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시작한 후 우리의 평일은 완전히 달라졌다. 퇴근 후 자유를 고대하던 일상은 강영현의 '내 방식대로'의 다정함이 배어 있는 짧은 만남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집과 회사가 가까운 덕분에 평일에도 찰나의 데이트가 가능했다.화요일 저녁, 강영현의 회사 근처에서 겨우 20분 만에 해치운 국밥 한 그릇. 수요일 점심시간, 회사 로비에서 몰래 만나 건넨 편의점 샌드위치와 함께였던 10분간의 짧은 눈 맞춤. 목요일 밤 11시, 그의 퇴근길에 맞춰 집 앞에서 잠시 만나 껴안고 나누었던 5분의 위로. 금요일 퇴근 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톡으로 주고받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그 모든 찰나의 순간들이 팍팍한 평일을 버티게 하는 달콤한 위안이었다. 그리고 그 조각들을 모아 드디어 온전한 하루를 함께 보낼 수 있는 토요일이 된 것이다.
토요일 오후, 햇살이 잘 드는 연남동의 예쁜 디저트 카페.
우리는 1인 1조각 케이크를 시켜놓고 치열한 포크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내 딸기 타르트에 얹어진 제일 큰 딸기를 강영현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 강영현. 포크 치워라. 내 딸기 건들면 죽어." "아, 한 입만. 너 아까 내 초코 케이크 반 이상 파먹었잖아. 야, 양심 좀 챙겨라."
우리가 유치하게 으르렁거리고 있을 때였다. 바로 옆 테이블에 앉은 커플의 달달한 대화가 귓가에 훅 꽂혔다.
"자기야아~ 이거 진짜 맛있다. 아 해봐, 아~" "웅, 우리 자기가 먹여주니까 더 맛있네~ 애기야, 입에 크림 묻었잖아." "아잉, 자기가 닦아주떼요~"
나와 강영현의 포크질이 동시에 허공에서 멈췄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로를 쳐다보았다. 강영현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고, 내 포크를 쥔 손엔 소름이 오소소 돋아 있었다.
"...야." "어, 야." "우리 지금... 엄청 삭막한 거 아냐?"
내 물음에 강영현이 딸기를 찌르려던 포크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그러게. 우린 명색이 사귄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호칭이 맨날 '야', '김ㅇㅇ', '강영현'이네. 아니면 '돼지'라든가." "누가 할 소리! 너는 나한테 이름도 잘 안 부르잖아. 맨날 야야 거리면서."
그가 턱을 괴고 빤히 나를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그래? 그럼 우리도 저분들처럼 호칭 좀 업데이트해 볼까? 애칭 같은 거." "애, 애칭? 굳이? 그냥 이름 부르면 되지, 징그럽게 무슨..." "뭐가 징그러워, 남친 여친끼리. 해봐. 자, 시작."
강영현이 두 팔을 테이블에 괴고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평소의 장난기가 살짝 섞여 있었지만, 귀끝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빨리. 해봐." "아, 뭐를!" "호칭 업데이트. 아까 저쪽 테이블에서 한 거 있잖아."
그의 집요한 재촉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20년 동안 '야' 아니면 '웬수'로 불렀던 놈에게 달달한 호칭이라니. 혀가 입천장에 쩍쩍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오... 오빠?"
내 입에서 나온 단어에, 커피를 마시려던 강영현이 사레가 들려 기침을 뿜어냈다.
"켁, 쿨럭! 야! 미쳤냐? 생일도 내가 두 달이나 늦은데 무슨 오빠야! 양심 어디 갔어!" "아씨, 네가 해보라며! 그럼 뭐, 여보라고 해?!" "여보는 좀... 우리 아직 결혼 날짜도 안 잡았는데 너무 진도 빼는 거 아니냐?"
능글맞게 받아치는 그의 말에 나는 냅킨을 뭉쳐 그의 가슴팍에 던졌다.
"그럼 네가 먼저 해보든가!" "어, 알았어. 잘 들어. 나 간다."
강영현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고 목소리를 한껏 낮춰 동굴 저음으로 세팅했다.
"자기야."
"...!!!"
심장이 쿵, 하고 발끝까지 떨어졌다가 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늘 깐족거리던 목소리가 아니라, 라디오 디제이처럼 나긋하고 깊은 음성. '자기야'라는 세 글자가 그의 입술에서 튀어나온 순간, 카페 안의 소음이 음소거 된 것처럼 주변이 고요해졌다.
내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르는 걸 본 강영현이 피식 웃었다. 본인도 어색했는지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었지만, 꽤나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어때? 나 좀 쩔었지. 자, 이제 네 차례. 오늘부터 우리 '야' 금지야. 야라고 할 때마다 벌금 만 원. 오케이?"
나는 붉어진 볼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단 10분 만에, 나와 강영현은 "야, 벌금 내놔!" "야! 너도 방금 야라고 했거든?!" 하며 서로에게 3만 원씩 벌금 빚을 지고 말았다. 20년의 습관은 하루아침에 고쳐지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호칭 업데이트 대작전'은 흐지부지 실패로 돌아간 줄 알았다.
며칠 뒤 목요일 저녁.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 강영현이 우리 회사 앞까지 데리러 왔다. 하루 종일 모니터를 들여다보느라 피곤함에 찌든 나는, 거의 반수면 상태로 그의 손에 이끌려 걷고 있었다.
"오늘 진짜 힘들었나 보네. 눈이 반쯤 감겼어." "응... 기획안 엎어져서 진짜 죽을 뻔... 아, 피곤해."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을 때였다. 잠결에 고개가 꾸벅 꺾이며 하마터면 차도 쪽으로 발을 헛디딜 뻔했다.
그 순간, 강영현의 커다란 손이 내 허리를 확 낚아채어 자기 쪽으로 훅 끌어당겼다.
"어이쿠." "앗, 미안. 졸아서..."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힌 채로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여우 같은 눈매가 걱정으로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얼굴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는 내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주며, 어릴 적 넘어진 나를 달래주듯 한없이 다정하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심해야지, 자기야."
이번에는 장난도, 의도적인 내기도 아니었다.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한마디. 그 덤덤하고 애정 어린 '자기야'에 내 머릿속의 졸음이 싹 달아났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카페에서 억지로 뱉어내며 낄낄거렸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를 부축하던 강영현도 본인이 뱉어놓고 흠칫 놀랐는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이내 그의 귀끝부터 목덜미까지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드는 게 보였다. 어색함에 허공을 맴돌던 그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향하더니, 이내 쑥스러운 듯 예쁘게 접혀 웃었다.
"나 방금... 좀 자연스러웠지." "어... 진짜 놀랐어." "벌금 만 원 굳었다. 자, 이제 네 차례야. 해봐."
그가 장난스럽게 내 코끝을 가볍게 툭 쳤다. 나는 그에게 안긴 채로, 여전히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까치발을 들었다.
"알았어... 집에 가자, 자기야."
내 입술에서 떨리듯 흘러나온 그 단어에, 이번에는 강영현이 숨을 훅 들이켰다. 나를 안고 있던 그의 팔에 꾹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20년 동안 수천 번도 넘게 불러왔던 서로가, 완벽하게 새로운 의미로 다시 태어나는 짜릿한 퇴근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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