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요즘 가장 핫하다는 성수동 연무장길. 평일의 수트를 벗어던진 강영현은 흰 티셔츠에 체크 셔츠를 걸치고 와이드 슬랙스를 매치한, 그야말로 '남친룩'의 정석으로 나타났다.
"자기야, 여기 진짜 사람 많다. 우리 오늘 점심 뭐 먹지?" 강영현이 내 손을 꼭 잡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섬세한 입맛의 소유자, 맵거나 달면 바로 반응이 오는 강영현을 위해 결국 우리는 담백한 뇨끼와 스테이크를 파는 조용한 레스토랑을 찾아 들어갔다.
"역시 우리 자기가 나를 제일 잘 알아. 맵지도 않고 딱 좋다." 그는 크림 소스를 듬뿍 찍은 뇨끼를 입에 넣으며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였을 땐 "주는 대로 처먹어!"라며 등짝을 때렸을 텐데, 이제는 그가 맛있게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른 걸 보니 나도 참 중증이다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우리는 성수동의 한적한 골목을 걸었다. 팝업 스토어 구경도 하고, 서로 사진도 찍어주며 평범한 주말 데이트를 즐겼다.
"야, 김ㅇㅇ. 여기 서봐. 배경 예쁘다." 강영현이 진지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었다. "예쁘게 찍어줘야 돼. 다리 길어 보이게!" "알았어, 알았어. 내 눈엔 이미 모델인데 뭘."
그가 윙크를 날리며 셔터를 눌렀다. 친구일 땐 사진 한 장 찍어달라고 하면 "너를 왜 찍어? 메모리 아깝게."라며 깐족대던 놈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찍은 사진들을 구경하며 낄낄거렸다. 너무나도 익숙하고 편안한 분위기. 그런데 이 익숙함이 나중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이때의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성수동에서 건대입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던 중이었다. 광진구에 사시는 부모님 댁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조심했어야 했는데, 주말의 들뜬 기분에 경계심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어머, 저기 쟤네 ㅇㅇ이랑 영현이 아니니?"
뒤에서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우리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세련되게 차려입으신 우리 엄마와 영현이 어머니가 팔짱을 끼고 우리를 바라보고 계셨다.
"엄마? 아줌마? 두 분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어머, 영현아! 너네 여기서 뭐 하니? 둘이 또 붙어 다니는 거야?"
영현이 어머니가 반갑게 웃으며 다가오셨다. 강영현은 나를 잡고 있던 손을 0.1초 만에 풀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어머니! 저희 오늘 뭐... 그냥 심심해서 밥이나 먹으러 나왔죠."
부모님들은 우리가 손을 잡고 있었는지, 서로를 바라보던 눈빛이 어땠는지 전혀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들에겐 '김ㅇㅇ과 강영현'은 사귀는 사이보다는 '서로 안 보이면 궁금해서 못 참는 톰과 제리'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래, 너네도 참 지독하다. 서른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주말에 둘이 노니? 영현아, 너는 예쁜 여자애들 소개도 좀 받고 그래야지. 맨날 우리 ㅇㅇ이랑만 놀면 장가는 언제 가려고." 우리 엄마의 농담 섞인 핀잔에 강영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그러게요. 저도 장가 가야 하는데..." 강영현이 나를 힐끔 쳐다봤다. 나는 속으로 '지금 말할까? 지금이 기회인가?' 싶어 입을 뗐다. "엄마, 사실은..."
"어머, 저기 봐! 저 카페 예쁘다. 우리 저기 가서 커피나 한잔하자. 얘들아, 너네도 올래? 영현이가 한턱 쏘는 걸로 하고!" 말할 틈도 없이 두 분은 자기들끼리 신이 나서 앞서 걸어가셨다. 우리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두 분을 보내드리고 다시 우리 둘만 남았을 때, 성수동의 공기는 아까와는 다르게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기야... 봤지? 우리 엄마랑 아줌마 반응." 강영현이 한숨을 푹 쉬며 내 어깨에 팔을 턱 걸쳤다. "어. 진짜 1도 의심 안 하시네. 오히려 내가 너 앞길 막는 것 같아서 미안해하시잖아."
우리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20년 동안 쌓아온 '불알친구'라는 서사가 이렇게나 강력한 방패이자 벽이 될 줄이야. 부모님들께 "저희 사실 진지하게 만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게, 낯선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보다 수백 배는 더 어렵게 느껴졌다.
"오늘 말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영 아니었네." "그러게. 근데 영현아, 우리 부모님들이 너무 우리를 편하게 생각하시니까... 나중에 말씀드리면 충격이 더 크실 것 같아."
강영현은 내 손을 다시 꽉 쥐었다. 아까 부모님 앞에서는 놓아야 했던 그 손을 더 단단하게. "괜찮아. 우리가 더 당당해지면 돼. 다음엔 아예 정식으로 자리를 만들어서 말씀드리자. 오늘은 그냥... 우리끼리 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매운 거 말고!"
그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코를 톡 건드렸다. 20년의 우정을 뚫고 연인이 된 우리에게, '부모님'이라는 마지막 보스가 남겨준 과제는 꽤나 묵직했지만, 맞잡은 손의 온기는 그 두려움을 잠시 잊게 할 만큼 충분히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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