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저녁, 야근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 이어폰 너머로 강영현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오늘 점심은 뭐 먹었는데?] "오늘? 우리 팀이랑 협력사 디자인 에이전시랑 회식했어. 초밥." [오, 초밥? 법카로 먹었어?] "아니, 이번에 새로 온 에이전시 PM님이 사주셨어. 그분 진짜 대박이야. 키도 엄청 크고, 목소리도 완전 동굴에다가, 성격도 엄청 젠틀하시더라. 우리 팀 여직원들 난리 났잖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정말 순수하게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브리핑하듯 떠들었다. 그런데 핸드폰 너머에서 묘한 정적이 흘렀다.
"...여보세요? 강영현, 듣고 있어?" [...어. 듣고 있어.] "갑자기 목소리가 왜 그래. 자?" [안 자. 키 크고 동굴 목소리 나는 젠틀맨 얘기 잘 듣고 있었다, 왜. 그래서, 잘생겼냐?]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낮아져 있었다. 나는 눈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 완전 배우 상이야. 안경 썼는데 지적으로 생... 아, 이번 주 금요일에 그 PM님이랑 외근 나가야 해서 자료 준비해야겠다." [...외근? 단둘이?] "팀장님이 나보고 다녀오라네. 아, 피곤하다. 나 씻고 바로 잘게, 내일 봐!"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나는 강영현의 묘하게 서늘해진 목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20년 동안 내 주변에 남자가 있든 말든 "네 얼굴에 무슨 썸이냐"며 콧방귀를 뀌던 놈이었으니까. 질투라는 단어는 우리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다. 적어도, 그 금요일이 오기 전까지는.
금요일 오후 2시. 외근 미팅을 끝내고 새로 온 PM님, '윤 팀장님'과 회사 앞 카페에 들렀다.
"김 대리님, 아까 미팅 때 자료 준비하신 거 진짜 완벽했어요. 덕분에 수월했네요." "아니에요, 팀장님이 커버 잘 해주신 덕분이죠. 하하."
부드럽게 웃으며 내 커피에 빨대까지 꽂아 건네주는 윤 팀장님의 매너에 나는 감탄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김ㅇㅇ."
카페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는 익숙한 실루엣. 다크 네이비 수트 재킷을 한 손에 걸쳐 들고, 다른 한 손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든 강영현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려는데,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내 구역에 침범한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 아니, 심기가 몹시 불편한 고양이 같았다.
"어? 영현아! 네가 여기 웬일..."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영현이 우리 테이블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윤 팀장님을 위아래로 한 번 쓱 훑어보더니, 내 옆자리에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보란 듯이 찰싹 붙어 앉았다.
"외근 끝났어? 전화도 안 받고." "아, 방금 막 끝나서... 인사해, 이쪽은 우리랑 협력하는 디자인 에이전시 윤 팀장님. 팀장님, 이쪽은 제 친..."
'친구'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려는 찰나, 강영현이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을 가로챘다.
"안녕하세요. 김ㅇㅇ 남자친구 강영현입니다."
'남자친구'라는 네 글자에 엄청난 강세를 주며, 그는 윤 팀장님을 향해 빙긋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윤 팀장님은 살짝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건넸다.
"아, 네. 안녕하세요...? 윤은철입니다. 두분이 아주 사이가 좋아보이시네요" "네. 아주 오래됐죠. 코흘리개 때부터 머리통 커지는 것까지 20년을 다 본 사이라, 제가 이 친구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거든요."
강영현은 명함을 군더더기 없는 자세로 교환하고는, 내 어깨를 더 꽉 끌어안았다. 나는 숨이 막혀 그의 옆구리를 몰래 꼬집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카페 안의 공기가 숨 막히게 팽팽해진 기분이었다.
윤 팀장님이 눈치껏 자리를 비켜준 후, 회사로 돌아가는 길. 강영현의 걸음걸이가 쿵쾅쿵쾅, 평소보다 1.5배는 빨랐다. 내가 잰걸음으로 쫓아가며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야! 너 아까 진짜 뭐 한 거야? 창피하게!" "뭐가 창피해. 남친이 남친이라고 한 게 창피하냐?" "아니, 말투가 완전 시비 거는 것 같았잖아! 일로 만난 사람인데!"
