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침대 머리맡에 둔 핸드폰은 불이 날 것처럼 번쩍거리고 있었다.
[8인의 바바리안 (8)] 단톡방은 무려 카톡이 500개나 쌓여 있었다. '미친놈들, 진짜 사귀냐?', '어제 강영현 눈빛 살인마인 줄', '윤민우 오늘 연락 두절됨' 등등. 어젯밤 이자카야를 초토화시켰던 강영현의 폭탄선언이 꿈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는 생생한 텍스트들이었다.
나는 이불을 푹 뒤집어쓰며 발차기를 했다. 속이 시원하긴 했는데, 술이 깨고 나니 어제 내 입으로 뱉었던 찌질한 질투가 떠올라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아씨… 전여친한테 아련하게 쳐다봐주니까 심장이 뛰디…? 미쳤어 김ㅇㅇ, 대사 수준 진짜."
이불속에서 자책하고 있는데,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강영현이 해장국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불쑥 들어왔다.
"자기야, 일어났냐." "아, 오지 마! 나 씻지도 않았어!" "20년 동안 네 눈곱 낀 얼굴 본 게 트럭으로 두 대는 되는데 새삼스럽게."
그는 능청스럽게 내 이불을 걷어내고는 내 볼에 쪽 소리 나게 뽀뽀를 했다. 다정함이 한도 초과였다. 식탁에 마주 앉아 뼈해장국을 먹는데, 자꾸만 어젯밤 유라와 함께 있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숟가락으로 깍두기만 푹푹 찔러댔다.
강영현이 그런 나를 가만히 보더니 피식 웃었다. "왜. 또 서유라 생각하냐?"
정곡을 찔린 나는 흠칫 놀라며 애써 목소리를 높였다. "누, 누가 생각했대? 그냥… 걔가 아련하게 쳐다보니까 어제 좀 기분이 그랬다는 거지. 너네, 대학교 3학년 때 엄청 요란하게 사귀었잖아. 캠퍼스 커플로."
내 입에서 나온 '요란하게 사귀었다'는 말에, 강영현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그는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 아주 해맑게 웃었다.
"김ㅇㅇ. 너 진짜 바보냐?" "뭐?" "나 서유라랑 사귄 적 없어. 손도 한 번 안 잡아봤다."
"……뭐? 뻥치지 마! 과에 소문이 쫙 다 났었는데! 너네 100일도 못 가고 헤어졌다고…"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자, 강영현이 쯧쯧 혀를 차며 내 이마에 가볍게 딱밤을 먹였다.
"그거 다 가짜 소문이야. 걔가 나한테 고백했다가 시원하게 까였거든. 근데 무용과 여신이 차였다고 소문나면 너무 창피하니까, 자기가 알아서 소문낼 테니 그냥 며칠 만나다 성격 차이로 헤어진 걸로 해달라고 싹싹 빌더라고." "헐… 진짜? 근데 넌 그걸 왜 허락해 줘? 너 그런 거 딱 질색하잖아!"
강영현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조금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왜 허락했겠냐? 그때 내 멘탈이 정상이었을 것 같아?" "네 멘탈이 왜?" "너 그 당시에 복학생 선배 그 새끼랑 사귀었잖아."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맞다. 대학교 3학년 봄, 나는 기타 동아리 복학생 선배의 다정한(지금 생각하면 가식적인) 플러팅에 넘어가 한 달 정도 짧게 연애를 했었다.
"내가 서유라 고백 거절하면서 그랬어. 나 10년 넘게 미치게 좋아하는 여자애 따로 있다고. 근데 하필 그날 밤에, 네가 나한테 전화해서 그 쓰레기 같은 선배랑 사귀기로 했다고 자랑을 하더라?" "아……." "그때 내가 얼마나 돌았었는지 알아? 내 소문이 와전되든 말든 신경 쓸 겨를도 없었어.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가서, 그냥 다 귀찮아서 서유라가 하자는 대로 내버려 둔 거야."
원망이 듬뿍 담긴 그의 눈빛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20년 동안 쫓아다녔다는 그의 말이 그저 막연하게만 느껴졌는데, 스물두 살의 강영현은 내가 다른 남자와 웃고 있을 때 혼자서 그런 찌질하고 짠한 시간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해… 난 네가 유라랑 사귀는 줄 알고 나도 연애나 해야겠다 싶어서 만난 거란 말이야." 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변명하자, 강영현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뭐, 상관없어. 어차피 그 새끼랑 한 달 만에 깨질 줄 알았으니까." "그래. 걔 완전 최악이었지! 신촌 카페에서 다른 여자랑 있는 거 내가 우연히 딱 목격했잖아! 안 그랬으면 나 계속 속을 뻔…"
흥분해서 옛날이야기를 하던 나는, 맞은편에서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강영현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잠깐만. 근데 너 그때, 굳이 과제 하러 신촌까지 가자고 나 엄청 졸랐잖아. 우리 학교에서 신촌까지 한 시간도 넘게 걸리는데." "어. 그랬지." "그리고 하필 그 수많은 카페 중에, 꼭 그 골목 구석에 있는 카페 파르페가 먹고 싶다고 나를 질질 끌고 갔었고." "딸기 파르페가 먹고 싶었어."
매운 것 보다 단 걸 더 싫어하는 놈이…?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미친… 야, 강영현! 너 알고 있었어?!" "어. 전날 그 새끼가 동아리 후배한테 양다리 걸치는 거 우연히 봤거든. 다음 날 신촌에서 데이트하는 것도 엿들었고."
강영현은 턱을 괸 채 아주 여유롭게,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빙긋 웃었다.
"내가 그 새끼 패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러면 네가 나 원망할까 봐.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정떨어지게 만드는 게 제일 깔끔하잖아. 그래서 친히 그 카페 창가 자리로 널 모시고 간 거지." "와… 강영현. 너 진짜 계략남이었네. 나 소름 돋았어." "소름은 무슨. 그 쓰레기 구렁텅이에서 널 건져낸 생명의 은인이지."
그는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다가왔다. 어릴 땐 그저 장난치기 좋아하는 불알친구인 줄만 알았는데, 강영현은 내가 모르는 시간 속에서도 늘 나를 지켜보고, 보호하고,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전여친의 존재도 사실은 나를 향한 지독한 짝사랑 때문에 생긴 해프닝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서유라가 어쩌니 하면서 두 번 다시 질투하지 마."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은 강영현이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내 20대는 온통 김ㅇㅇ 하나 때문에 질투하고 찌질하게 앓았던 기억밖에 없으니까. 억울해서라도 나한테 진짜 잘해야 돼, 자기야."
나를 옭아매는 그의 단단한 팔과 다정한 목소리에, 어젯밤의 알량한 오해는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20년 치 짝사랑을 완벽한 승리로 이끌어낸 이 여우 같은 계략남을, 내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두 손을 들어 그의 넓은 등을 마주 꽉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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