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y My Day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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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5

강릉, 그리고 분리불안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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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서 돌아온 직후의 아침. 여느 때라면 각자의 집에서 출근 준비를 마쳤겠지만, 어제 연차까지 써가며 붙어 있었던 여파로 영현은 도무지 나를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포역 근처 그의 자취방, 현관문을 나서야 하는 시간인데 영현은 내 코트 끝동을 잡고 늘어졌다.

"자기야, 진짜 가야 돼? 우리 회사 건물 그냥 합치면 안 될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너 해외영업팀 회의 있다며. 나도 오늘 팀장님한테 여행 보고... 아니, 연차 보고 해야 해."

정장을 다 갖춰 입고는 나를 보는 눈빛이 영락없이 주인을 회사에 보내기 싫어하는 고양이였다. 20년 동안 이렇게 끈적한 강영현을 본 적이 없어서 적응이 안 되다가도, 그의 눈에 서린 서운함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 넥타이 삐뚤어졌잖아. 일로 와봐."

나는 칭얼거리는 그의 수트 깃을 잡고 내 쪽으로 당겼다. 180cm가 넘는 그는 아주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 내 눈높이를 맞춰주었다. 20년 지기에서 연인이 된 후 가장 달라진 점은, 이런 사소한 스킨십에도 공기의 밀도가 순식간에 변한다는 것이었다.

집중해서 넥타이 매듭을 만지는 내 손길을 영현은 숨을 죽인 채 지켜봤다. 너무 가까워진 탓에 그의 목덜미에서 풍기는 짙은 비누향과 옅은 스킨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다 됐다. 강 대리님, 오늘 가서 돈 많이 벌어오세..."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영현이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자기 품으로 확 끌어당겼다. 넥타이를 잡고 있던 내 손이 그의 가슴팍에 닿았고, 그의 빠른 심장 박동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자기야, 방금 진짜 반칙이었어. 그렇게 가까이서 넥타이 매주면 내가 회사를 어떻게 가."

결국 마포역 정류장에서 각자의 버스를 타기 위해 섰다. 강영현은 마포 쪽으로, 나는 다리 건너 여의도 쪽으로. 고작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떨어지는 것뿐인데, 영현의 표정은 마치 파병이라도 가는 군인처럼 비장했다.

"나 도착하자마자 카톡 할 거야. 10분마다 할 수도 있어. 귀찮아도 다 읽어줘."

"알았어, 알았어. 너 오늘 바쁘다며. 일에 집중해."

"안 돼. 내 머릿속엔 어제 강릉 바다랑, 진짜 맛있었던 샌드위치랑 그리고... 너밖에 없어."

그는 남들 눈을 피해 내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억지로 발걸음을 돌렸다. 버스에 올라타 창밖을 보니, 정류장에 서서 내가 탄 버스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드는 강영현이 보였다. 평소의 시니컬한 매력은 온데간데없는, 사랑에 푹 빠진 못 말리는 고양이였다. 근데, 바다랑 샌드위치보다 내가 맨 뒤에 있는게 맞나?

강영현 대리
(오전 9시 15분) 도착했어? 여의도는 공기 좋아? 마포는 너 없어서 공기가 탁해.
강영현 대리
(오전 10시 30분) 회의 끝. 팀장님이 나보고 왜 이렇게 실실 웃냐고 한소리 하심. 내 광대가 안 내려와서 큰일이야.
강영현 대리
(오후 12시 05분) 점심 뭐 먹어? 나 오늘 메뉴 선정 실패했어. 네가 골라주는 게 제일 맛있는데. 보고 싶어 죽겠음.

업무 중에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확인해보면 전부 영현의 앙탈 섞인 메시지였다.

나는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나도 보고 싶어. 이따 퇴근하고 여의도 공원에서 봐. 내가 갈게.] 답장은 1초 만에 돌아왔다. [아니, 내가 갈게! 1초라도 더 빨리 보게 내가 네 회사 앞으로 갈 거야!]

퇴근 시간, 우리 회사 정문 앞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수트 재킷을 팔에 걸치고 초조하게 발을 까딱거리던 영현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달려왔다.

"자기야! 9시간 14분 만이야!"

