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연애의 스릴도 잠시, 며칠 뒤 내 핸드폰과 강영현의 핸드폰이 동시에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지는 [8인의 바바리안 (8)]. 초중고를 내리 같이 다녔던 동네 불알친구들과 대학 동기들이 섞인 시끄러운 단톡방이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개인 톡으로 강영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내 호언장담과 다르게, 나는 금요일이 다가올수록 묘하게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 단톡방 멤버 중에는 이번 모임에 꼭 참석한다고 선언한 두 명의 요주의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주의 인물 첫 번째, 윤민우. 대학 시절 내내 나를 쫓아다니며 공개적으로 짝사랑을 티 냈던 직진남. 심지어 아직도 가끔 나에게 'ㅇㅇ아 밥 먹자'며 연락을 해오는 인간이었다.
요주의 인물 두 번째, 서유라. 강영현이 대학교 3학년 때 캠퍼스를 떠들썩하게 만들며 사귀었던, 얼굴 하얗고 청순한 무용과 출신 '전여친'. 헤어진 지 오래라 지금은 친구 그룹에 섞여 이따금 얼굴을 보긴 하지만, 내게 유라는 언제나 껄끄러운 존재였다. 강영현의 가장 뜨거웠던 20대 초반을 가졌던 여자니까.
우리는 서로 으름장을 놓으며 금요일 저녁 결전의 장소인 강남의 한 이자카야로 향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갈 즈음, 민우가 슬쩍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ㅇㅇ아, 너 얼굴 좀 빨개졌다. 이거 마셔."
민우가 내민 건 초코에몽이었다. 대학교 때 내가 술에 취하면 꼭 초코 우유를 찾는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변 친구들이 "오~ 윤민우 아직도 김ㅇㅇ 챙기냐~" 하며 짓궂게 놀려댔다.
"아, 고, 고마워…" 내가 초코에몽을 받아 들자, 맞은편에서 '탁!' 하고 소주잔을 거칠게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강영현이었다.
"김ㅇㅇ 요새 단 거 안 먹어. 그리고 걔 주량 아직 멀었어. 야, 윤민우. 너 나랑 한잔하자." 강영현은 서늘하게 웃으며 민우에게 소주병을 들이밀었다. 질투에 눈이 먼 수컷의 기싸움이었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제발 강영현이 참아주길 바랐다. 들키는 것도 문제지만, 여기서 멱살잡이라도 나면 끝장이니까.
그때, 미닫이문이 열리며 늦참을 선언했던 서유라가 들어왔다. "얘들아 미안! 차가 막혀서."
여전히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에 청순한 분위기. 유라가 들어오자 남자애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유라는 빙긋 웃더니, 하필이면 강영현의 바로 옆 빈자리에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영현아,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어, 뭐. 그냥저냥." 강영현은 덤덤하게 대꾸하며 살짝 거리를 두었지만, 유라는 개의치 않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너 요새 향수 바꿨네? 예전엔 시트러스 향만 쓰더니, 비누향으로 바꿨네. 잘 어울린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내 가슴에 쿵, 하고 무거운 돌덩이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알지도 못했던 강영현의 과거 향수 취향. 전여친만이 알 수 있는 그 디테일한 친밀감이 미치도록 거슬렸다.
나는 애써 시선을 피하고 눈앞에 놓인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술기운이 확 올라와 화장실로 향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김ㅇㅇ, 찌질하게 굴지 마. 지금 강영현 여자친구는 너야.'
심호흡을 하고 화장실을 나서 코너를 도는데, 복도 끝 흡연 구역 쪽에 익숙한 두 실루엣이 보였다. 강영현과 서유라였다. 강영현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고, 유라는 그의 팔을 살짝 잡으며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 대화는 들리지 않았지만, 유라의 표정은 꽤나 애절해 보였다.
"…영현아, 나 사실 너한테…" 희미하게 들려온 유라의 목소리. 그리고 그 말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듣고 있는 강영현의 넓은 등.
