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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2

판도라의 상자, 단톡방이 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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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연애의 스릴도 잠시, 며칠 뒤 내 핸드폰과 강영현의 핸드폰이 동시에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지는 [8인의 바바리안 (8)]. 초중고를 내리 같이 다녔던 동네 불알친구들과 대학 동기들이 섞인 시끄러운 단톡방이었다.

이재호
야, 이번 주 금요일 강남. 다 모여.
박수진
오, 콜! 나 금요일 칼퇴임.
이재호
김ㅇㅇ, 강영현 너네도 오지?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개인 톡으로 강영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야. 우리 어떡해?
강영현(내남친)
어떡하긴. 가서 평소처럼 불알친구 연기해야지. 너 자신 있지?
당연하지. 내가 명색이 마케팅팀 연기파 김 대리다.

하지만 내 호언장담과 다르게, 나는 금요일이 다가올수록 묘하게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 단톡방 멤버 중에는 이번 모임에 꼭 참석한다고 선언한 두 명의 요주의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주의 인물 첫 번째, 윤민우. 대학 시절 내내 나를 쫓아다니며 공개적으로 짝사랑을 티 냈던 직진남. 심지어 아직도 가끔 나에게 'ㅇㅇ아 밥 먹자'며 연락을 해오는 인간이었다.

요주의 인물 두 번째, 서유라. 강영현이 대학교 3학년 때 캠퍼스를 떠들썩하게 만들며 사귀었던, 얼굴 하얗고 청순한 무용과 출신 '전여친'. 헤어진 지 오래라 지금은 친구 그룹에 섞여 이따금 얼굴을 보긴 하지만, 내게 유라는 언제나 껄끄러운 존재였다. 강영현의 가장 뜨거웠던 20대 초반을 가졌던 여자니까.

강영현(내남친)
윤민우 온대? 하, 진짜 밥맛 떨어지네.
서유라도 온대. 너야말로 눈 조심해라.
강영현(내남친)
내 눈엔 너밖에 안 보여 자기야. 윤민우가 너한테 플러팅하면 젓가락으로 찌를 거임.

우리는 서로 으름장을 놓으며 금요일 저녁 결전의 장소인 강남의 한 이자카야로 향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갈 즈음, 민우가 슬쩍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ㅇㅇ아, 너 얼굴 좀 빨개졌다. 이거 마셔."

민우가 내민 건 초코에몽이었다. 대학교 때 내가 술에 취하면 꼭 초코 우유를 찾는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변 친구들이 "오~ 윤민우 아직도 김ㅇㅇ 챙기냐~" 하며 짓궂게 놀려댔다.

"아, 고, 고마워…" 내가 초코에몽을 받아 들자, 맞은편에서 '탁!' 하고 소주잔을 거칠게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강영현이었다.

"김ㅇㅇ 요새 단 거 안 먹어. 그리고 걔 주량 아직 멀었어. 야, 윤민우. 너 나랑 한잔하자." 강영현은 서늘하게 웃으며 민우에게 소주병을 들이밀었다. 질투에 눈이 먼 수컷의 기싸움이었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제발 강영현이 참아주길 바랐다. 들키는 것도 문제지만, 여기서 멱살잡이라도 나면 끝장이니까.

그때, 미닫이문이 열리며 늦참을 선언했던 서유라가 들어왔다. "얘들아 미안! 차가 막혀서."

여전히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에 청순한 분위기. 유라가 들어오자 남자애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유라는 빙긋 웃더니, 하필이면 강영현의 바로 옆 빈자리에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영현아,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어, 뭐. 그냥저냥." 강영현은 덤덤하게 대꾸하며 살짝 거리를 두었지만, 유라는 개의치 않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너 요새 향수 바꿨네? 예전엔 시트러스 향만 쓰더니, 비누향으로 바꿨네. 잘 어울린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내 가슴에 쿵, 하고 무거운 돌덩이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알지도 못했던 강영현의 과거 향수 취향. 전여친만이 알 수 있는 그 디테일한 친밀감이 미치도록 거슬렸다.

나는 애써 시선을 피하고 눈앞에 놓인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술기운이 확 올라와 화장실로 향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김ㅇㅇ, 찌질하게 굴지 마. 지금 강영현 여자친구는 너야.'