내 말에 홱 뒤를 돌아본 강영현의 입술이 오리처럼 댓 발은 나와 있었다.
"일로 만난 사람이 빨대까지 꽂아주냐? 그리고 넌 뭘 그렇게 실실 쪼개. 눈웃음치고 난리 났더라?" "내가 언제 눈웃음을 쳤어! 그냥 사회생활이지!" "사회생활? 하, 참나. 넌 대학교 3학년 때 나랑 조별 과제 할 때는 내가 커피 사다 줘도 고맙단 말 한마디 없이 빨대 껍질이나 던지던 애야. 근데 그 안경잡이 앞에서는 아주 그냥 천사가 따로 없더만?"
20년 치 데이터를 긁어모아 쏟아내는 그의 찌질한 공격에 나는 기가 막혀 입을 떡 벌렸다.
"너 지금... 질투하냐?" "질투? 미쳤냐? 내가 그깟 동굴 목소리 좀 난다고 질투를 왜 해. 내 목소리가 훨씬 감미롭구만. 그리고 키도 내가 더 커. 한 1.5센티 정도!"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자기가 더 크다고 항변하는 강영현을 보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묘하게 헛웃음이 났다.
늘 나를 놀리고 여유만만하던 강영현이, 고작 협력사 직원 하나 때문에 이렇게 발끈해서 유치하게 군다고? 씩씩거리며 내 앞을 걷는 그의 넓은 등짝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덩치 큰 고양이가 삐쳐서 낑낑대는 것처럼 보이는 건지.
그날 저녁, 내 자취방 앞 놀이터.
퇴근 후 나를 데려다주는 내내 강영현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손에 깍지를 끼고 내내 흔들며 걸었을 텐데, 오늘은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 넣고 내 발걸음만 맞출 뿐이었다.
"강영현. 아직도 화났어?" "...안 났어. 들어가."
그는 시선을 바닥에 둔 채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꾹 다문 입술과 처진 어깨가 온몸으로 '나 삐쳤으니까 빨리 달래라'라고 외치고 있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그의 앞에 바짝 다가섰다.
"나 안 봐?" "보고 있어." "눈 안 마주치잖아."
내가 까치발을 들고 그의 시야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자, 그가 흠칫하며 시선을 피했다. 나는 주머니에 꽂혀 있던 그의 양손을 억지로 빼내어 내 허리에 감게 하고는, 그의 목에 두 팔을 덥석 둘렀다.
"뭐, 뭐 해. 밖인데."
당황한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의 품에 이마를 부비며 웅얼거렸다.
"윤 팀장님은 그냥 일 잘하는 동료고. 내 눈엔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강영현이 제일 멋있는데. 수트 입은 강영현은 우주 최고고." "……." "남친이 질투하니까 귀여워서 어떡하지? 한 번만 더 질투하게 만들까?"
내 장난기 어린 속삭임에, 허리를 감싸고 있던 그의 손에 훅, 힘이 들어갔다.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푹 묻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닿아 간지러웠다.
"...한 번만 더 그런 안경잡이한테 웃어주기만 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아까의 찌질함은 다 사라지고, 한없이 어리광 부리는 소년 같았다.
"나 오늘 하루 종일 일도 못 했어. 신경 쓰여서 미치는 줄 알았다고." "알았어, 알았어. 이제 너한테만 눈웃음 칠게."
내가 그의 넓은 등을 토닥거리며 웃자, 그가 고개를 들어 나와 시선을 맞췄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그의 귓바퀴는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말만 하지 말고."
그가 짐짓 투덜거리며 내 허리를 확 끌어당겼다. 코앞으로 다가온 그의 눈동자에 장난기 대신 짙은 다정함이 차올랐다. 가로등 불빛 아래, 삐친 고양이의 입술이 마침내 내 입술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서로의 이마를 박지도, 뚝딱거리지도 않는, 완벽한 타이밍의 달콤한 화해였다. 질투라는 낯선 감정마저도, 20년의 시간 위에 덧입혀지니 제법 달달한 연애의 조미료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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