순간, 알 수 없는 비참함이 몰려왔다. 친구로 지내온 20년보다, 남녀로 뜨거웠던 그들의 과거가 훨씬 더 무겁고 짙게 느껴졌다. 나는 그들이 나를 발견하기 전에 도망치듯 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미친 사람처럼 소주를 연거푸 마셔댔다.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10분쯤 뒤 강영현이 자리로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반쯤 취해 눈이 풀려 있었다.
강영현이 내 상태를 보고 미간을 팍 구기며 입모양으로 '너 미쳤어?'라고 물었지만, 나는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ㅇㅇ아, 너 많이 취했다.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 옆에 있던 윤민우가 내 가방을 챙기며 일어섰다.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그래, 가자. 나 갈게 얘들아."
내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순간. "앉아."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테이블을 갈랐다. 강영현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내 쪽으로 걸어오더니, 윤민우가 들고 있던 내 가방을 거칠게 낚아챘다.
"어딜 데려가. 내가 데려가." "강영현. 너 쟤네 집이랑 방향 반대잖아. 내가 데려간다니까?" 민우도 지지 않고 맞섰다. 테이블에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방향이 반대든 말든, 얜 내가 챙겨." 강영현은 민우를 싸늘하게 노려보더니, 내 손목을 꽉 쥐고 술집 밖으로 성큼성큼 끌고 나갔다.
밤공기가 확 끼쳐오는 골목길로 빠져나오자마자, 나는 그의 손을 팍 뿌리쳤다. "이거 놔! 네가 왜 데려다줘? 유라한테나 가지?!" "뭐? 서유라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아까 복도에서 유라가 너 잡고 있는 거 다 봤거든! 옛날 생각나서 좋디? 전여친이 아련하게 쳐다봐주니까 심장이 막 뛰디?!"
비참함과 알코올이 섞여 내 입에선 필터링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말을 듣던 강영현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하-' 하고 어이없다는 듯 크게 실소를 터뜨렸다.
"야. 너 지금 질투하냐?" "질투는 무슨! 네가 내 손목 잡을 자격이나…" "서유라가 만나보자고 찔러보길래, 내가 그랬어."
그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에 내 입이 떡 벌어졌다.
"나 지금 미치게 좋아하는 여자친구 있다고. 그딴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친구 무리에서도 안 볼 거라고 쳐냈어. 그게 끝이야."
"어…?" 예상치 못한 사이다 전개에 나는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강영현이 한숨을 푹 쉬며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는 양손으로 내 붉어진 뺨을 감싸 쥐었다. "내가 미쳤다고 널 두고 다른 데 눈을 돌려? 아까 윤민우가 너한테 초코 우유 줄 때, 나는 그 새끼 손목을 부러뜨리고 싶은 거 간신히 참았는데." "영현아…" "20년 돌고 돌아서 겨우 내 여자로 만들었는데. 내 눈엔 20년 전 콧물 흘리던 김ㅇㅇ부터 지금 내 앞에서 질투하는 김ㅇㅇ까지, 전부 다 미치게 예뻐 죽겠다고."
그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콩 맞대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그런 쓰레기 같은 오해는 1초도 하지 마."
불안함으로 가득 차 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렸다. 찌질하게 굴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 그의 품에 고개를 푹 숙이자, 그가 나를 꽉 안아주며 내 정수리에 쪽 입을 맞췄다.
"들어가자. 가서 윤민우 싹 다 정리해."
다시 술자리로 돌아왔을 때, 분위기는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민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ㅇㅇ아, 괜찮아? 강영현, 너 애를 왜 그렇게 거칠게 끌고 가."
"내가 내 거 거칠게 끌고 가든 부드럽게 끌고 가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강영현이 무심하게 툭 내뱉으며, 이번에는 내 대각선 맞은편이 아닌 내 '바로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것도 유라가 아닌 내 옆에.
