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y My DayFICTION
‹ 최애의 온도 · 회차 목록
EPISODE 04

아침에 뜨는 해가 이토록 원망스러울 때

댓글

토요일 아침 9시.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 햇살이 눈두덩을 찌르는 감각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미친."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내 입에서 현실을 부정하는 묵직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어젯밤 놀이터, 콧물 흘리며 울던 나, 나를 안아주던 강영현, 그리고... 가로등 불빛 아래서 부딪혔던 그 뜨겁고 말캉했던 감촉.

나는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내 입술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꿈이 아니었다. 강영현이랑, 무려 강영현이랑 키스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수련회 장기자랑으로 같이 '텔레토비' 춤을 췄던 그 강영현이랑!

"으아아아악!!"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미친 듯이 발차기를 해댔다. 침대가 부서져라 이불킥을 날리는데, 베개 밑에 쑤셔 박아둔 핸드폰이 경쾌하게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여전히 [강영현(웬수)].

침을 꼴깍 삼키며 조심스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여보세요..." [일어났냐?]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강영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나른하고 낮았다.

"어... 방금." [목소리 보니까 지금 이불 뻥뻥 차면서 현실 부정하고 있었네. 다 들려, 너 숨소리 떨리는 거.] "아니거든! 내가 뭐, 뭐 때문에 현실 부정을 해!" [어쭈.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어제 일 술김이었다거나 기억 안 난다고 하면 진짜 죽는다.]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그의 말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통화 너머로 그가 작게 푸스스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 하나에 심장이 또 주책맞게 쿵쾅거렸다. 어제까지는 그냥 '웃네' 였는데, 오늘은 왜 '미치게 섹시하게 웃네'로 필터링이 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준비하고 나와. 1시에 너네 집 앞으로 갈 테니까.] "왜? 어, 어디 가게?" [왜긴. 데이트하러 가지. 나 이제 네 친구 안 한다고 어제 도장까지 확실하게 찍었잖아.]

'도장'이라는 단어에 어젯밤 입술이 닿았던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내 얼굴이 토마토처럼 달아오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예쁘게 입고 나와라, 여자친구."라는 폭탄 같은 멘트를 던지고 뚝 전화를 끊어버렸다.

침대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핸드폰을 부여잡고 다시 한번 길고 긴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오후 1시. 자취방 현관문 앞 거울을 백 번쯤 들여다본 나는 심호흡을 하고 밖으로 나섰다.

평소 주말이었다면 무릎 나온 트레이닝복에 캡모자를 눌러쓰고 나갔을 테지만, 오늘은 무려 '데이트'였다. 옷장에 처박혀 있던 베이지색 원피스를 꺼내 입고, 안 하던 고데기까지 하느라 이마를 살짝 데이기까지 했다.

빌라 공동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길 건너편에 강영현이 서 있었다. 핸드폰을 보며 짝다리를 짚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늘 보던 수트 차림도, 후줄근한 집업 차림도 아니었다. 깔끔한 흰 셔츠에 네이비색 슬랙스, 살짝 세팅한 머리. 잡지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멀끔한 그의 모습에 내 발걸음이 뚝 멈췄다.

강영현 역시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는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고, 그가 성큼성큼 내 쪽으로 걸어왔다.

"어... 나왔냐." "어. 넌 무슨... 옷을 그렇게 입었어. 불편하게." "너야말로. 치마는 왜 입었어? 자빠질라."

우리는 서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괜히 시선을 허공에 둔 채 틱틱거렸다. 어젯밤 불도저처럼 직진하던 강영현은 온데간데없고, 그 역시 목덜미가 붉게 달아오른 채로 뒷머리만 긁적이고 있었다.

"가, 가자. 밥 먹으러. 예약해 놨어."

그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고, 나는 두어 걸음 떨어져서 그의 뒤를 따랐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분위기 좋은 파스타집이었다. 맨날 허름한 삼겹살집이나 국밥집만 다니던 우리가 이런 하얀 식탁보가 깔린 곳에 마주 앉아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자리에 앉으려는데, 강영현이 갑자기 삐걱거리는 동작으로 내 쪽 의자를 빼주었다.

"자, 앉아." "...너 지금 뭐 해?" "뭐 하긴, 매너남 코스프레 좀 해본다. 어제 그 소개팅남 놈팽이 보니까 의자 빼주길래."