"너 진짜 유난이다. 우리 어제까지 48시간 내내 붙어 있었어."

"그래서 그런가 더 보고싶었어!! 나 오늘 일하는 내내 너 넥타이 매주던 모습만 생각나서 서류도 눈에 안 들어왔단 말이야."

그는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나무 그늘 아래로 나를 이끌더니, 양팔로 나를 가둬버렸다. 여의도의 붉은 노을이 그의 콧날에 걸려 부드럽게 빛났다. 영현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대고 나른하게 웃었다.

"이제 살 것 같다. 나 진짜 너 없으면 안 되나 봐. 앞으로 연차는 무조건 같이 써. 알았지?"

대식가다운 식욕만큼이나 거대한 애정을 뿜어내는 이 '고양이 남친'을 내가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높게 올라간 텐션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여행의 여운은 가시지 않았고, 우리의 온도는 어느 때보다 강렬하고 끈적하게 여의도의 밤을 물들이고 있었다.

다음날 퇴근 5분 전, 여의도 사무실 창밖으로 노을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현에게서 "로비 앞 벤치에서 대기 중!"이라는 톡이 왔다. 짐을 챙겨 신나게 내려가는데, 멀리서 영현이 웬 남자와 당황한 기색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어? 강영현! 야, 너 진짜 이직한 거 맞지? 내가 이번 주에만 여기서 너를 세 번 봤어!"

목소리의 주인공은 영현의 대학 동기이자, 얼마 전 여의도 증권가로 이직했다는 민준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화단 뒤에 살짝 숨어 상황을 지켜봤다.

"아... 민준아. 어, 오랜만이네. 이직은 무슨, 나 여전히 마포 다녀."

"구라 치지 마. 네가 마포 다니는데 퇴근 시간마다 왜 여의도 한복판에 서 있어? 그것도 매일 다른 옷 입고! 저번엔 심지어 아침 출근 시간에도 여기서 샌드위치 먹고 있더만. 너 사실 우리 건물 옆동으로 옮긴 거지? 연봉 많이 받았냐?"

민준의 합리적인 의심에 영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24시간이 모자란 '분리불안 고양이' 모드로 여의도를 제집 드나들 듯했으니, 지인의 눈에는 영락없는 여의도 직장인으로 보였을 터였다.

"아니, 그게... 여기가 공기가 좋아서 산책 좀 하느라..."

"산책? 마포에서 여의도까지 퇴근 시간에 산책을 온다고? 너 혹시... 여의도에 꿀단지라도 숨겨놨냐? 아니면 여기 누구 사귀어?"

민준의 예리한 질문에 영현의 시선이 방황하다가, 결국 화단 뒤에 숨어있던 나와 딱 마주쳤다. 영현은 '살려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 모르는 척 핸드폰을 보며 지나가려 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영현이 내 쪽을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

"어! 저기... 저기 마케팅팀 김 대리님! 자료 전달해 드릴 게 있어서요!"

결국 민준에게는 '타사 간의 긴밀한 업무 협조'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위기를 모면했지만, 민준은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래, 협조... 근데 강영현, 너 아까 김 대리님 보는데 눈에서 꿀 떨어지더라? 너 조심해라, 그러다 여의도에 뼈 묻겠다."

민준이 멀어지자마자 영현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자기야, 나 진짜 조만간 여의도로 회사 옮겨야 할까 봐. 나 이제 여의도 지리 마포보다 더 잘 알아."

못 말리는 여의도 지박령 강영현 덕분에, 우리의 '비밀 아닌 비밀 연애'는 오늘도 아슬아슬하게 여의도의 밤을 채워가고 있었다.

목요일 저녁, 퇴근길 통화에서 내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으슬으슬한 기운이 돌고 목이 따끔거렸지만, 며칠 전 강릉 여행에서 너무 무리했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자기야,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그냥 요새 업무가 좀 많았잖아. 여행 다녀와서 밀린 것도 있고. 오늘 일찍 자면 괜찮아질 거야."

"진짜지? 내가 약이라도 사서 갈까? 아니면 죽이라도..." "됐어, 진짜로. 나 지금 바로 잘 거니까 연락하지 마. 너 오면 나 잠 깨서 더 피곤해."

