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y My Day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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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08

계획은 늘 빗나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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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1시. 완벽하게 세팅을 마치고 자취방 문을 나서려는데, 하늘에서 구멍이라도 뚫린 듯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으로 막을 수준이 아니었다.

[야, 비 미쳤다. 성수동은 무슨, 나 지금 역에서 너네 집 가는 길인데 바지 다 젖음.] [어떡해... 팝업스토어는 무리겠다. 어디 카페라도 갈까?] [카페도 꽉 찼어. 일단 너네 집 앞 편의점 쪽으로 갈게.]

10분 뒤, 비에 흠뻑 젖은 강영현이 편의점 처마 밑으로 뛰어 들어왔다. 흰 티셔츠가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머리에선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으아, 진짜 하늘 뚫린 줄 알았네." "야, 너 꼴이 이게 뭐야. 완전 생쥐 꼴이잖아. 춥지?"

내가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그의 머리를 대충 닦아주자, 그가 부르르 떨며 내 손목을 잡았다.

"어우, 추워. 감기 걸리겠다. 김ㅇㅇ, 나 수건 좀 빌려주라." "수건? 어... 그럼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뱉고 나니 순간 정적이 흘렀다. 친구 시절에는 수백 번도 더 드나들었던 내 자취방이지만, '남자친구'가 된 강영현을 집에 들이는 건 처음이었다. 강영현 역시 눈을 깜빡이며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수건만 딱 빌려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내 방 냄새가 훅 끼쳐왔다. 평소라면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침대로 다이빙했을 강영현이, 오늘은 현관 매트 위에서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수, 수건 저기 있어. 씻고 나와. 나 옷 갈아입고 있을게." "어... 그래."

화장실 문이 닫히고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좁은 자취방 안에 강영현과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공기를 팽팽하게 만들었다. 나는 부랴부랴 입고 있던 원피스를 벗고 제일 편안한(하지만 너무 후줄근하지 않은) 트레이닝 세트로 갈아입었다.

잠시 후 화장실 문이 열리고, 젖은 머리를 털며 강영현이 나왔다. 수건을 목에 두르고 나온 그의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물기에 젖은 그의 얼굴, 살짝 드러난 쇄골, 그리고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짙은 비누 냄새.

"야, 김ㅇㅇ. 이게 제일 큰거야? 조금 끼는거 같은데… 더 큰 거는.."

말을 하려던 강영현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고, 그 역시 말을 멈췄다. 우리는 좁은 방 한가운데 서서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빗소리만이 방 안을 채우는 가운데, 숨 막히는 텐션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후다닥 서랍을 뒤져 내껀줄 알고 잘 못 들고 왔던 아빠의 남성용 트레이닝 바지를 던져주었다. 그가 바지를 갈아입고 나오자, 우리는 어색하게 거실 러그 위에 마주 앉았다.

"음... 비도 오는데, 배달시켜 먹을까?" "어. 뭐 먹을래?" "비 오니까 떡볶이 어때? 내가 쏠게!"

강영현은 먹는 걸 엄청 좋아해서 웬만한 메뉴는 다 오케이를 외치는 편이었지만, 단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극강의 '맵찔이'라는 것. 게다가 단 음식도 질색하는 편이라 떡볶이는 그에게 꽤 까다로운 메뉴였다.

"야, 나 매운 거 못 먹는 거 알잖아." "아, 맞다. 그럼 순한 맛으로 시킬게. 치즈 듬뿍 추가해서!"

배달 온 떡볶이는 순한 맛이었지만, 비주얼은 꽤나 강렬한 붉은빛이었다. 강영현은 포크로 떡을 조심스럽게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음, 괜찮네. 별로 안 매..."

"딸꾹!"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입에서 경쾌한 딸꾹질 소리가 튀어나왔다.

"너... 매워?" "아니, 안 매워. 딸꾹!"

허세 섞인 대답과 달리, 그의 눈가에는 이미 이슬이 맺혀 있었고 딸꾹질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80이 훌쩍 넘는 덩치로 매운 떡볶이 하나에 쩔쩔매며 딸꾹질을 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웃긴지, 나는 배를 잡고 뒹굴었다.

"아, 진짜 강영현! 맵찔이 어디 안 가네! 덩치는 산만해가지고!" "야, 그거랑 이거랑, 딸꾹! 다르잖아! 물 좀 줘..."

내가 낄낄거리며 냉장고에서 쿨피스를 꺼내 건네주려던 찰나였다. 그가 다급하게 물을 찾느라 몸을 숙이다, 내 쪽으로 중심을 잃고 쏟아지듯 넘어졌다. 내 어깨를 짚은 그의 커다란 손, 그리고 코앞까지 훅 다가온 그의 얼굴.

딸꾹질 소리가 멈췄다. 창밖의 빗소리는 멀어지고, 방 안에는 서로의 숨소리만이 아슬아슬하게 얽혔다.

강영현의 시선이 내 눈에서 입술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의 얼굴이 아주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떡볶이 냄새 사이로 그의 비누 향이 짙게 배어들었다. 나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삐리리리릭- 띠로리~

그때, 현관문 도어락이 경쾌한 멜로디를 내며 해제되었다.

