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에서의 뒤풀이 사건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얇은 막이 하나 쳐진 듯했다.
여주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처럼 카페를 운영했고, 도운 역시 여전히 오후 3시쯤이면 커피를 사러 왔다. 하지만 "어, 사장님!" 하고 반갑게 뛰어오던 도운의 강아지 같은 텐션은 한풀 꺾여 있었고, 여주 역시 괜스레 시선을 피하며 사무적인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며칠이 더 흘렀다.
금요일 밤 10시.
평소보다 조금 늦게 마감을 하던 여주는 싱크대 하부장을 열어 배수구 쪽을 청소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물 빠짐이 시원찮아 락스를 부어두려던 참이었다.
"하아, 진짜 오늘따라 왜 이렇게 피곤하냐."
여주가 고무장갑을 끼고 하부장 안쪽으로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시커멓고, 손가락 두 마디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무언가가 배수구 파이프를 타고 후다닥 기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
여주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나자빠졌다. 심장이 발밑으로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더듬이가 달린 그 끔찍한 생명체는 하부장 밖으로 나와 카페 바닥을 유유히 기어가기 시작했다.
여주는 패닉 상태로 카운터 위로 뛰어 올라갔다. 고무장갑을 낀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어떡해, 어떡해, 미쳤나 봐, 진짜 커!'
가족들은 멀리 있고, 이 늦은 시간에 당장 달려와 줄 직원은 없었다. 여주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카운터 위에 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건물 관리실 번호를 찾아보려 했지만,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통화 목록 가장 상단에 있는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윤도운 원장님].
여주는 체면이고 뭐고 따질 겨를 없이 다급하게 메시지 창을 열었다.
[원장님 혹시 건물 관리실 소장님 번호 아세요? ㅠㅠㅠㅠ]
[가게에 진짜 손바닥만 한 벌레가 나왔는데 저 지금 카운터 위에서 못 내려가고 있어요 ㅠㅠㅠ 살려주세요 ㅠㅠ]
메시지를 보내놓고 숨을 헐떡이는데, 10초도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도운이었다.
"여보세요?!"
* 사장님! 어디예! 벌레가 어디 있다고예?
수화기 너머로 우당탕탕 무언가 엎어지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도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저 지금 카페 카운터 위로 도망쳤는데... 바닥에, 바닥에 진짜 엄청 큰 게 기어 다녀요. 소장님 퇴근하셨겠죠? 어떡해요 ㅠㅠ"
* 가만히 있으십쇼! 내 지금 학원 마감 중이었으니까 바로 뛰어갈게요. 1분만, 아니 30초만 버티소!
뚝. 전화가 끊겼다.
여주는 카운터 위에 쪼그려 앉아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와중에 도운이 30초 만에 와주겠다는 말이 동아줄처럼 느껴져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진짜로 1분도 채 되지 않아, 카페 유리문을 부술 듯이 열어젖히며 도운이 뛰어 들어왔다. 헐떡이는 숨과 땀에 젖은 앞머리가 그가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사장님! 괜찮습니까!"
도운이 카운터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여주는 울상이 된 얼굴로 카페 구석의 제빙기 쪽을 가리켰다.
"저기, 저기 밑으로 들어갔어요... 진짜 엄청 컸단 말이에요."
"하아... 다행이네. 안 다쳤으면 됐습니다. 제가 잡을 테니까 거기 가만히 계십쇼."
도운은 결연한 표정으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제빙기 쪽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갔다. 여주는 카운터 위에서 두 손을 모은 채 도운의 듬직한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위기의 순간에 망설임 없이 달려와 준 그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주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
제빙기 쪽으로 다가가는 도운의 얼굴이, 벌레보다 더 새하얗게 질려있다는 것을.
'미치겠네. 진짜로 미치겠네.'
도운은 빗자루를 쥔 손에 땀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윤도운, 2n년 평생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두 가지 있었으니 하나는 귀신이요, 다른 하나는 다리 많은 벌레였다. 모기나 파리 정도야 잡을 수 있지만, 여주가 묘사한 '손바닥만 한' 사이즈의 기어 다니는 벌레는 도운에게 있어 공포 그 자체였다.
'그래도, 명색이 남잔데... 사장님 저래 놀라가 떨고 있는데 도망갈 순 없잖아.'