어색하게 굳은 미소로 의자를 잡고 있는 그를 보며,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양팔을 벅벅 문질렀다.

"야, 제발 하지 마. 너 지금 눈에 흰자만 보여. 무서워 죽겠어." "아씨, 첫 데이트라고 검색까지 해서 달달 외워왔는데 진짜 안 도와주네. 그냥 네가 빼서 앉아라."

머쓱해진 그가 의자를 툭 밀어버리고는 자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파스타가 나오고 나서도 우리의 뚝딱거림은 계속됐다. 그는 굳이 내 앞접시에 파스타를 예쁘게 덜어주려다 소스를 식탁보에 질질 흘렸고, 나는 조신하게 먹겠다고 포크로 면을 돌돌 말다가 면발을 끊어먹고 사례가 들려 캑캑거렸다.

물잔을 건네주며 내 등을 두드려주던 강영현이 결국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진짜 우리 진짜 안 어울린다, 이런 거." "누가 아니래... 체할 것 같아."

마주 보고 낄낄거리며 웃다 보니, 하루 종일 명치를 짓누르던 어색함이 조금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역시 우리는 칼질하고 포크 돌리는 것보단, 가위로 삼겹살 숭덩숭덩 잘라서 소주잔 부딪치는 게 어울리는 종족이었다.

어설펐던 첫 식사를 마치고 한강 공원으로 향했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 선선한 강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나란히 산책로를 걷는데, 두 사람 사이에 주먹 하나가 들어갈 만큼의 묘한 간격이 유지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걸리적거린다며 내 어깨에 팔을 턱 걸치거나, 장난치며 툭툭 밀치고도 남았을 강영현이 오늘따라 차렷 자세로 경직되어 걷고 있었다.

내 시선은 자꾸만 허공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그의 손으로 향했다. '손... 잡아야 하나? 연인이면 당연히 잡는 건데. 내가 먼저 잡아? 아니야, 미쳤어. 손에 땀 나면 어떡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내 손등과 그의 손등이 스치듯 부딪혔다.

"앗." "어, 미, 미안."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 둘 다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다. 나는 머쓱함에 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강영현은 마른세수를 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놈의 20년 지기 관성이 문제였다. 마음은 이미 연인인데, 몸과 습관이 아직 '절친 모드'에서 업데이트가 덜 된 것이다.

우리는 말없이 한참을 더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할 무렵, 강영현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야, 김ㅇㅇ."

그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자,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진짜, 언제까지 고장 난 로봇처럼 뚝딱거릴 건데." "누, 누가 뚝딱거렸다고 그래! 너야말로 걷는 내내 오른팔 오른 다리 같이 나갔거든?!"

내가 발끈해서 쏘아붙이자, 그가 실소를 터뜨리며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변명할 틈도 없이, 그의 따뜻한 손이 내 오른손을 덥석 감싸 쥐었다.

"어..." "남들 다 하는 데이트 코스 밟으려니까 체할 것 같아서 안 되겠다. 그냥 우리 하던 대로 해. 대신 이건 적응해."

그는 내 손을 잡은 채로 자기 쪽으로 훅 끌어당겼다. 깍지를 끼듯 손가락 사이사이로 그의 긴 손가락이 단단하게 얽혀 들어왔다. 맞닿은 손바닥에서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았지만, 동시에 심장이 몽글몽글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잡으니까 좋네."

내 손을 쥔 채로 가볍게 앞뒤로 흔들며, 강영현이 특유의 다정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가로등 불빛 아래 빛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비로소 우리의 관계가 완전히 다른 궤도에 진입했음을 실감했다.

"손에 땀 나도 안 놔줄 거니까, 빼려고 하지 마라." "누가 뺀대...? 땀 안 났거든."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꽉 마주 쥐었다. 20년 동안 수없이 나란히 걸었던 시간들이 처음으로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익숙한 내 소꿉친구 강영현과 맞이하는, 가장 낯설고 설레는 첫 주말의 밤이었다.

이 회차의 댓글

이름과 비밀번호로 남기는 감상. 수정하거나 삭제할 때 같은 비밀번호가 필요해요.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이름과 댓글은 공개됩니다. 비밀번호는 다른 곳에서 쓰는 것과 다르게 정해 주세요.

기존 소설 화면으로 보기 ↗

이야기 속 내 이름

한글 이름을 입력하면 조사가 함께 바뀝니다. 이 기기에만 저장돼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