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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6

작전명 : '합법적 더블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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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오후 3시, 여의도 사무실 근처의 한적한 카페. 박 대리님이 유난히 조심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커피챗'을 요청했다. 평소 업무 이야기로 씩씩하던 그녀가 오늘은 유난히 빨개진 얼굴로 아이스 라떼 빨대만 만지작거렸다.

"저... 김 대리님. 실은 상담할 게 좀 있어서요." "네, 대리님. 말씀하세요. 무슨 일 있어요?"

"그... 저번에 저희 다 같이 술 마셨을 때 있잖아요. 그때 마포 최 사원님이 저 택시 태워주시면서... 번호를 물어보셨거든요. 그 뒤로 매일 연락을 하긴 하는데..."

박 대리님의 고민은 의외로 심플했다. 최 사원이 너무 다정하고 잘해주는데, 이게 단순히 '비밀을 공유한 동료'로서의 호의인지, 아니면 정말로 '여자'로서의 관심인지 헷갈린다는 것이었다.

"최 사원님이 워낙 성격이 좋으시잖아요. 그래서 저한테만 이러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괜히 저 혼자 김칫국 마시는 걸까 봐..."

나는 박 대리님의 수줍은 고백을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최 사원의 그 '다정함'은 우리 영현이에게서 배운 지독한 '직진 DNA'일 확률이 99%였기 때문이다.

퇴근 후, 나는 영현의 자취방으로 달려가 이 흥미진진한 소식을 전했다. 영현은 마침 배달 온 보쌈을 세팅하다가 내 이야기를 듣고는 젓가락을 멈췄다.

"어? 최 사원 녀석, 드디어 번호 땄대? 나한테는 비밀로 하더니 역시 발 빠르네." "자기야, 너 혹시 최 사원한테 뭐 들은 거 없어? 박 대리님은 지금 엄청 고민 중이시란 말이야."

영현은 보쌈 고기를 두 점씩 상추에 싸서 입에 넣으며 웅얼거렸다. "말도 마. 걔 요새 업무 메신저로 나한테 계속 물어봐. '대리님, 여자분들은 갑자기 꽃 선물 받는 거 좋아합니까?', '여의도에서 제일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 어디입니까?' 같은 거."

알고 보니 최 사원은 이미 영현에게 실시간으로 코칭을 받으며 박 대리에게 직진 중이었다. 다만, 그 방식이 너무 정중하고 조심스러워 박 대리님은 호의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

"안 되겠다. 저 둘, 우리가 좀 밀어줘야겠어. 이러다가는 올겨울 다 지나가겠어." 영현이 입가에 묻은 쌈장을 닦으며 비장하게 말했다. 우리의 '연애 조작단'이 결성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곧장 단톡방을 활성화했다.

박 대리님, 최 사원님! 이번 주 금요일에 저희 독감 완쾌 기념으로 소고기 한 번 더 쏠게요! 그때 그 집에서 봐요!

영현과 나는 철저하게 작전을 짰다. 식사 자리가 무르익을 때쯤, 우리가 슬쩍 빠져나와 두 사람만 남겨두는 고전적이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

금요일 저녁, 다시 모인 네 사람. "최 사원, 오늘 유난히 옷에 신경 썼네? 소개팅 가냐?" 영현이 짖궂게 놀리자 최 사원의 얼굴이 단번에 달아올랐다. 박 대리님도 수줍게 웃으며 최 사원이 건네는 냅킨을 받아 들었다.

식사를 마칠 때쯤, 영현이 미리 짜둔 대로 내 핸드폰을 가리키며 열연을 시작했다. "어? 자기야, 우리 아버지가 지금 집 근처에 오셨대! 갑자기 왜 오셨지? 우리 지금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 "어머, 진짜? 어떡해! 대리님, 사원님! 저희 진짜 급하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오늘 계산은 이미 영현이가 했으니까, 두 분이서 남은 술 더 드시고 가세요!"

우리는 연기파 커플답게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와 골목 모퉁이에 숨었다. 잠시 후, 식당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최 사원은 용기를 낸 듯 박 대리님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며 곁에 바짝 붙어 걸었다. 박 대리님도 싫지 않은지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묘하게 겹쳐졌다.

