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의 아침 햇살은 잔인할 정도로 눈부셨지만, 두꺼운 암막 커튼은 고맙게도 우리만의 새벽을 조금 더 연장해주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건 낯선 침구의 촉감이 아니라, 내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 안은 팔의 무게감이었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바로 코앞에 잠든 강영현의 얼굴이 있었다. 안경을 벗고 무방비하게 잠든 얼굴, 평소보다 조금 부어있는 입술, 그리고 내 어깨에 닿는 그의 규칙적인 숨결.
'진짜... 어제 꿈 아니었구나.'
20년 동안 그저 '내 옆에 당연히 있는 존재'였던 그가, 어젯밤을 기점으로 내 인생에서 가장 낯설고도 뜨거운 존재로 탈바꿈했다. 어둠 속에서 나를 갈구하던 그의 깊은 눈빛과 낮게 깔리던 음성이 떠올라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등을 만져보았다. 마디 굵은 남자의 손. 이제 이 손은 더 이상 장난치며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던 친구의 손이 아니었다.
"더 자도 되는데."
잠이 덜 깬 낮고 잠긴 목소리가 내 귓가를 울렸다. 어느새 눈을 뜬 강영현이 나를 자기 품으로 더 깊숙이 끌어당겼다. 그의 맨살이 닿는 곳마다 어젯밤의 기억들이 파편처럼 되살아났다. 장난기라곤 찾아볼 수 없던 집요한 입맞춤과,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그 떨림들.
"영현아... 너 언제 깼어?" "방금. 네가 나 쳐다보는 시선이 너무 뜨거워서."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코끝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이내 시선이 내 입술에 머물자,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어제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자기야, 나 어제... 사실 한숨도 못 잤어. 네가 옆에 있는데 어떻게 잠이 오겠어. 20년 동안 참은 게 한꺼번에 터지는 기분이라."
그가 내 이마를 자기 이마에 콩 맞대며 속삭였다. 친구였을 땐 상상도 못 했던 농밀한 고백들. 우리는 한참 동안 이불 속에서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며, 어제의 텐션보다 더 깊고 몽글몽글한 아침의 주파수를 맞춰나갔다.
"배고파 죽겠다. 나 지금 배랑 등이 붙은 것 같아."
샤워를 마치고 나온 강영현은 다시 우리가 알던 대식가로 돌아와 있었다. 어젯밤의 그 치명적인 남자는 어디 가고, 배고프다며 배를 문지르는 여우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우리는 근처 유명한 초당순두부 집으로 향했다. 강영현은 메뉴판을 보더니 거침없이 주문을 시작했다. "여기 짬뽕순두부 두 개랑, 모두부 하나, 그리고 메밀전병도 주시고요... 아, 공기밥 하나 더 추가해 주세요."
"야... 아니, 자기야. 우리 둘뿐이야. 4인분을 시키면 어떡해?" "나 어제 에너지 소비 많이 했단 말이야. 그리고 여기 평일엔 줄 서서 못 먹는 곳이래. 온 김에 다 먹어야지."
그는 정말로 나온 음식들을 전투적으로 해치우기 시작했다. 하얀 두부를 간장에 콕 찍어 입안 가득 넣고 오물거리는 모습이 어찌나 복스럽고 귀여운지, 그가 맛있게 먹는 모습만 봐도 어젯밤의 긴장감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내 앞접시에 전병을 놓아주며 환하게 웃었다. 먹는 것만큼은 진심인 내 남자친구였다.
식사를 마치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중이었다. 내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월요일 오전 9시 - 주간 마케팅 회의].
"아... 맞다. 우리 오늘 서울 가야 하지." 내 말에 창밖의 파도를 멍하니 보던 강영현의 눈썹이 축 처졌다.
"가기 싫다. 여의도(내 회사)랑 마포(영현 회사)가 가깝긴 한데, 서울 가면 또 '강 대리님', '김 대리님' 해야 하잖아. 나 너랑 하루만 더 있고 싶어."
강영현이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자기야, 우리 월요일 연차 쓸까? 나 아직 연차 많이 남았는데. 너도 저번에 프로젝트 끝났으니까 쉴 수 있잖아."
우리는 서로의 눈을 읽었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연인'으로서 맞이한 이 강렬한 시간을 단 1박 2일로 끝내기엔 너무나 아쉬웠다. 마케팅 팀장님과 해외영업 부장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남자의 간절한 눈빛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좋아. 나도 쓸래. 하루 더 있자, 우리."
[팀장님, 죄송합니다. 어제부터 몸살 기운이 너무 심해서 오늘 연차 사용하겠습니다.] [부장님, 급한 개인 사정으로 오늘 하루 연차 사용하겠습니다. 급무는 메일로 처리하겠습니다.]
각자의 회사에 메시지를 보내고 확인 문자를 받는 순간,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환호성을 지르며 바닷가로 뛰어 나갔다. 월요일 오전의 바닷가는 주말의 번잡함이 사라지고 고요했다.
"와! 이제 진짜 우리 세상이다!"
강영현이 내 허리를 번쩍 안아 들어 빙글빙글 돌렸다. 텅 빈 해변, 파도 소리, 그리고 정장 대신 편안한 옷차림을 한 우리 둘.
"자기야, 나 지금 너무 행복해. 회사 걱정 안 하고, 부모님 눈치 안 보고, 그냥 너랑 이렇게 바다 걸을 수 있어서."
그는 내 손을 꽉 쥐고 주머니 속에 넣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추가된 24시간의 자유, 그리고 그 시간을 채울 더 깊고 진한 사랑뿐이었다. 우리는 다시 우리의 공간들로 돌아가는 길 대신, 더 먼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20년의 우정이 지나온 길보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 걸을 이 하루가 더 길게 느껴지는 평화로운 월요일 아침이었다.