평소라면 "얼른 와서 안아줘"라고 했을 텐데, 몸이 천근만근이라 나도 모르게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 영현은 잠시 침묵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알겠다고 답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침묵 속에 그가 얼마나 많은 걱정과 '내가 너무 귀찮게 했나' 하는 소심한 불안을 삼켰을지.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정오가 다 된 시간이었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프고 전신이 얻어맞은 듯 아렸다. 간신히 팀장님께 결근 메시지를 보내고 핸드폰을 확인하니 영현에게서 톡이 수십 개 와 있었다.

[자기야, 잘 잤어?] (오전 7:30) [일어났으면 답장 좀 해줘. 걱정돼서 잠 한숨도 못 잤단 말이야.] (오전 8:15) [아직 자? 많이 피곤한가 보네. 푹 자고 일어나서 연락해.] (오후 10:00)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나 이제 일어났어.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오늘 연차 썼어. 걱정 마.] 라고 짧게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마포의 강영현은 그 답장을 받고 더 큰 공황에 빠졌다. 평소라면 하트가 대여섯 개는 붙었을 답장이 너무나 건조했기 때문이었다. '진짜 내가 질렸나? 어제 오지 말라고 한 게 진심이었나?' 하는 오만가지 상상이 그를 괴롭혔다.

오후 4시, 더 이상 연락이 닿지 않자 영현은 반차를 내고 여의도로 달려왔다. 그는 현관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멋대로 들어갔다가 진짜 화내면 어떡하지?' 하지만 손은 이미 익숙하게 비번을 누르고 있었다.

삐비빅, 문이 열리고 들어선 집안은 냉기가 가득했다. 거실을 지나 침실로 들어간 영현은 침대 위에 웅크린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나를 발견했다.

"김ㅇㅇ! 정신 들어?"

그가 내 이마에 손을 얹자마자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열기는 단순히 '피곤해서' 생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야... 강영현... 너 왜 왔어... 옮아, 나가..." "너 미쳤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말을 안 해! 내가 어제 오지 말라고 했다고 진짜 안 왔으면 너 여기서 어쩔 뻔했어!"

그의 목소리는 화가 난 듯했지만, 떨리는 손끝에서는 공포가 느껴졌다. 그는 내가 싫어서 거부한 게 아니라, 정말 아파서 신음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그보다 더 큰 죄책감에 휩싸인 듯했다.

해열제를 먹여도 열이 40도 가까이 치솟자, 영현은 나를 겉옷으로 꽁꽁 싸매고 업은 채 응급실로 달렸다.

"환자분, 독감입니다. 열이 너무 높아서 수액이랑 해열 주사 같이 처방할게요."

하얀 병원 침대에 누워 수액을 맞는 내 옆에서, 영현은 내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그는 혹시나 내가 추울까 봐 자기 수트 재킷을 내 발 위에 덮어주고, 젖은 수건으로 내 마른 입술을 닦아주었다.

"영현아... 너 내일 해외 바이어 미팅 있잖아... 독감 옮으면 큰일 나... 제발 저리 가 있어..." "바이어가 문제야? 네가 지금 숨도 제대로 못 쉬는데! 옮아도 상관없어.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나아."

그는 내 손등에 이마를 대고 흐느끼듯 낮은 숨을 내뱉었다. "나 아까 오면서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 네가 나한테 질려서, 나 피하려고 아프다고 거짓말하는 줄 알았어. 내가 너무 들러붙어서 네가 도망가는 건가 싶어서... 나 진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주사를 맞고 열이 조금 내린 새벽, 우리는 다시 내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영현은 아예 팔을 걷어붙이고 내 곁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괜찮아. 너 빨리 집에 가서 자." "싫어. 나 오늘 여기서 너 지킬 거야. 해열제 시간 맞춰서 먹여야 돼."

그는 내가 잠들 때까지 침대 밑바닥에 앉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뒤척이면 번개같이 일어나 물을 떠 오고 이불을 고쳐 덮어주었다. 24시간 내내 붙어있던 강릉에서의 텐션과는 또 다른, 지독하고도 눈물겨운 애착이였다.

