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마포역 근처 단골 카페. 강영현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노트북을 켜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황급히 화면을 닫았지만, 나는 보았다. 화면 가득 떠 있던 '서울권 인기 웨딩홀 잔여 타임'이라는 글자를.
"자기야, 왔어?"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내 커피를 밀어주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20년을 친구로 지냈고, 이제야 겨우 내 마음을 온전히 얻어낸 그에게 '결혼'은 어쩌면 평생을 기다려온 종착역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달랐다. 이제 막 시작된 이 달콤한 연애를, '자기야'라고 부르며 설레는 이 평일의 데이트를 조금 더 오래, 오로지 우리 둘만의 것으로 누리고 싶었다.
"부모님들이 또 카톡 엄청 보내셨지? 웨딩홀 투어라도 가보라고."
내 물음에 영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멈칫했다. 그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
"응. 근데 우리 아직 사귄 지 두 달밖에 안 됐잖아. 부모님들한테는 '준비하는 척'만 해서 안심시켜 드리고, 주말엔 그냥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어때?"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자신의 조바심보다 나의 부담감을 먼저 읽어내고 한 발짝 물러서 주는 배려. 그게 20년 지기 강영현이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정말 괜찮아? 넌 사실 당장이라도 식장 잡고 싶어 하는 거 다 알아."
내 물음에 영현은 짐짓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 코끝을 톡 건드렸다.
"당연하지. 난 10년 전부터 네 신랑 입장곡까지 골라둔 놈인데. 근데, 20년을 기다렸는데 고작 몇 달 더 못 기다릴까 봐?"
그는 깍지 낀 손을 꽉 쥐어주며 덧붙였다.
"네가 연애 더 하고 싶으면 연애하는 거고, 10년 뒤에 결혼하고 싶으면 10년 뒤에 하는 거야. 난 그냥 네 옆에만 있으면 돼. 그러니까 부모님 압박 같은 거 신경 쓰지 마. 악역은 내가 다 할게."
그의 말을 듣는데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그는 항상 그랬다. 친구일 때도, 연인이 된 지금도 늘 나의 속도를 존중하며 그 뒤를 묵묵히 따라와 주었다.
우리는 결국 '결혼 준비'라는 명목하에 부모님들께 보고할 가짜 체크리스트를 만들기로 했다. 사실은 그 리스트를 핑계로 평일에 더 자주 보고,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금요일 저녁, 마포의 한 조용한 선술집. 우리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직장 동료들인 박 대리님과 최 사원을 다시 만났다. 부모님들의 등쌀에 밀려 '가짜 결혼 준비' 중이라는 우리의 고충을 털어놓기 위한 자리였다.
"세상에, 부모님들 화력이 그 정도예요? 강 대리님 책상에 '신혼 가전' 리스트가 있길래 전 진짜 하시는 줄 알았죠!"
박 대리님이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그런데 옆에 앉은 최 사원이 평소답지 않게 조용했다. 그는 조용히 젓가락을 들어 박 대리님 앞접시에 생선 살을 발라 올려주고 있었다.
"어... 최 사원. 너 원래 생선 살 같은 거 안 발라주잖아. 회식 때도 너 혼자 다 먹던 놈이."
영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제 후배를 지켜봤다. 최 사원은 짐짓 덤덤한 척 대답했다.
"아, 박 대리님 아까 젓가락질 힘들어 보이셔서요. 대리님, 이거 맛있어요. 드셔보세요."
박 대리님의 볼이 미세하게 발그레해졌다. 나는 영현과 시선을 교환했다. 이건... 100%다.
"저희 비밀 지켜주시는 거, 힘들지 않으세요? 맨날 저희 염장 지르는 거 보셔야 하잖아요."
내 농담에 박 대리님이 수줍게 웃으며 최 사원을 힐끔 보았다.
"처음엔 좀 그랬는데... 요새는 두 분 보면서 대리 만족도 하고, 또... 음, 최 사원님이 워낙 말을 잘 들어주셔서 생각보다 재밌어요."
"맞아요. 비밀 공유라는 게 은근히 사람을 가깝게 만들더라고요. 그렇죠, 대리님?"
최 사원의 노골적인 눈빛에 박 대리님이 고개를 푹 숙였다. 우리 커플의 뒤를 봐주던 조력자들이, 어느새 우리보다 더 뜨거운 썸을 타고 있었던 것이다. 영현은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낄낄거리며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술자리의 대화는 어느덧 우리의 결혼 고민에서 저 둘의 썸으로 옮겨갔다. 덕분에 부모님들의 결혼 압박으로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술자리가 끝나고 방향이 같은 박 대리님과 최 사원을 먼저 택시에 태워 보냈다. 두 사람이 탄 택시 뒷유리창 너머로 최 사원이 박 대리님 쪽으로 몸을 숙이는 장면을 목격한 영현이 휘파람을 불었다.
"저 둘이 이젠 밥 사야겠는데?"
우리는 나란히 버스 정류장에 앉았다. 7016번 버스가 들어오고, 우리는 습관처럼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영현이 내 머리를 자기 어깨에 기대게 했다.
"자기야. 부모님들이 아무리 몰아붙여도, 우리 진짜 천천히 가자. 난 너랑 이렇게 버스 타고, 밤마다 손잡고 걷는 이 시간이 너무 아까워. 바로 유부남 되기엔 네 남친 노릇이 너무 재밌단 말이야."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긋하고 다정했다. 내가 느꼈던 부담감을 완벽하게 씻어내 주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
"응... 나도. 우리 연애 진짜 원 없이 하자. 20년 치 못한 거 다 해야지."
나는 그의 외투 주머니 속에서 그의 손을 꽉 마주 잡았다. 부모님들의 성화도, 주변의 시선도 이 좁은 버스 안의 우리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연애 중'이라는 설레는 신호를 가장 강하게 내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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