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y My DayFICTION
‹ 대타연애 · 회차 목록
EPISODE 10

나 안 할래

댓글

그날의 '벌레 소동' 이후, 두 사람 사이의 어색했던 기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히려 그날을 기점으로 둘의 관계는 이전보다 훨씬 견고하고 편안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이 몽글몽글해도 현생은 현생이었다.

최근 윤도운의 스케줄은 그야말로 살인적이었다. 수능이 다가오며 입시반 아이들의 보충 수업이 몰렸고, 가을이라 인디 밴드들의 공연이 많아져 세션 땜빵 대타도 잦았다. 거기다 체력을 기르겠다며 얼마 전 야심 차게 끊어둔 복싱 체육관까지. 평소 취미 말고는 좀 게으른 편인 그가 해야 할 일을 한꺼번에 몰아치려니 몸이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하아..."

나른한 목요일 오후.

드럼 학원 로비의 길쭉한 소파 위에는,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도운이 슬라임처럼 죽 늘어져 있었다.

"원장님, 살아계세요?"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주였다. 한 손에는 카페 쇼핑백을, 다른 한 손에는 차가운 음료 캐리어를 들고 있었다.

도운은 소파에 널브러진 채로 고개만 겨우 돌려 여주를 쳐다보았다. 눈 밑에 옅게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어... 사장님. 어쩐 일입니까."

"저희 오늘 신메뉴로 샌드위치 테스트해 본 거 남아서요. 맨날 저녁도 못 드시고 수업하시잖아요."

여주가 테이블 위에 쇼핑백을 올려두며 도운의 몰골을 살폈다. 늘 장난기 넘치던 얼굴은 어디 가고, 온몸의 기운이 다 빠진 사람 하나가 소파에 널브러진 것 같았다.

"근데 진짜 무슨 일 있어요? 안색이 왜 이래요. 어디 아프세요?"

"아뇨... 아픈 건 아이고."

도운이 끙차, 소리를 내며 무거운 몸을 힘겹게 일으켜 세웠다.

"어제 밤늦게까지 세션 녹음하고, 오늘 아침에 복싱장 가서 스파링 쪼매 뛰고 왔더니 온몸이 두드려 맞은 거 같아서예... 아, 나 진짜 오늘 아무것도 안 할래..."

도운이 다시 쿠션을 끌어안으며 소파 위로 풀썩 쓰러졌다. "안 할래"라며 늘어지는 말투가 영락없이 떼쓰는 막내 동생 같았다. 매번 다정하고 듬직한 '어른'이거나 텐션 높은 '원장님'이었던 도운의 이런 무방비한 모습은 여주에게 꽤 신선하게 다가왔다.

"체력 기르려고 복싱 시작하신 거 아니었어요? 그러다 골병들겠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강영현이 자꾸 같이 다니자고 꼬셔가지고..."

여주가 쯧쯧 혀를 차며 캐리어에서 시원한 청포도 에이드를 꺼내 도운의 볼에 쓱 갖다 댔다. 차가운 감촉에 도운이 흠칫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맨날 아메리카노만 드시니까 속 버릴까 봐 오늘은 달달한 걸로 가져왔어요. 샌드위치랑 같이 드시고 기운 좀 차리세요."

"와, 사장님 진짜 천사네. 잘 먹겠습니다."

도운이 퉁퉁 부은 손으로 빨대를 꽂아 에이드를 쭉 빨아들였다. 여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도운의 손등으로 향했다. 스틱을 쥐느라 생긴 굳은살 위로, 복싱 밴드를 잘못 감았는지 여기저기 까지고 밴드가 붙어있는 상처투성이 손이었다.

"손목은 괜찮아요? 드럼 치시는 분이 손 이렇게 막 써도 돼요?"

여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도운이 제 손등을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아, 이거예? 밴드 감는 게 아직 안 익숙해서 쪼매 까졌습니다. 괜찮아요, 뼈가 부러진 것도 아이고."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입시반 학생 하나가 요란하게 학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원장님! 저 왔어요!"

그 순간, 소파에 반쯤 녹아있던 도운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는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방금 전까지 앓는 소리를 내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쩌렁쩌렁하고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받았다.

"어, 왔나! 오늘 폼 좀 괜찮나? 들어가서 패드 치면서 손 풀고 있어라, 선생님 5분 뒤에 들어갈게!"

"네!"

학생이 연습실 안으로 쏙 들어가자마자, 도운은 다시 "아이고, 허리야..." 하고 소파로 푹 꼬꾸라졌다. 그 완벽한 태세 전환에 여주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아, 진짜. 원장님 직업병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원장 체면이 있지 않습니까. 애들 앞에서 힘든 티 내면 안 되죠."