오전 11시. 평소라면 회사 모니터 앞에서 커피를 들이켜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강릉의 한 작은 브런치 카페 구석자리에 앉아 있었다. 월요일 오전의 카페는 우리를 제외하면 동네 주민 몇 분뿐이라, 주변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었다.
"자기야, 여기 에그 베네딕트 하나랑, 프렌치 토스트 세트, 그리고 잠봉뵈르 샌드위치도 추가할까?"
영현은 메뉴판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아침을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의 위장은 쉴 틈이 없었다.
"그걸 다 먹겠다고? 우리 아까 편의점에서 샌드위치 먹었잖아." "그건 간식이었지. 이제 정식으로 브런치를 즐겨야지. 오늘 우리 연차잖아.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다고."
그는 정말로 세 가지 메뉴를 다 해치우고도 내 접시에 남은 소시지까지 탐을 냈다. 볼이 빵빵해지도록 음식을 밀어 넣으면서도 내 입가에 묻은 시럽을 손가락으로 슥 닦아 본인 입으로 가져가는 그의 행동은, 어제보다 훨씬 대담하고 자연스러웠다. 20년 친구의 허물없는 모습에 연인의 능글맞음이 더해지니, 나는 그저 얼굴을 붉히며 커피만 들이킬 뿐이었다.
배를 든든히 채운 우리는 소나무 숲이 울창한 송정 해변으로 향했다. 주말의 소란스러움이 걷힌 숲길은 파도 소리조차 선명하게 들릴 만큼 조용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맞잡고 천천히 걸었다. 모래사장 위로 겹쳐진 우리의 그림자가 유난히 길게 늘어졌다. 걷던 중 내가 잠시 멈춰 서서 바다를 바라보자, 영현이 뒤에서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자기 품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영현아... 누가 보면 어떡해." "아무도 없어. 그리고 보면 어때, 내 여자친구 내가 안고 있겠다는데."
그는 내 어깨에 턱을 괴고 낮게 속삭였다. 그의 단단한 가슴팍이 내 등에 닿고, 목덜미에 그의 뜨거운 숨결이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친구였을 땐 상상도 못 했을 노골적인 접촉. 그는 내 귓볼을 살짝 깨물며 덧붙였다.
"나 어제부터 계속 이 생각만 했어. 서울 가기 싫다. 그냥 여기서 너랑 계속 이렇게 있고 싶다."
오후에는 안목 해변의 전망 좋은 카페 3층을 우리가 통째로 빌린 듯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며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영현은 테이블 위로 내 손을 가져가 손가락 마디마디에 입을 맞췄다. 예전엔 "야, 징그럽게 왜 이래!"라고 소리쳤을 행동들이 이제는 심장을 조여오는 텐션으로 다가왔다.
"자기야, 너 그거 알아? 너 집중해서 바다 볼 때 눈동자 진짜 예쁜 거." "갑자기 무슨... 낯간지러운 소리야." "진짜인데. 나 사실 아까부터 너 입술밖에 안 보여. 어제보다 더... 좋아진 것 같아서."
그의 시선이 내 입술에 노골적으로 머물렀다. 텅 빈 카페, 잔잔한 음악 소리, 그리고 우리 사이에 흐르는 짙은 공기. 그는 의자를 내 쪽으로 바짝 당겨 앉으며 내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확신이 들자, 그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어제보다 더 깊고, 더 대담한 입맞춤이 노을빛 속에서 길게 이어졌다.
저녁이 되자 우리는 강릉 중앙시장으로 향했다. 여전히 배고픈 영현을 위해 닭강정과 어묵 고로케를 한 보따리 샀다. 검은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서도 그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영현아, 우리 진짜 연애하는 거 실감 난다.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 손잡고 다니니까." "난 20년 전부터 이러고 싶었어. 네가 딴 놈이랑 떡볶이 먹으러 갈 때마다 내가 얼마나 속 터졌는지 알아?"
그는 닭강정 하나를 내 입에 넣어주며 씩 웃었다. "이제는 눈치 안 보고 내가 너 맛있는 거 다 사줄 거야. 너 살쪄도 돼. 내가 다 책임질게."
대식가다운 고백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 20년 동안 친구라는 이름으로 숨겨왔던 그의 마음들이, 이 여행의 끝자락에서 하나둘씩 툭툭 튀어 나왔다. 화려한 레스토랑은 아니었지만, 시장 골목에서 나누는 이 소박하고 대담한 애정 표현들이 우리의 관계를 더 단단하게 묶어주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직전, 우리는 마지막으로 밤바다 앞에 섰다. 달빛만 비치는 바다는 고요했고, 파도는 발밑까지 밀려왔다 사라졌다.
영현은 자기 재킷 안으로 나를 쏙 집어넣어 감싸 안았다. 차가운 바닷바람 속에서도 그의 품 안은 화로처럼 뜨거웠다.
"이제 가면 다시 여의도랑 마포네. 그래도 슬퍼하지 마. 이제 우리 퇴근하고 바로 만날 수 있잖아." "응. 비밀 연애도 이제 부모님들 아시니까 좀 더 편해지겠지?"
그는 내 이마에 진하게 입을 맞추며 약속했다. "내일 출근해서 '강 대리님'으로 돌아가도, 내 주파수는 항상 너한테만 맞춰져 있을 거야. 그리고 조만간... 우리 진짜 같이 살 집 알아보러 가자. 나 이제 너랑 떨어져 있는 시간 1분도 아까워."
여행의 끝은 다시 일상의 시작이었지만, 우리의 20년 우정은 이 강릉의 월요일을 지나 완벽하고 대담한 사랑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우리는 기차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도 깍지 낀 손을 절대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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