"ㅇㅇ아~ 엄마 왔다! 반찬 좀 가져왔... 어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엄마의 목소리에, 우리는 용수철처럼 튕겨져 나갔다. 나는 러그 위를 뒹굴어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갈 뻔했고, 강영현은 식탁 다리에 정강이를 박고 "악!"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어... 엄마! 여,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내가 사색이 되어 소리치자, 양손에 반찬통이 든 봉투를 든 엄마가 토끼 눈을 하고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정강이를 부여잡고 있던 강영현이 부리나케 일어나 90도로 배꼽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어머니! 강영현입니다!" "어머머, 깜짝이야. 영현이구나? 나는 또 누구라고. 너네 둘이 비 오는데 웬일로 집에 같이 있니?"

엄마의 얼굴에 피어올랐던 놀람이, 이내 익숙하고 반가운 미소로 바뀌었다. 엄마에게 강영현은 '딸의 남자친구'가 아니라, '딸이랑 흙 파먹고 놀던 불알친구, 밥통째로 밥 비벼 먹고 가던 웬수 같은 놈'일 뿐이었다.

"아, 네! 밖에서 놀려다가 비가 너무 와서 잠깐 피신 왔습니다. 하하하!" "그래? 잘 왔네. 영현이 너 밥은 먹었어? 맨날 시켜 먹지 말고 이 반찬 좀 가져가. 너 우리 집 파김치 좋아하잖아." "아유, 감사합니다! 마침 파김치가 똑떨어졌는데!"

강영현은 금세 특유의 능청스러움을 되찾고 엄마가 건네는 반찬 봉투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엄마는 전혀 의심하는 기색 없이 냉장고에 반찬을 척척 정리해 넣으셨다.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을 한 바가지 흘리며, 어색하게 웃고 있는 강영현을 노려보았다.

"엄마 갈게. 영현이 넌 밥 좀 잘 챙겨 먹고! ㅇㅇ이 쟤가 또 너 괴롭히면 엄마한테 전화해." "네, 어머니! 조심히 가세요!"

폭풍 같았던 10분이 지나가고, 현관문이 닫히자 방 안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방금 전까지 키스하기 직전의 아슬아슬했던 텐션은 온데간데없고, 파김치 냄새와 민망함만이 공기 중에 감돌았다.

강영현은 반찬 봉투를 식탁 위에 올려두고 마른세수를 했다. 나 역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진짜... 십년감수했네." "어머니 오시는 거 몰랐어?" "몰랐어. 원래 오시면 카톡 하시는데 오늘 비 와서 그냥 지나가다 들르셨나 봐."

다행히 들키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묘했다. 20년 동안 내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강영현이라 엄마는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릴 적 수영복만 입고 동네를 뛰어다니던 모습까지 다 아는 엄마에게, 영현이는 아들 같은 존재였으니까.

"야."

강영현이 내 옆으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표정이 묘하게 진지해져 있었다.

"우리,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까." "뭐가?" "비밀 연애 말이야. 너네 어머니한테도, 우리 엄마한테도. 계속 이렇게 들킬까 봐 숨어 지내야 하는 거냐?"

그의 말에 가슴 한구석이 콕 찔린 듯 아파왔다. 사실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부모님과 주변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20년 지기 소꿉친구의 연애'라는 건 우리에게만 기적 같을 뿐, 주변 사람들에겐 '세상에 기안84랑 이시언이 사귄대!' 급의 충격과 놀림거리가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양가 부모님이 문제였다. 명절이면 서로 집에 놀러 가 전을 집어 먹고, 엄마끼리 김장 김치도 나눠 먹는 사이. 우리가 헤어지기라도 한다면, 두 분의 관계까지 어색해질 것이 뻔했다.

"나도 모르겠어. 그냥... 아직은 좀 무섭잖아. 엄마가 어떻게 생각할지도 모르겠고."

내가 무릎을 끌어안으며 우울하게 대답하자, 강영현이 크고 따뜻한 손으로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도 네 마음 알아. 우리 부모님들도 엄청 놀라시겠지."

그가 작게 한숨을 쉬며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근데 오늘 어머니 오셨을 때, 내가 그냥 '네 친구'로 인사하고 밥 얻어먹는 놈으로 취급받는 게, 조금 짜증 나더라." "영현아..." "나 이제 네 남자친구인데. 파김치 얻어가는 불알친구 말고, 네 옆에서 당당하게 손잡고 밥 얻어먹는 사위 후보 하고 싶은데."

사위 후보. 그 거창한 단어에 내 심장이 쿵, 하고 크게 뛰었다. 장난기 하나 없는 진지한 그의 눈빛이 내게 닿았다. 평생을 친구로 지내오며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미래의 그림이, 아주 희미하지만 선명하게 그의 눈동자 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천천히 하자. 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그가 내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창밖의 빗소리가 아까보다 훨씬 다정하게 들려왔다. 우연히 시작된 어설픈 집 데이트는, 20년 지기였던 우리에게 '친구 이상의 미래'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그려보게 만든 따뜻한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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