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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3

KTX 5호차, 좁혀진 거리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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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우리 1박 2일 가는 거 맞지? 한 달 살기 하러 가는 거 아니지?"

서울역 대합실, 내 앞에는 양손 가득 편의점 봉투와 햄버거 쇼핑백을 든 강영현이 서 있었다. 기차 타기 직전인데 그의 봉투 안에는 햄버거 세트 두 개, 샌드위치 세 팩, 닭강정, 그리고 각종 음료수가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원래 기차 여행의 묘미는 먹는 거야. 그리고 나 아침 안 먹어서 지금 손 떨린단 말이야."

그는 대식가답게 비장한 표정으로 봉투를 고쳐 쥐었다. 평소 매운 것도 못 먹고 단것도 안 좋아하면서, 담백한 빵이나 고기 종류에는 끝도 없이 들어가는 그의 위장은 정말이지 경이로울 정도였다.

"나랑 단둘이 여행 가는 건데, 먹는 거 생각밖에 안 나?" 내 짐짓 서운한 척하는 물음에, 그는 짐을 벤치에 내려놓더니 내 허리를 끌어당겨 자기 품에 가두었다.

"무슨 소리야. 먹는 건 생존이고, 이번 여행의 본론은 너랑 24시간 내내 붙어 있는 거지. 나 어제 설레서 한 잠도 못 잤어."

그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유난히 발그레했다. 그가 챙겨온 거대한 식량 더미조차 우리 여행의 설레는 예고편처럼 느껴졌다.

기차에 올라타 자리에 앉았다. KTX 특유의 좁은 좌석은 우리의 어깨와 팔을 필연적으로 밀착시켰다.

강영현은 앉자마자 익숙하게 무선 이어폰 한쪽을 내 귀에 꽂아주었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그가 직접 만든, 가사가 유독 달콤한 데모곡이었다. 기차가 매끄럽게 출발하자, 그는 창 밖 풍경 대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풍경 봐, 예쁘다." "내 옆에 제일 예쁜 게 있는데 풍경이 눈에 들어오겠어?"

그는 내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어 단단히 깍지를 꼈다. 20년 동안 수없이 봤던 그의 손인데, 오늘따라 마디마디가 굵고 단단한 남자의 손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잠시 후, 그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낮게 읊조렸다. "자기야, 나 지금 되게 긴장돼. 너랑 가족 없이, 친구 없이 단둘이 기차 타는 거... 처음이잖아."

그의 체온이 닿는 곳마다 심장이 쿵쿵 울렸다. 좁은 좌석 안에서 느껴지는 그의 짙은 비누향 향수 냄새와 일정한 심장 박동. 우리는 말없이 손을 꽉 맞잡은 채,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우정의 경계를 넘어 사랑의 속도로 달리는 기차 안은, 어느 때보다 팽팽한 텐션으로 가득했다.

강릉에 도착하자마자 우리가 향한 곳은 항구 근처의 소문난 횟집이었다. 강영현은 메뉴판을 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주문을 시작했다.

"여기 모둠회 대(大)자 하나 주시고요, 물회 하나랑 매운탕은 나중에 주시는데... 아, 물회는 양념 따로 좀 빼주실 수 있나요? 제가 매운 걸 잘 못 먹어서요."

그는 능숙하게 거의 메뉴판의 여기부터 여기까지 주세요 수준의 주문을 마쳤다.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이걸 다 먹겠다고?"

"걱정 마. 내가 다 먹을 수 있어."

그는 정말로 쉴 새 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 회를 두 점씩 집어 상추에 싸 먹고, 담백한 스끼다시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갔다. 그가 정말 복스럽게, 그리고 맛있게 음식을 해치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묘한 쾌감마저 느껴졌다.

"맛있어?" "어. 근데 자기가 먹여주면 더 맛있을 것 같아."

그가 쌈을 하나 싸서 내 입에 넣어주고는, 본인도 입 안 가득 회를 넣고 행복한 듯 웃었다. 그의 통통하게 부푼 볼이 너무 귀여워서 자꾸만 손을 뻗어 만지고 싶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어느덧 해가 지고 바다는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우리는 모래사장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파도 소리가 우리의 대화 사이사이를 메우고, 차가운 바닷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추워?" 강영현이 자기가 입고 있던 오버핏 코트를 벗어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의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코트 안으로 쏙 들어가자,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자기야, 나 사실 아까부터 계속 이 생각만 했어." "무슨 생각?"

그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눈동자에 맺혀 반짝였다. "오늘 밤에, 너랑 단둘이 방에 있으면... 내가 나를 잘 통제할 수 있을지."

그의 직설적이고도 낮은 목소리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장난기 하나 없는 진지한 얼굴. 20년의 세월을 뚫고 나온 남자의 욕망이 서린 눈빛이었다. 밤바다의 찬 공기는 평소보다 훨씬 더 깊고 진하게 우리를 휘감았다.

드디어 도착한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담하고 깔끔한 방 안에는 커다란 침대 하나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관 불이 꺼지고 은은한 간접 조명만 켜진 방 안. 짐을 내려놓은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거리만 유지한 채 서 있었다. 밖에서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지만, 지금 이 방 안은 우리의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만큼 고요했다.

"씻을래? 아니면... 맥주 한 잔 더 할까?" 내가 어색함을 깨려 말을 건네자, 강영현이 천천히 다가와 내 앞에 섰다.

"아니. 맥주 안 마셔도 충분히 취한 것 같아."

그가 내 허리에 손을 얹고 천천히 자기 품으로 당겼다. 가까워진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그의 빠른 심장 박동. 그는 내 뺨을 타고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내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야, 강영현..." "야 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화난 거 아니면."

그가 낮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코끝이 맞닿고, 서로의 뜨거운 숨결이 섞여 들었다. 20년 전 놀이터에서 모래성을 쌓던 아이들도, 회사에서 존댓말을 쓰던 동료들도 여기엔 없었다. 오직 서로를 향한 갈증으로 가득 찬 연인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의 입술이 마침내 내 입술 위로 진하게 겹쳐지며, 우리의 첫 여행은 비로소 진짜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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