도운은 심호흡을 크게 세 번 하고, 제빙기 아래로 조심스럽게 빗자루를 밀어 넣었다.
스스슥-
빗자루 끝에 무언가 걸리자마자, 시커멓고 거대한 벌레가 쏜살같이 튀어나와 도운의 발밑을 향해 돌진했다.
"으아아악!!"
도운의 입에서 굵직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도운은 거의 제자리에서 1미터는 뛰어오르며 뒤로 물러섰다.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도운은 눈을 반쯤 감은 채로, 빗자루를 거의 골프채 휘두르듯 미친 듯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저리 가라! 저리 가!! 아악! 미쳤나 진짜 와 이리 빠르노!!"
탁! 타닥! 퍽!
우당탕탕 난리도 아니었다. 도운은 벌레를 보지도 못하고 허공에 빗자루를 휘두르며 사투를 벌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필사적이고 처절한지, 카운터 위에서 떨고 있던 여주의 입에서 헉, 하는 놀람과 동시에 작은 헛웃음이 새어 나올 정도였다.
몇 번의 헛스윙 끝에, 마침내 빗자루 끝이 벌레를 정확히 가격했다. 기절한 듯 움직임을 멈춘 벌레를 확인한 도운은, 그 위로 커다란 종이컵을 재빨리 덮어씌웠다.
"하아... 하아..."
도운은 종이컵 밑으로 두꺼운 전단지를 밀어 넣어 완벽하게 포획한 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들어 올려 카페 밖 하수구에 탈탈 털어버리고 돌아왔다.
모든 사태가 종료되고, 카페 안에는 무거운 정적과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맴돌았다.
도운이 빗자루를 제자리에 내려놓고 카운터 쪽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으며, 두 눈은 넋이 나가 있었다.
"사, 사장님... 이제 내려오셔도 됩니다. 밖으로 완전히 버렸습니다."
"원장님..."
여주가 카운터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와 도운의 앞치마 쪽을 툭툭 털어주었다.
"혹시... 원장님 벌레 무서워하세요?"
여주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도운은 입술을 꾹 물더니, 이내 두 손으로 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리며 바닥에 털썩 쭈그려 앉았다.
"하아... 진짜 미치겠다. 쪽팔리구로."
"......"
"저 사실... 이런 거 진짜 못 보거든요. 고등학교 때도 합주실에 벌레 나오면 영현이 형 등 뒤에 숨어가지고 울고 그랬단 말입니다..."
도운의 넋두리 같은 솔직한 고백에 여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것. 보는 것조차 기겁할 정도로 싫어하는 것.
그런데도 도운은 여주의 '살려달라'는 문자 한 통에 1분도 안 되어 달려왔다. 도망가고 싶은 걸 꾹 참고, 파랗게 질린 얼굴로 벌레와 사투를 벌이며 끝까지 여주를 안심시켰다.
여주는 쭈그려 앉아 붉어진 귀를 부여잡고 있는 도운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늘 장난스럽고 여유로워 보이던 사람.
다른 여자 앞에서 능글맞게 웃어 여주를 서운하게 만들었던 사람.
하지만 내가 곤란할 때, 자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을 마주하면서까지 내 곁에 있어 준 사람.
여주의 가슴 속에서, 그동안 질투나 자존심 같은 것들로 어지럽게 엉켜있던 실타래가 탁, 하고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원장님."
여주가 도운의 눈높이에 맞춰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도운이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들었다.
"진짜 무서웠겠다. 다리 달달 떠시던데."
"아, 진짜 놀리지 마십쇼. 저 지금 심장 터질 거 같으니까..."
"놀리는 거 아니에요."
여주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도운의 셔츠 소매 끝을 살짝 쥐었다.
"고마워요, 진짜로. 무서운데 도망 안 가고 나 지켜줘서."
여주의 다정한 진심에 도운의 시선이 흔들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남자친구야?'
조카 지훈의 그 질문이 다시 한번 두 사람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번엔 둘 다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도운은 무릎을 굽히고 앉은 여주를, 여주는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도운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카페의 은은한 조명 아래, 쿵쿵거리는 서로의 심장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가까운 거리였다.
웃기지 못하는 날, 완벽하게 멋있지도 못한 날이었다.
하지만 여주에게 오늘 윤도운의 그 허둥지둥하던 뒷모습은, 세상 그 어떤 드라마 속 주인공보다 든든하고 다정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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