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더현대 서울.
오랜만에 쇼핑이나 하자며 만난 주말 데이트였다. 주말의 백화점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붐볐다. 먼저 도착한 나는 1층 에스컬레이터 옆에 서서 인파를 헤치며 강영현을 찾고 있었다.
'강영현 이 자식은 키도 크면서 왜 안 보…'
"자기야!"
그 순간, 시끄러운 백화점의 소음을 뚫고 내 고막에 정확히 꽂히는 선명한 목소리가 있었다.
평소였다면 "야! 김ㅇㅇ! 돼지야 여기!" 하고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쳤을 강영현이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는 아주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볼륨으로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저만치서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강영현이 보였다. 깔끔한 블랙 셔츠에 슬랙스 차림, 살짝 넘긴 머리. 누가 봐도 시선을 잡아끄는 훤칠한 남자가 인파를 뚫고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가, 이내 그가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나'에게로 옮겨왔다.
"자기야, 오래 기다렸어?"
내 앞에 멈춰 선 강영현이 아주 자연스럽게 내 손을 덥석 잡아 깍지를 꼈다.
"어… 어? 아니, 방금 왔어. 근데 너 방금 밖에서…" "응? 아, 자기라고 부른 거?"
그가 깍지 낀 손을 가볍게 흔들며 특유의 장난기 넘치는 눈웃음을 지었다.
"왜, 부끄러워? 나는 동네방네 다 자랑하고 싶은데. 저기 서 있는 예쁜 애가 내 여자친구라고." "미, 미쳤나 봐, 진짜.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들으라고 한 건데? 다 들으라 그래. 아, 맞다. 너 오늘 왜 이렇게 예쁘게 입고 왔어. 불안하게."
내 원피스 자락을 살짝 당기며 투덜거리는 강영현의 귀끝도 사실 살짝 붉어져 있었다. 밖에서 처음으로 '자기야'라고 부른 본인도 내심 쑥스러웠던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어색함을 뚫고 내 손을 꽉 쥐어오는 그의 체온이, 시끄러운 인파 속에서도 오직 우리 둘만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증명해 주고 있었다. 나는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인 채, 그의 커다란 손을 마주 꽉 쥐었다.
“자기야”의 장점은 설렘이었지만, 단점은 강영현이 이 호칭을 아주 교묘한 '무기'로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쇼핑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고깃집. 메뉴를 고르던 중 우리는 사소한 의견 충돌이 생겼다.
"아, 오늘은 목살 먹자니까! 나 다이어트 중이라고." "고기 먹으러 와서 무슨 다이어트야. 당연히 삼겹살이지! 기름기 좔좔 흐르는 거!"
우리는 고깃집 한가운데서 메뉴판을 쥐고 20년 지기답게 초딩처럼 투닥거리고 있었다. 내가 절대 안 진다는 표정으로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강영현이 갑자기 작게 한숨을 쉬더니 메뉴판을 탁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로 상체를 훅 기울이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김ㅇㅇ." "왜. 목살 시킬 때까지 나 안 봐줄 거니까 노려보지 마라." "자기야."
"……!"
갑작스러운 훅 펀치에 방어막이 산산조각 났다. 그가 고개를 살짝 비틀며, 나지막하고 나른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자기야. 삼겹살 먹자. 응? 오빠가 맛있게 구워줄게."
방금 전까지 핏대를 세우며 싸우던 초딩 강영현은 온데간데없고, 내 눈앞에는 다정함으로 무장한 여우 한 마리가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눈을 다정하게 접어 웃으며 '자기야'라고 부르는데, 어느 누가 거기다 대고 화를 낼 수 있단 말인가.
얼굴에 확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나는 메뉴판을 집어던지듯 내려놓았다.
"아, 씨… 진짜 반칙 쓰지 마." "반칙은 무슨. 남자친구가 삼겹살 먹고 싶다는데, 그치?"
그는 얄밉게 웃으며 직원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 삼겹살 3인분이요!"
승리를 쟁취한 강영현이 보란 듯이 윙크를 날렸다. 억울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야'라고 부르며 싸울 때는 머리채라도 잡고 싶었지만, '자기야'라는 무기를 장착한 강영현은 도저히 이길 재간이 없다는 것을.
고기가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동안, 강영현은 턱을 괸 채로 시종일관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왜 그렇게 봐. 고기나 뒤집어." "예뻐서. 우리 자기, 얼굴 빨개진 거 진짜 귀엽다."
그 능글맞은 대사에 나는 결국 항복을 선언하듯 테이블에 이마를 박고 말았다. 20년 동안 꽁꽁 숨겨져 있던 강영현의 다정함 폭격에, 내 심장이 남아날 날이 없을 것 같은 불안하고도 달콤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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