"미안해, 영현아... 걱정시켜서." "미안하면 빨리 나아. 나아서 다시 나한테 '강 대리님 유난 떨지 마세요'라고 구박해줘. 너 조용한 거 보니까 나 진짜 심장 떨어져 나갈 것 같아."

그는 내 손바닥에 자기 뺨을 부비며 아이처럼 중얼거렸다. 평소엔 그저 귀여운 '집착 고양이'인 줄만 알았던 이 남자가, 내가 아픈 순간에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었다. 나는 그의 체온을 느끼며, 독감보다 더 지독한 그의 사랑 속에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토요일 아침, 바이어 미팅때문에 주말 출근이 예정되어 있던 영현은 커다란 검은 마스크를 쓰고 내 자취방에 인사를 건내러 왔다.

"자기야, 왜 마스크 썼어? 아직 황사 심하다는 말 없었는데." "아... 그냥, 예방 차원에서. 너 독감 걸렸었으니까 나라도 멀쩡해야지."

그는 평소처럼 내 손을 잡았지만, 잡힌 손에 힘이 없었다. 붕붕 흔들던 대형견 같은 활기도 어디 가고, 묻는 말에만 겨우 대답하며 눈을 자꾸 깜빡였다. 평소라면 "자기 향기 마시니까 살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을 텐데, 오늘은 묘하게 맥아리가 없어 보였다.

"너 어디 아픈 거 아냐? 어제 나 간병하느라 무리했잖아." "아냐, 진짜 괜찮아. 오늘 오전 미팅만 끝나면 쌩쌩해질 거야. 걱정 마, 자기야."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지만, 내 손등에 닿은 그의 손끝이 유난히 뜨거웠다.

오전 내내 메신저 답장이 느렸다. [강영현 대리 : 회의 중], [강영현 대리 : 자료 정리 중]. 짧은 답장들에서 평소의 하트나 이모티콘이 사라지자 내 불안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결국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나는 마포로 넘어가는 버스를 탔다. 그의 회사 로비에 도착해 전화를 걸자, 한참 뒤에야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자기야? 몸은 어때?" "로비야. 내려와. 안 내려오면 내가 올라간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영현은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이 하게 들어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이마에 손을 얹자마자 화끈한 열기가 손바닥을 때렸다.

"야, 강영현. 이게 괜찮은 거야? 너 지금 불덩이잖아!" "아... 이상하다. 아까까진 버틸 만했는데, 네 얼굴 보니까 갑자기 기운이 다 빠지네..."

그는 내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대며 힘없이 웃었다. 고집 센 이 환자를 끌고 내가 향한 곳은 회사 근처 내과였다.

"38.8도네요. 독감 맞습니다. 어휴, 이 상태로 어떻게 일을 하셨어요?"

의사 선생님의 타박에 영현은 아이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해열 주사와 영양 수액이 처방됐고, 우리는 나란히 수액실 침대에 앉았다.

"자기야, 쉬는 날인데 집에서 푹 쉬어야지… 괜히 나때문에 회사 근처로 오고.." "조용히 해. 환자는 입 다물고 주사나 맞으세요."

영현이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사수에게 연락하라며 핸드폰을 건냈다. [부장님, 신규 고객사 미팅이 생겼습니다. 처리 후 바로 복귀하겠습니다.]

마포 해외영업팀의 에이스가 병원 침대에 누워 '가짜 미팅' 중인 상황. 영현은 내 손을 꼭 잡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나 진짜 불량 직원이네... 근데, 이렇게 너 옆에 누워 있으니까 아픈 것도 조금 좋을 지도 모르겠다."

똑, 똑. 링거 병에서 수액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수액실. 커튼으로 가려진 좁은 공간에서 우리는 손을 잡은 채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영현은 해열 주사가 들어가자 조금 살 것 같은지,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만지작거리며 나른하게 웃었다. "나 진짜 바보 같지. 너 아플 때 내가 다 아파주겠다고 큰소리쳐놓고, 정작 옮으니까 이렇게 맥을 못 추네."