도운이 샌드위치 포장을 뜯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근데 연습실 지금 다 비어 있는 거예요?"

여주가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는 도운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쟤가 오후 타임 첫 타자고, 다른 애들은 한 시간 뒤에나 옵니다. 와예?"

"아니, 그냥... 저번에 지훈이 칠 때 보니까 재밌어 보이길래."

여주의 말에 도운의 눈이 반짝 빛났다. 피곤해서 늘어져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는 입에 물고 있던 샌드위치를 급하게 꿀꺽 삼키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 사장님 드럼 한 번 쳐보실랍니까? 제가 또 1타 강사 아닙니까. 이리 오이소."

여주는 얼떨결에 도운의 손에 이끌려 가장 큰 메인 연습실로 들어갔다. 도운은 여주를 드럼 의자에 앉히고는, 새 스틱 두 개를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자, 일단 스틱은 아기 새 쥐듯이... 아, 지훈이 때랑 똑같이 가르치면 안 되지. 사장님은 어른이니까."

도운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여주의 등 뒤로 바짝 다가섰다.

"오른발은 여기 베이스 페달에 올리시고요. 스틱은 한 3분의 1 지점을 엄지랑 검지로 가볍게 쥐는 겁니다."

말소리가 귓가에 확 가까워졌다. 여주가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지만, 도운은 가르치는 데 집중한 듯 여주의 양팔 바깥쪽으로 자신의 팔을 뻗어 자세를 잡아주기 시작했다. 마치 뒤에서 여주를 가볍게 끌어안은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손목에 힘을 빼야 소리가 예쁘게 납니다. 자, 제 손 따라 움직여 보십쇼."

도운의 단단한 두 손이 스틱을 쥐고 있는 여주의 손을 포개어 잡았다. 손등에 붙은 밴드의 까슬한 감촉과, 도운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여주의 손등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등 뒤에서는 도운의 규칙적인 숨소리와 함께, 은은한 비누 향과 희미한 땀 냄새가 섞인 체향이 훅 끼쳐왔다.

쿵, 치, 따, 치.

도운의 리드에 맞춰 여주의 손이 드럼을 두드렸다. 제법 그럴싸한 소리가 연습실 안을 울렸지만, 여주의 귀에는 그 소리보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도운의 목소리와 자신의 요란한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오, 사장님 박자감 꽤 좋은데요? 한 번 더. 쿵, 치, 따."

자세를 교정해주려 도운이 조금 더 몸을 밀착해 오자, 그의 단단한 가슴팍이 여주의 등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여주는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잊은 채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스틱을 쥔 손바닥에 축축하게 땀이 배어나는 것 같았다.

"원, 원장님."

"예?"

여주가 작게 부르자, 도운이 대답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시선이 허공에서 딱 마주쳤다.

불과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도운의 시선이 여주의 떨리는 눈동자와, 살짝 벌어진 입술에 차례로 머물렀다. 그제야 도운도 지금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할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는지, 이 자세가 얼마나 묘한 텐션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깨달은 듯했다.

본문 삽화

포개어 잡고 있던 도운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항상 장난스럽게 휘어지던 그의 눈매가 유독 짙고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방음이 완벽한 연습실 안에는 오직 두 사람의 얽힌 숨소리만이 아스라이 맴돌았다.

누구 하나 먼저 몸을 물리지 못한 채, 시간마저 멈춘 것 같은 찰나의 순간.

"원장님! 저 이거 싱코페이션 박자 모르겠어요!"

연습실 문 너머로 아까 들어왔던 학생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어, 어흑! 깜짝아!"

마법이 풀린 것처럼 화들짝 놀란 도운이 뒤로 훌쩍 물러섰다. 어찌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뒤에 있던 앰프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여주 역시 용수철 튕기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스틱을 우당탕 떨어뜨렸다.

"저, 저는, 가볼게요! 마감, 아니 오픈, 아니 카페에 손님 올 시간이라서요!"

"아, 예! 그, 조심히 가십쇼! 샌드위치 진짜 잘 먹을게요!"

여주가 쫓기듯 연습실을 빠져나가자, 도운은 멍하니 바닥에 떨어진 스틱만 내려다보았다.

"미쳤다, 윤도운."

도운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 회차의 댓글

이름과 비밀번호로 남기는 감상. 수정하거나 삭제할 때 같은 비밀번호가 필요해요.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이름과 댓글은 공개됩니다. 비밀번호는 다른 곳에서 쓰는 것과 다르게 정해 주세요.

기존 소설 화면으로 보기 ↗

이야기 속 내 이름

한글 이름을 입력하면 조사가 함께 바뀝니다. 이 기기에만 저장돼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