 내 여자야." 그의 선언과 함께, 우리는 서로를 향해 완벽하게 무너져 내렸다. 한 달간의 지독했던 시차와, 앞으로 다가올 먼의 거리 따위는 흔적도 없이 타버렸다. 오직 살갗을 맞대고 얽혀드는 뜨거운 숨결과, 서로의 가장 깊은 곳까지 각인시키려는 본능적인 움직임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밤새도록 빗소리가 창문을 때렸지만, 우리 둘 사이의 텐션은 그 어떤 폭우로도 식힐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고 농밀하게 밤을 태우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 온몸이 뻐근했지만, 내 허리를 부서져라 꽉 껴안고 있는 강영현의 맨팔과 그의 고른 숨소리에 말할 수 없는 평온함이 밀려왔다.

내가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가락으로 살짝 쓸어내리자, 그가 잠결에도 내 몸을 자기 쪽으로 더 바짝 끌어당기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어디 가지 마..." 잠겨서 한껏 낮아진 목소리. 나는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작게 속삭였다. "안 가. 어딜 가.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네 여자라며."

그제야 그가 부스스 눈을 뜨더니, 나를 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어젯밤의 그 거칠고 포식자 같았던 텐션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사랑을 확인받은 몽글몽글한 대형견 한 마리가 내 품에 안겨 있었다.

"ㅇㅇ아." 그가 내 손을 잡아 자기 입술에 가져다 대며 진지하게 말했다. "남은 일주일, 우리 진짜 1초도 떨어지지 말자. 그리고 나 파견 가면, 넌 여의도에서 네 커리어 멋지게 쌓아. 난 런던에서 미친 듯이 실적 갈아치우고 가장 빠른 티켓 끊어서 돌아올 테니까."

"응. 서로의 발목 잡는 연애 말고, 서로가 있어서 더 높이 올라가는 연애 하자. 우리."

우리는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 환하게 웃었다. 이별을 앞둔 일주일이었지만, 우리의 마음은 20년의 세월을 통틀어 가장 견고하고 단단해져 있었다. 한 번의 거대한 위기를 겪고, 서로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나약함까지 모두 내보이고 뜨겁게 섞여든 우리는, 이제 그 어떤 시차나 거리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절대적인 온도를 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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