"아니, 너 진짜 대단했어. 마스크 쓰고 일 다 하고. 역시 강 대리님이야." 내 칭찬에 그가 눈을 휘며 예쁘게 웃었다. 열꽃이 핀 뺨과 땀에 젖은 앞머리. 그는 내 손을 자기 입술로 가져가 아주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나 사실... 너한테 옮아서 조금 기분 좋아. 네 몸속에 있던 게 내 몸으로 온 거잖아. 우리 진짜 제대로 통한 것 같아서." "너 진짜... 아프니까 더 이상한 소리 하네."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렸지만,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한 시간 동안 흐르는 수액은 영현의 열을 식혀주었고, 우리의 연애는 그 짧은 일탈 속에서 더 깊고 끈끈하게 얽혀들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수액 병이 비자, 영현은 거짓말처럼 눈이 맑아졌다. 놀라운 회복력이었다.

"와, 이제 진짜 살 것 같다! 자기야, 나 방금 100% 충전됐어." 병원 문을 나서자 영현은 다시 우리가 알던 그 '여의도 지박령' 고양이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도 방심하지 마. 약 꼬박꼬박 먹고. 오늘 저녁엔 절대 우리 집 오지 말고 푹 자." "그건 안 되지! 간병해 준 보답으로 내가 맛있는 거 사 들고 가려고 했는데."

우리는 마포역 정류장에서 다시 헤어졌다. 한 시간 전의 병약했던 환자들은 온데간데없고, 상사에게 "미팅 잘 마치고 복귀 중입니다!"라고 보고하는 프로 직장인의 모습으로.

버스 뒷유리창 너머로 힘차게 손을 흔드는 영현을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독감 릴레이는 이렇게 끝이 났지만, 아픈 와중에도 내 손을 놓지 않던 그의 뜨거웠던 온기는 내 손바닥에 선명한 자국으로 남아있었다.

독감으로 고생하고 일주일 후, 갑자기 영현이는 나를 끌고 집 근처 헬스장으로 향했다.

"자기야, 우리 이대로는 안 돼. 기초 체력이 바닥이야."

헬스장 기본 티와 반바지를 입고 나타난 영현은 평소의 '분리불안 고양이'는 어디 갔는지, 제법 진지한 눈빛으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특히 평소 수트 아래 숨겨져 있던 그의 탄탄한 팔근육과 넓은 어깨가 운동복 위로 실루엣을 드러내자, 나는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자, 오늘은 내가 일일 PT 선생님이야. 일단 스쿼트부터 시작하자."

영현은 내 자세를 봐주겠다며 내 뒤에 바짝 섰다. "허리 펴고, 시선은 정면. 천천히 내려가 봐." 그의 목소리가 귓가 바로 옆에서 울렸다. 20년 친구의 목소리인데, 헬스장의 비트 강한 음악 소리를 뚫고 유독 낮고 묵직하게 꽂혔다.

내가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리자, 영현이 내 허리를 두 손으로 꽉 잡아 지탱했다. "자기야, 집중해야지. 나 보지 말고 거울 봐." "너, 너 때문에 집중이 안 되잖아..."

그는 낮게 웃으며 내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뜨거운 체온과, 운동으로 인해 조금 거칠어진 숨소리. 거울 속에는 내 등 뒤에 완전히 밀착된 영현의 모습이 비쳤다. 1cm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느껴지는 그의 낯선 아우라에 심박수가 스마트워치의 경고음을 울릴 정도로 치솟았다.

"거봐, 심박수 올라가는 거 보니까 운동 제대로 되네." 영현은 능글맞게 웃으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땀방울이 맺힌 그의 이마와 짙은 남성미가 풍기는 공기.

"근데 영현아, 너 아까부터 내 자세 교정해 주는 거야, 아니면 백허그 하는 거야?" "둘 다. 운동도 하고 연애도 하고, 이게 바로 일석이조 건강 데이트지."

결국 우리는 1시간의 짧은 운동 후, 영현의 "근성장엔 단백질이 필수"라는 논리에 따라 헬스장 근처 고깃집으로 향했다. 운동복 차림으로 나란히 걷는 길, 영현은 내 손을 꽉 쥐고 흔들며 "다음 주엔 등 운동 가르쳐줄게. 기대해, 자기야."라며 윙크를 날렸다.

무너진 체력을 기르러 갔다가 오히려 내 심장 박동수만 고장 나버린, 뜨겁고도 건강한 토요일 오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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