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7시. 여의도의 분위기 좋은 이탈리안 레스토랑.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번듯한 대기업 과장이었고, 매너도 좋았으며, 외모도 훈훈했다. 완벽한 소개팅 상대였다.
"그래서 제가 그때 이탈리아 출장을 갔을 때 말이죠..."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배경음악처럼 흘러갔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딴생각뿐이었다. 샐러드를 깨작거리며 나는 습관처럼 핸드폰 화면을 힐끔거렸다. 여전히 강영현에게선 알림 하나 와있지 않았다.
"김ㅇㅇ 씨? 입맛에 안 맞으세요?" "아! 아니요, 맛있어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파스타를 입에 밀어 넣으려던 참이었다. 레스토랑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정장 차림의 무리가 우르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근처 회사에서 법인 카드로 회식을 하러 온 모양이었다. 나는 무심코 그쪽을 쳐다보았다가,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무리들 한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큰 키에 다크 네이비 수트를 입은 남자. 강영현이었다.
옆에 선 상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던 강영현이, 시선을 돌리다 창가 자리에 앉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레스토랑의 백색소음도, 맞은편 남자의 목소리도 모두 아득해졌다. 강영현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의 시선이 나를 거쳐, 내 맞은편에서 나를 향해 다정하게 웃고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나는 숨을 헉 들이마셨다.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나도 모르게 의자에서 엉덩이를 반쯤 뗐다. 하지만 그 순간, 강영현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일말의 동요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나를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완벽한 타인을 대하듯 서늘하게 훑어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일행들과 함께 홀 안쪽 룸으로 사라져버렸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20년 동안 수없이 싸우고 지지고 볶았지만, 단 한 번도 나를 그런 차가운 눈빛으로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선을 긋기 위해 던졌던 방패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내 가슴에 깊게 꽂히는 기분이었다. 파스타는 고무줄처럼 질겨졌고, 남은 소개팅 내내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소개팅 상대와 어색하게 헤어지고, 나는 집으로 곧장 가지 못했다. 내 자취방 근처, 동네 놀이터 그네에 주저앉았다. 구두에 까진 발뒤꿈치가 쓰라렸지만, 가슴 안쪽이 욱신거리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짜 끝인가. 우리 20년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건가.'
바닥의 모래만 툭툭 차고 있는데, 저 멀리서 익숙하고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 고개를 들자, 숨을 헐떡이며 서 있는 강영현이 보였다. 넥타이는 주머니에 쑤셔 넣었고, 셔츠 단추는 두어 개 풀어헤쳐진 채였다. 회식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온 게 분명했다.
그는 씩씩거리며 내 앞까지 걸어오더니, 그네 줄을 쥔 내 손 위로 자신의 커다란 손을 겹쳐 덮었다.
"너 진짜……."
분노인지 억울함인지 모를 감정으로 그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너 진짜 나 피하려고 그딴 짓까지 하냐?" "무, 무슨 소리야. 그딴 짓이라니. 나 진짜 소개팅한 거거든? 어, 완전 좋더라. 남자분 매너도 엄청 좋으시고, 분위기도..."
나는 또다시 멍청하게 방어기제를 발동하며 가시 돋친 말을 뱉었다. 내 말을 듣던 강영현의 턱관절이 꾹 다물리며 불거졌다.
"그렇게 좋았으면 그 새끼랑 2차를 가든가, 왜 여기서 청승맞게 혼자 이러고 있는데." "내가 어디에 있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상관이 왜 없어! 20년 친구가 고백 좀 했다고 사람을 이렇게 벌레 보듯 피하고, 보란 듯이 딴 놈이랑 실실거리며 밥을 쳐먹는데 내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치는 그의 외침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강영현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늘 여유롭고 나를 놀리며 즐거워하던 녀석이, 지금은 온몸으로 상처받았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끔찍하냐, 김ㅇㅇ? 친구에서 남자로 선 넘으려는 내가 그렇게 역겨워?"
그의 상처받은 눈빛이 내 심장을 난도질했다. 역겨운 게 아니었다. 싫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날 밤, 네 재킷이 어깨에 덮였을 때부터, 네가 내 손목을 잡고 고백했을 때부터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는데.
"아니야……."
툭, 눈물 한 방울이 모래 위로 떨어졌다. 한 번 터진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강영현이 당황하며 손을 뻗었지만, 나는 내친김에 엉엉 소리 내어 울며 그에게 악을 썼다.
"아니라고, 이 나쁜 새끼야! 네가 좋아서, 그래서 무서웠다고!!" "뭐...?" "우리가 사귀다가 헤어지면! 싸우고 헤어지면 어떡할 건데? 다른 남자들은 헤어지면 그냥 똥 밟았다고 치면 끝이지만, 넌 아니잖아!"
나는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벅벅 닦아내며 속에 묵혀둔 진심을 토해냈다.
"너는 내 20년이잖아. 우리 엄마 아빠 다음으로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인데. 남녀 사이는 끝이 있는 거잖아. 너랑 연애하다가 끝이 나버리면, 난 평생 남는 친구 하나, 내 인생의 절반을 날려버리는 거라고! 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 줄 알아?!"
우정을 핑계로 도망친 진짜 이유. 영원할 것 같던 친구 관계를 잃고, 영원하지 않을 연인 관계의 끝을 맞이하는 것이 두려웠다. 내 절박한 고백에 강영현의 굳어있던 얼굴이 서서히 풀리더니, 이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바람 소리만이 맴도는 놀이터. 한참 동안 나를 내려다보던 강영현이, 갑자기 허탈하다는 듯 낮게 실소를 터뜨렸다.
"하하... 미치겠다, 진짜. 김ㅇㅇ, 너 진짜 개쫄보구나?" "뭐, 쫄... 야! 나는 지금 심각한데 넌...!"
그가 성큼 다가와, 삿대질하려던 내 팔을 확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그의 단단한 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놀라 굳어버린 내 등 뒤로 그의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감겼다. 턱이 내 정수리에 안착하는 익숙하고도 낯선 온기. 그의 규칙적인 심장 박동이 내 가슴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누가 헤어진대."
내 귓가에 닿은 그의 목소리는 아까의 분노는 온데간데없이, 한없이 다정하고 뭉클했다.
"시작도 안 해놓고 벌써 끝을 생각해, 이 바보야." "근데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나는 알아. 20년 동안 징글징글하게 널 봐오면서 단 한 번도 널 놓을 생각 한 적 없었으니까."
그가 나를 품에서 살짝 떼어내고, 두 손으로 내 눈물 젖은 뺨을 감싸 쥐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는 그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네가 두려워하는 그 끝, 절대 안 오게 할게. 내가 기를 쓰고 평생 네 옆에 붙어 있을 거니까."
강영현의 시선이 내 눈에서 코끝으로, 그리고 입술로 천천히 내려왔다.
"그러니까 밀어내지 마. 나 이제 네 친구 안 해."
허락을 구하듯 아주 느리게,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워진 거리. 20년 동안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던, 내 소꿉친구의 입술이 마침내 내 입술 위로 부드럽게 포개어졌다. 가로등 불빛이 우리 위로 비스듬히 쏟아져 내리며, 길었던 친구라는 이름에 마침표를 찍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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