심호흡을 하고 화장실을 나서 코너를 도는데, 복도 끝 흡연 구역 쪽에 익숙한 두 실루엣이 보였다. 강영현과 서유라였다. 강영현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고, 유라는 그의 팔을 살짝 잡으며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 대화는 들리지 않았지만, 유라의 표정은 꽤나 애절해 보였다.

"…영현아, 나 사실 너한테…" 희미하게 들려온 유라의 목소리. 그리고 그 말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듣고 있는 강영현의 넓은 등.

순간, 알 수 없는 비참함이 몰려왔다. 친구로 지내온 20년보다, 남녀로 뜨거웠던 그들의 과거가 훨씬 더 무겁고 짙게 느껴졌다. 나는 그들이 나를 발견하기 전에 도망치듯 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미친 사람처럼 소주를 연거푸 마셔댔다.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10분쯤 뒤 강영현이 자리로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반쯤 취해 눈이 풀려 있었다.

강영현이 내 상태를 보고 미간을 팍 구기며 입모양으로 '너 미쳤어?'라고 물었지만, 나는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ㅇㅇ아, 너 많이 취했다.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 옆에 있던 윤민우가 내 가방을 챙기며 일어섰다.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그래, 가자. 나 갈게 얘들아."

내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순간. "앉아."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테이블을 갈랐다. 강영현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내 쪽으로 걸어오더니, 윤민우가 들고 있던 내 가방을 거칠게 낚아챘다.

"어딜 데려가. 내가 데려가." "강영현. 너 쟤네 집이랑 방향 반대잖아. 내가 데려간다니까?" 민우도 지지 않고 맞섰다. 테이블에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방향이 반대든 말든, 얜 내가 챙겨." 강영현은 민우를 싸늘하게 노려보더니, 내 손목을 꽉 쥐고 술집 밖으로 성큼성큼 끌고 나갔다.

밤공기가 확 끼쳐오는 골목길로 빠져나오자마자, 나는 그의 손을 팍 뿌리쳤다. "이거 놔! 네가 왜 데려다줘? 유라한테나 가지?!" "뭐? 서유라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아까 복도에서 유라가 너 잡고 있는 거 다 봤거든! 옛날 생각나서 좋디? 전여친이 아련하게 쳐다봐주니까 심장이 막 뛰디?!"

비참함과 알코올이 섞여 내 입에선 필터링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말을 듣던 강영현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하-' 하고 어이없다는 듯 크게 실소를 터뜨렸다.

"야. 너 지금 질투하냐?" "질투는 무슨! 네가 내 손목 잡을 자격이나…" "서유라가 만나보자고 찔러보길래, 내가 그랬어."

그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에 내 입이 떡 벌어졌다.

"나 지금 미치게 좋아하는 여자친구 있다고. 그딴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친구 무리에서도 안 볼 거라고 쳐냈어. 그게 끝이야."

"어…?" 예상치 못한 사이다 전개에 나는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강영현이 한숨을 푹 쉬며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는 양손으로 내 붉어진 뺨을 감싸 쥐었다. "내가 미쳤다고 널 두고 다른 데 눈을 돌려? 아까 윤민우가 너한테 초코 우유 줄 때, 나는 그 새끼 손목을 부러뜨리고 싶은 거 간신히 참았는데." "영현아…" "20년 돌고 돌아서 겨우 내 여자로 만들었는데. 내 눈엔 20년 전 콧물 흘리던 김ㅇㅇ부터 지금 내 앞에서 질투하는 김ㅇㅇ까지, 전부 다 미치게 예뻐 죽겠다고."

그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콩 맞대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그런 쓰레기 같은 오해는 1초도 하지 마."

불안함으로 가득 차 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렸다. 찌질하게 굴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 그의 품에 고개를 푹 숙이자, 그가 나를 꽉 안아주며 내 정수리에 쪽 입을 맞췄다.

"들어가자. 가서 윤민우 싹 다 정리해."

다시 술자리로 돌아왔을 때, 분위기는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민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ㅇㅇ아, 괜찮아? 강영현, 너 애를 왜 그렇게 거칠게 끌고 가."

