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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0

작전명 : '이번엔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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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리님과 최 사원의 조언은 꽤 일리가 있었다. 어설프게 분위기를 잡느니, 시각적으로 '우리는 남녀 사이'임을 때려 박는 것이 필요했다. 우리는 토요일 오후, 부모님 댁이 있는 광진구로 향하기 전 마포의 한 카페에서 최종 점검을 했다.

강영현은 해외영업팀 중요한 미팅 때나 입는 날렵한 핏의 다크 그레이 수트를 차려입었고, 나는 평소 입지 않던 화사한 베이지색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장미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자기야, 긴장돼?" 강영현이 내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응. 근데 너 수트 입은 거 보니까 내가 다 설레서 큰일이네. 부모님들이 이번에도 친구라고 하시면 진짜 나 그냥 너랑 도망갈 거야." "도망은 무슨. 오늘은 내가 아버님 무릎이라도 꿇고 앉아서 허락받을 거니까 걱정 마."

그는 비장했다. 딸꾹질의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아침부터 물도 조심해서 마신 그였다.

광진구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은 누가 봐도 상견례를 앞둔 예비부부처럼 보였다.

"잠깐만, 자기야. 립스틱 번졌어." 강영현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직전, 멈춤 버튼을 누르더니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술 끝을 닦아주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멈칫하며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왜? 아직 번졌어?" "아니... 너무 예뻐서."

그가 홀린 듯 고개를 숙여 내 입술에 짧고 진하게 입을 맞췄다. 엘리베이터라는 폐쇄된 공간, 그리고 1초 뒤면 부모님을 마주해야 한다는 긴장감이 섞여 우리의 입맞춤은 평소보다 훨씬 더 깊고 농밀해졌다. 우리는 띵- 소리가 날 때까지 서로를 놓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허리를 감싸 안고, 강영현은 내 이마에 입을 맞추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분리수거 바구니를 든 우리 아빠와, 마침 옆집(영현이네)에서 나오던 영현이 어머니가 굳어버린 채 서 계셨다.

"……어?" "……어머."

강영현의 손은 여전히 내 허리에 단단히 감겨 있었고, 내 손은 그의 수트 깃을 꽉 쥐고 있었다. 강영현의 다른 한 손에 들린 화려한 장미꽃다발이 그 민망한 공기 속에서 유난히 붉게 빛났다.

"아... 저기... 아버님. 어머니." 강영현이 로봇처럼 굳어서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는 것도 잊은 채로. 아빠의 손에 든 재활용 맥주 캔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강영현. 너 지금... 우리 딸 허리 잡고 뭐 하는 거야?" 아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평소 "영현아~"하며 아들처럼 부르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니, 저기... 아줌마. 그게 아니라요." 내가 변명을 하려 했지만, 영현이 어머니의 시선은 이미 우리 둘의 깍지 낀 손과 강영현의 흐트러진 넥타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너네... 설마 저번에 딸꾹질하던 날도... 성수동에서 마주친 날도... 계속 이랬던 거니?" 영현이 어머니의 물음에 강영현이 내 손을 더 꽉 쥐었다. 그는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듯, 아주 당당하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어머니. 저희 사귑니다. 김ㅇㅇ, 제가 20년 동안 짝사랑하다가 이제야 간신히 제 여자로 만들었습니다. 친구 사이 같은 거 끝낸 지 오래됐습니다."

아빠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장난기 하나 없는 영현의 진지한 눈빛에, 아빠는 들고 있던 분리수거 바구니를 바닥에 내던지며 소리치셨다. "이놈아! 그럼 진작 말을 했어야지! 내가 너 믿고 우리 딸을 얼마나 맡겼는데... 세상에,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겼네!!"

그날 저녁, 양가 부모님은 우리 집 거실에 모여 앉으셨다. 정장을 입고 꽃다발을 든 강영현은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앉았고, 나 역시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래... 언제부터였어?" 우리 엄마가 팔짱을 끼고 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눈가에는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살짝 어려 있었다. 사실 엄마들은 저번 딸꾹질 사건 이후로 아주 약간은 의심을 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두 달 됐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20년 전부터였습니다." 강영현의 직구에 영현이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웃음을 터뜨리셨다. "아이고, 영현아. 너 진짜 독하다. 어떻게 그걸 20년을 참았니? 어쩐지, 너 고등학교 때부터 ㅇㅇ이 근처에 남자애들만 오면 눈을 부라리더라니."

"아빠는... 아빠는 아직 이 결혼(?) 반대다! 영현이 너, 우리 딸 귀한 줄 모르고 막 대하면..."

"아빠, 우리 아직 결혼한다고 안 했거든!"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거실의 공기가 급속도로 냉각됐다. 아빠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식탁에 탕 놓으시더니, 금방이라도 뒷목을 잡으실 기세로 나를 노려보셨다.