"성공인가?" 내가 속삭이자, 영현이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내 귓가에 대고 낮게 웃었다. "성공이지. 최 사원 저 녀석, 지금 손 잡을까 말까 오만 번 고민 중일걸? 우리 예전 모습 보는 것 같아서 웃기네."

영현은 내 손을 꽉 쥐고 자기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자기야, 남 연애 밀어주는 것도 좋은데, 이제 우리 연애도 좀 하자. 나 오늘 보쌈 먹어서 힘 넘치는데, 여의도 공원 한 바퀴 돌까?"

우리를 지켜주던 조력자들이 이제는 각자의 짝을 찾아 떠나가는 밤. 우리는 흐뭇한 마음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배웅하며, 우리만의 더 깊고 뜨거운 여의도의 밤을 향해 걸어갔다.

-

최 사원과 박 대리님을 성공적으로 택시에 태워 보내고 난 금요일 밤. 우리는 마포대교 위를 천천히 걸으며 밤공기를 만끽했다. 두 사람의 썸을 지켜보느라 은근히 곤두서 있던 신경이 한풀 꺾이자, 나른한 피로감과 기분 좋은 취기가 동시에 밀려왔다.

"아, 큰일 하나 해치웠다. 남 연애 밀어주는 게 이렇게 진 빠지는 일일 줄이야." 내가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리자, 강영현이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러니까. 남들 연애에 신경 쓴다고 정작 우리 진도를 못 뺐잖아. 억울해서 안 되겠다." "무슨 진도를 못 빼? 매일 찰싹 붙어 있었으면서." "그거랑 이거랑 다르지. 오늘 밤은 핸드폰 무음으로 해놔. 최 사원이 연애 상담한다고 톡 와도 절대 안 볼 거니까."

그의 낮고 끈적한 목소리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동료들의 풋풋한 시작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역시 가장 편안하고 완벽한 곳은 20년의 시간을 돌아 기어코 서로에게 안착한 우리 둘만의 공간이었다. 우리는 맞잡은 손을 흔들며, 오직 우리만의 주말이 기다리는 강영현의 자취방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느지막이 일어난 토요일 오후. 날씨가 유난히 화창해 우리는 무작정 고등학교 시절 자주 걷던 동네로 향했다. 목적지는 학교 앞, 우리가 10년 넘게 들락거렸던 허름한 즉석 떡볶이집이었다.

"어머! 영현이랑 ㅇㅇ이 아니야? 너네 진짜 오랜만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백발이 성성한 사장님께서 국자를 들고 반갑게 우리를 맞이하셨다.

"이모님, 저 맵찔이 된 거 아시죠? 순한 맛으로 2인분 주시고요, 튀김은 종류별로 다 주세요!" 강영현이 넉살 좋게 주문을 마친 뒤, 아주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사장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머, 너네 맨날 마주 보고 앉아서 서로 떡 더 먹겠다고 싸우더니... 웬일로 나란히 앉아? 게다가 손은 왜 잡고 있어?" 사장님의 예리한 지적에 나는 얼굴이 확 붉어져 손을 빼려 했지만, 강영현은 오히려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로 턱 올려놓았다.

"저희 사귀어요, 이모님. 제가 10년 동안 공들여서 겨우 넘어왔습니다."

그의 당당한 선언에 사장님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이내 손뼉을 짝 치며 환하게 웃으셨다. "아이고! 내 그럴 줄 알았다! 영현이 너 고등학생 때부터 ㅇㅇ이가 먹는 것만 쳐다보고 네 떡까지 다 양보하길래, 쟤가 저 가시나를 엄청 좋아하는구나 했지! 드디어 눈이 맞았네, 눈이 맞았어!"

사장님의 호들갑에 우리는 마주 보며 폭소를 터뜨렸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던 10년 전 강영현의 짝사랑을 이모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니.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달콤한 떡볶이 냄새 사이로, 20년의 세월이 차곡차곡 쌓인 우리만의 서사가 몽글몽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배를 든든히 채운 우리는 소화도 시킬 겸 모교의 텅 빈 운동장을 걸었다. 과거 수백 번도 넘게 뒹굴고 뛰놀았던 그 운동장 스탠드에 나란히 앉아, 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기분 이상하다. 여기서 체육복 입고 아이스크림 내기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내가 스탠드 계단을 발끝으로 툭툭 치며 말하자, 강영현이 내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툭 기대왔다.