"내가 내 거 거칠게 끌고 가든 부드럽게 끌고 가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강영현이 무심하게 툭 내뱉으며, 이번에는 내 대각선 맞은편이 아닌 내 '바로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것도 유라가 아닌 내 옆에.

그의 넓은 허벅지가 내 다리에 착 밀착됐다. 테이블 아래로,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덥석 잡아 깍지를 꼈다. 더 이상 거리를 두거나 불알친구인 척 연기할 생각 따윈 없다는, 무언의 선전포고였다.

술자리가 파할 때쯤, 윤민우가 술기운을 빌려 결심한 듯 나를 불렀다. "ㅇㅇ아. 나 취중진담 하나만 하자." 시끄럽던 테이블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쏠렸다.

"나 너 대학교 때부터 진짜 좋아했어. 타이밍 맨날 놓쳐서 여태 친구로 남았는데… 나 더 이상 너랑 친구 하기 싫다. 나랑 만나자, 김ㅇㅇ."

공개 고백이었다. 테이블 여기저기서 "오오~ 윤민우 직진~" 하는 호들갑 섞인 환호가 터져 나왔다. 유라도 흥미롭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입만 뻐끔거렸다. "미, 민우야. 그게 아니라…"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내 옆에서 나른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하아… 진짜 짜증 나게 하네."

강영현이었다. 그가 테이블 아래로 잡고 있던 내 손을 풀더니, 아주 보란 듯이 내 어깨 위로 자신의 긴 팔을 턱 두르며 나를 자기 품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야, 강영현! 분위기 파악 안 하냐? 넌 좀 빠져!" 친구 중 하나가 핀잔을 주었지만, 강영현은 픽 웃으며 민우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어떡하냐, 윤민우. 네 타이밍은 대학 때도 틀렸고, 지금도 완전히 틀렸는데." "뭐?" "미안해서 어쩌지. 얘 내 여자친구거든."

"……" 순간, 이자카야 전체에 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친구들의 눈이 탁구공만 하게 커졌다. 유라의 표정도 굳어버렸다.

"뭐… 여자친구? 풉, 야 장난치지 마. 니네가 무슨 남녀야!" 재호가 어색하게 분위기를 풀어보려 웃음을 터뜨렸지만, 강영현은 내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며 아주 여유롭고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장난 아닌데. 우리 사귄 지 한 달 다 돼 가. 나 얘 미치게 쫓아다녀서 간신히 만나는 거니까, 앞으로 김ㅇㅇ한테 허튼수작 부리는 새끼들은 내가 다 밟아버린다."

"미친… 진짜라고?!!!" "강영현이랑 김ㅇㅇ가 사귄다고?!!! 으아아악! 내 눈!!!" 테이블은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었다. 소주잔이 엎어지고,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고, 민우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였었지만, 어깨를 감싼 손은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아, 진짜 귀 떨어지는 줄 알았네." 이자카야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도망치듯 빠져나온 밤거리. 강영현은 시원하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웃었다.

"야… 애들 내일 우리 엄청 갈굴 텐데 어떡해. 민우는 어떡하고, 유라는 또…" "신경 꺼. 어차피 다 알게 될 거, 속 시원하게 폭탄 터뜨리고 털어버리는 게 낫지. 난 사실 연애 첫날부터 동네방네 플래카드 걸고 싶었다니까?"

그가 뻔뻔하게 말하며 내 손을 잡아 본인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맞잡은 손이 뜨끈했다. 전여친의 등장도, 짝사랑남의 고백도, 20년 지기 친구들의 경악도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그래도… 나 혼자 질투하고 오해해서 미안해." 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하자, 강영현이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그의 눈동자가 다정하게 휘어졌다.

"오해한 건 꿀밤 한 대 감인데, 질투해 준 건 칭찬해 줄게. 우리 자기가 날 그만큼 좋아한다는 거니까." "누, 누가 좋아한대…!"

내가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려 하자, 그가 다른 한 손으로 내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시선을 고정시켰다.

"도망가지 마. 이제 아무한테도 안 숨기기로 했잖아."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망설임 없이 포개어졌다. 길었던 20년의 우정이 완벽하게 막을 내리고, 우리의 진짜 사랑이 세상을 간지럽히는 금요일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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