그의 넓은 허벅지가 내 다리에 착 밀착됐다. 테이블 아래로,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덥석 잡아 깍지를 꼈다. 더 이상 거리를 두거나 불알친구인 척 연기할 생각 따윈 없다는, 무언의 선전포고였다.
술자리가 파할 때쯤, 윤민우가 술기운을 빌려 결심한 듯 나를 불렀다. "ㅇㅇ아. 나 취중진담 하나만 하자." 시끄럽던 테이블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쏠렸다.
"나 너 대학교 때부터 진짜 좋아했어. 타이밍 맨날 놓쳐서 여태 친구로 남았는데… 나 더 이상 너랑 친구 하기 싫다. 나랑 만나자, 김ㅇㅇ."
공개 고백이었다. 테이블 여기저기서 "오오~ 윤민우 직진~" 하는 호들갑 섞인 환호가 터져 나왔다. 유라도 흥미롭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입만 뻐끔거렸다. "미, 민우야. 그게 아니라…"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내 옆에서 나른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하아… 진짜 짜증 나게 하네."
강영현이었다. 그가 테이블 아래로 잡고 있던 내 손을 풀더니, 아주 보란 듯이 내 어깨 위로 자신의 긴 팔을 턱 두르며 나를 자기 품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야, 강영현! 분위기 파악 안 하냐? 넌 좀 빠져!" 친구 중 하나가 핀잔을 주었지만, 강영현은 픽 웃으며 민우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어떡하냐, 윤민우. 네 타이밍은 대학 때도 틀렸고, 지금도 완전히 틀렸는데." "뭐?" "미안해서 어쩌지. 얘 내 여자친구거든."
"……" 순간, 이자카야 전체에 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친구들의 눈이 탁구공만 하게 커졌다. 유라의 표정도 굳어버렸다.
"뭐… 여자친구? 풉, 야 장난치지 마. 니네가 무슨 남녀야!" 재호가 어색하게 분위기를 풀어보려 웃음을 터뜨렸지만, 강영현은 내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며 아주 여유롭고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장난 아닌데. 우리 사귄 지 한 달 다 돼 가. 나 얘 미치게 쫓아다녀서 간신히 만나는 거니까, 앞으로 김ㅇㅇ한테 허튼수작 부리는 새끼들은 내가 다 밟아버린다."
"미친… 진짜라고?!!!" "강영현이랑 김ㅇㅇ가 사귄다고?!!! 으아아악! 내 눈!!!" 테이블은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었다. 소주잔이 엎어지고,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고, 민우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었지만, 어깨를 감싼 손은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아, 진짜 귀 떨어지는 줄 알았네." 이자카야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도망치듯 빠져나온 밤거리. 강영현은 시원하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웃었다.
"야… 애들 내일 우리 엄청 갈굴 텐데 어떡해. 민우는 어떡하고, 유라는 또…" "신경 꺼. 어차피 다 알게 될 거, 속 시원하게 폭탄 터뜨리고 털어버리는 게 낫지. 난 사실 연애 첫날부터 동네방네 플래카드 걸고 싶었다니까?"
그가 뻔뻔하게 말하며 내 손을 잡아 본인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맞잡은 손이 뜨끈했다. 전여친의 등장도, 짝사랑남의 고백도, 20년 지기 친구들의 경악도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그래도… 나 혼자 질투하고 오해해서 미안해." 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하자, 강영현이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의 눈동자가 다정하게 휘어졌다.
"오해한 건 꿀밤 한 대 감인데, 질투해 준 건 칭찬해 줄게. 우리 자기가 날 그만큼 좋아한다는 거니까." "누, 누가 좋아한대…!"
내가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려 하자, 그가 다른 한 손으로 내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시선을 고정시켰다.
"도망가지 마. 이제 아무한테도 안 숨기기로 했잖아."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망설임 없이 포개어졌다. 길었던 20년의 우정이 완벽하게 막을 내리고, 우리의 진짜 사랑이 세상을 간지럽히는 금요일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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