"ㅇㅇ아. 나 요즘 가끔 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뭐가?" "네가 내 여자친구라는 거. 그리고 우리가 진짜로 '앞으로'를 같이 계획하고 있다는 거."

그의 덤덤하지만 묵직한 고백에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강영현은 장난기 하나 없는 진지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20년을 짝사랑만 하느라 급급했는데, 막상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이제는 더 욕심이 나. 너한테 부끄럽지 않은 남자가 되고 싶고, 네가 평생 기댈 수 있게 커리어도 더 탄탄하게 쌓고 싶어." "너 지금도 충분히 멋있어. 해외영업팀 에이스 강 대리님이잖아." "아니, 더 잘할 거야. 나중에 우리 부모님들 앞에서도, 네 앞에서도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고 든든한 남편이 될 수 있게."

그의 말은 단순한 다짐이 아니었다. 나라는 존재가 강영현이라는 남자의 삶의 원동력이자, 더 높은 곳을 향해 날아오르게 만드는 날개가 된 것이다. 그가 커리어에 이토록 진심인 이유가 결국 '나와의 완벽한 미래'를 위해서라는 사실에, 가슴 한구석이 벅차올랐다.

월요일이 밝았고, 우리는 다시 각자의 전장으로 돌아갔다.

여의도 마케팅팀의 김 대리, 그리고 마포 해외영업팀의 강 대리. 우리는 사내 연애를 하는 동료들처럼 점심을 같이 먹거나 탕비실에서 마주칠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떨어져 일하는 시간 동안 서로의 존재감은 더 빛을 발했다.

강영현(내남친)
자기야, 나 오늘 유럽 바이어 미팅 있어서 야근 풀로 뛰어야 할 듯. ㅠㅠ
헐. 밥은 챙겨 먹고 해. 나도 오늘 신제품 기획안 마감이라 오늘 안에 퇴근 못 할 것 같아.
강영현(내남친)
우리 에이스 김 대리님 화이팅. 끝나고 택시 타고 바로 집 가, 씻고 전화할게. 사랑해.

서로의 업무 강도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어설프게 투정을 부리거나 서운해하지 않았다. 나는 기획안을 작성하다 막힐 때마다 강영현이 내 주머니에 몰래 넣어두고 간 비타민을 보며 힘을 냈고, 강영현 역시 까다로운 바이어들을 상대하며 퇴근 후 내 목소리를 들을 시간만을 기다렸다.

우리는 20년 지기 친구 특유의 털털함으로 서로의 스트레스를 덜어주었고, 연인이라는 이름의 다정함으로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일이 바빠 얼굴을 못 보는 날에도, 우리의 온도는 단 한 번도 미지근해진 적이 없었다.

수요일 자정. 며칠 만에 야근을 일찍 끝낸 우리는 내 자취방 거실 소파에 나란히 기대어 앉아 캔맥주를 부딪쳤다.

"아, 살 것 같다." 강영현이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꿀떡꿀떡 맥주를 들이켰다. 나 역시 피곤한 몸을 그의 단단한 어깨에 푹 기댔다. TV에서는 심야 예능 프로그램이 조그맣게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저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자기야." 강영현이 내 손을 가져다가 자기 볼에 부비며 나른하게 불렀다. "왜?" "그냥.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완벽해서. 네 샴푸 냄새, 시원한 맥주, 내 어깨에 기댄 너. 하나부터 열까지 빈틈없이 꽉 찬 기분이야."

그의 목소리엔 피곤함 속에서도 숨길 수 없는 깊은 충만함이 묻어났다. 나 역시 그의 커다란 손을 마주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랬다. 20년의 긴 기다림 끝에 찾은 이 평온함은 견고한 성벽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위기도 우리의 이 단단한 궤도를 벗어나게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인생은 늘 가장 완벽하게 고요한 순간, 예상치 못한 파도를 몰고 오는 법이다. 강영현의 가방 속에는 그날 오후, 해외영업팀 부장님으로부터 조용히 전달받은 '런던 지사 파견 근무자 선발' 공문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이 밤의 우리는 아직 알지 못했다. 달콤하고 평화로웠던 폭풍 전야의 고요가 서서히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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