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저녁 7시 30분. 마포역 인근 영현의 자취방 앞. 퇴근 후 여의도에서 버스를 타고 넘어온 나는 익숙하게 그의 집 비번을 눌렀다.
"자기야, 나 왔어."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마늘 향과 올리브유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주방에서는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앞치마를 두른 강영현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 김 대리 정시 퇴근했네? 얼른 가방 내려놔. 면 삶는 중이야."
회사에서의 날카로운 해외영업팀 대리는 어디 가고, 제법 능숙한 손놀림으로 팬을 흔드는 '요리사 영현'이 거기 있었다. 나는 뒤에서 그의 허리를 슬쩍 껴안으며 등을 기댔다.
"음, 냄새 좋다. 오늘 메뉴 뭐야?" "자기가 좋아하는 알리오 올리오. 대신 페페론치노는 딱 한 개만 넣었어. 나 딸꾹질하면 데이트 망치니까."
그가 뒤를 돌아 내 이마에 쪽, 하고 짧게 입을 맞췄다. 20년 동안 봐온 뒷모습인데, 왜 앞치마 하나 둘렀다고 이렇게 낯설고 설레는지 모를 일이었다.
잠시 후, 식탁 위에는 정갈하게 플레이팅된 알리오 올리오 두 접시가 놓였다. 강영현은 단것을 싫어하는 취향답게 피클 대신 짭짤한 올리브를 곁들였다.
"와, 진짜 맛있다. 너 요리 학원 다녀?" "아니, 그냥 너한테 맛있는 거 해주고 싶어서 유튜브 좀 봤지. 어때, 사 먹는 것보다 낫지?"
그는 내가 한 입 크게 먹는 걸 확인하고서야 안심한 듯 본인의 포크를 움직였다. 친구였을 땐 "야, 싱거워. 소금 더 쳐."라며 투덜댔을 텐데, 지금은 그가 나를 위해 마늘 하나하나를 편 썰었을 시간을 생각하니 모든 게 달콤하게만 느껴졌다.
"근데 영현아, 우리 저번 주 토요일에 성수동에서 엄마들이랑 마주친 거 있잖아." 내 말에 포크를 돌리던 강영현의 손이 멈칫했다.
"어, 그 얘기 하려고 했어. 진짜 소름 돋지 않냐? 우리가 손을 잡고 있었어도 아마 '어머, 영현이가 ㅇㅇ이가 넘어질까 봐 잡아주네'라고 하셨을걸." 강영현이 허탈한 듯 웃으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니까. 아줌마랑 우리 엄마랑 너무 친한 게 문제야. 우리를 그냥 한 세트로 보시잖아. 성별이 다른 두 남녀가 아니라, 그냥 같이 태어난 쌍둥이쯤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
우리는 잠시 침묵에 빠졌다. 20년의 우정은 우리에게 가장 단단한 신뢰를 주었지만, 부모님들에게는 '절대 연인이 될 리 없는 관계'라는 선입견을 심어주었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 결혼식 날에도 엄마들이 '영현아, 신부 입장할 때 ㅇㅇ이 손 잘 잡고 들어가라. 넘어지면 안 된다.'라고 하실 판이야." 내 농담에 강영현이 빵 터지며 식탁을 두드렸다.
"안 되겠어. 우리 정식으로 작전을 짜자.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순 없잖아." 강영현이 식탁 옆에 있던 메모장을 가져와 펜을 쥐었다.
"일단 초안 1번. 각자 부모님께 따로 말씀드린다." "안 돼. 그럼 엄마들끼리 그냥 헛소리 취급하고 싸우지 말고 잘 지내라 하고 마실게 분명해."
"그럼 초안 2번. 양가 부모님 다 모시고 식사 자리에서 폭탄선언." "그건 조금 무서워. 아빠들 뒷목 잡으시면 어떡해."
강영현은 진지하게 메모장에 '단계별 커밍아웃'이라고 적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일단 우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남녀'처럼 보이는 행동을 부모님 앞에서 흘리는 거야. 예를 들면, 내가 너네 집 갔을 때 네 방에 자연스럽게 들어간다거나, 네가 우리 엄마한테 '영현이가 남자로 보여요'라고 툭 던진다거나."
"야, 그건 너무 오글거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말도 안 되는 작전들을 짜며 낄낄거렸다. 비록 초안일 뿐이었지만,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작전 회의(?)를 빙자한 수다가 길어지고, 어느덧 밤이 깊었다. 빈 맥주 캔과 파스타 접시를 치우고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자기야, 작전 짜는 거 좀 스트레스 받지." 강영현이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응... 조금? 근데 너랑 같이 고민하니까 괜찮아."
"부모님들이 어떻게 생각하시든, 중요한 건 내가 널 진짜 많이 좋아한다는 거야.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변하고."
그의 낮은 목소리가 거실의 고요한 공기를 타고 내 가슴에 안착했다. 그는 내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입을 맞췄다. 아까의 마늘 향은 사라지고, 오직 그의 체온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작전은 천천히 수정하자. 일단은 오늘 우리 데이트, 아무한테도 방해 안 받고 마무리하는 게 우선이니까."
그가 나를 조금 더 꽉 껴안았다. 창밖으로는 마포의 야경이 반짝이고 있었고, 좁은 자취방 안에는 부모님도, 회사 동료도 없는 오직 우리 둘만이 함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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