"뭐라고? 결혼 생각이 없어? 그럼 지금 20년 지기 친구 딸내미를, 그것도 이 영현이 녀석이! 그냥 '연애'만 하려고 만났다는 거야? 너 지금 내 딸을 뭘로 보고!"

"아니, 아빠 그게 아니라... 우린 이제 막 시작했으니까..." 내 해명은 아빠의 귓가에 닿지도 않았다. 아빠의 화살은 곧장 내 옆에서 석고대죄 중인 강영현에게로 향했다.

"강영현! 너 똑바로 말해. 너 우리 딸이랑 결혼 안 할 거야? 그냥 좀 만나다가 '성격 차이'니 뭐니 하면서 헤어질 생각이었어? 어?!"

강영현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무릎을 더 바짝 고쳐 앉았다. 그의 수트 차림이 오늘따라 유난히 더 비장해 보였다.

"아닙니다, 아버님! 절대 그런 가벼운 마음 아닙니다!" "그럼 뭔데! 결혼 안 한다며!" "그건 ㅇㅇ이가 놀라서 한 말이고, 저는... 저는 처음부터 이 친구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인생 계획에 ㅇㅇ이가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강영현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아빠는 씩씩거리면서도 영현의 눈에 서린 진심을 읽었는지, 슬그머니 젓가락을 다시 집어 드셨다

"아버님, 제가 면허가 없어서 ㅇㅇ이가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만 앉아 다니고, 매운 거 못 먹어서 맨날 ㅇㅇ이가 메뉴 골라주는 대로만 먹는 놈이지만... 그래도 ㅇㅇ이 행복하게 해줄 자신은 누구보다 확실합니다."

강영현은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20년 동안 친구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기다렸습니다. 다른 놈들이 ㅇㅇ이 곁에 오는 거 방해하고, 엇갈릴 때마다 속앓이하면서도 결국 여기까지 왔습니다. 단순히 '연애' 한 번 해보려고 이 소중한 관계를 건 게 아닙니다. 저는 ㅇㅇ이랑 평생을 같이할 준비, 이미 10년 전부터 끝냈습니다."

거실에 정적이 흘렀다. 영현이 어머니는 감격한 듯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셨고, 우리 엄마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강영현의 앞에 갈비찜을 듬뿍 얹어주셨다.

"아이고, 우리 영현이 말하는 것 좀 봐. 아빠, 그만 좀 해. 애 겁먹겠다. 영현아, 많이 먹어. 너 오늘 고생했다."

"고생은 무슨! 이놈 이거,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하는 거 보니까 아주 능수능란하던데! 너 우리 딸 입술은 언제부터 그렇게..." 아빠의 집요한 추궁에 강영현은 다시 귀끝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건... 아버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책임지겠습니다! 무조건 책임집니다!"

결국 그날 밤, 강영현은 아빠에게 붙잡혀 소주를 너댓 병이나 비워야 했다. 아빠는 술기운이 오르자 언제 화를 냈냐는 듯 강영현의 어깨를 툭툭 치며 허물없이 굴기 시작했다.

"야, 강 서방. 너 우리 딸 눈에 눈물 나게 하면, 그땐 내가 마포대교에서 너 기다릴 줄 알아. 알았어?"

"아빠! 강 서방이라니, 아직 아니라고!" 내 외침에도 아빠는 막무가내였다.

"뭐가 아니야! 20년을 한집 식구처럼 살았는데, 이제 와서 남남처럼 연애만 한다는 게 말이 돼? 너네는 그냥 결혼식만 안 올렸지 이미 부부나 다름없어!"

옆에서 영현이 어머니는 벌써부터 예식장 이야기를 꺼내고 계셨다. "ㅇㅇ아, 너네 회사 근처에 예쁜 홀 많더라. 엄마가 내일 좀 알아봐 줄까? 영현이 너도 회사에서 대출 좀 알아보고."

"엄마, 제발... 우리 이제 사귄 지 두 달 됐다고요..." 나는 이마를 짚었지만, 강영현은 술기운에 헤벌쭉 웃으며 내 손을 식탁 아래서 꽉 잡았다.

"걱정 마, 자기야. 내가 다 할게. 결혼도, 대출도, 내조도."

그는 내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20년 지기에서 연인으로, 그리고 부모님들의 등쌀에 밀려 초고속으로 '예비부부' 타이틀까지 달게 된 우리.

비밀 연애의 스릴은 사라졌지만, 이제는 온 세상이(특히 광진구와 마포, 여의도 전체가) 우리 편이라는 든든함과 동시에, 조만간 드레스 투어를 가야 할 것 같은 묘한 압박감이 몰려오는 밤이었다. 강영현은 취기가 오른 눈으로 나를 보며 예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니, '강 서방'이라는 호칭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아주 조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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