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밤 / 카페 어닝 아래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저녁 무렵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마감 시간이 가까워지자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굵어졌다.
"아, 오늘 택시 진짜 안 잡히겠네."
여주는 카페의 간판 불을 끄고 셔터를 내린 뒤, 좁은 어닝 아래에 서서 휴대폰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택시 호출 앱에서는 십 분째 '주변에 빈 차량이 없습니다'라는 야속한 알림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우산을 쓰나 마나 할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어,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옷깃을 여미며 작게 한숨을 쉬던 그때였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골목으로 들어오던 검은색 SUV 한 대가 여주의 카페 앞에 스르륵 멈춰 섰다. 잘못 들어온 차인가 싶어 여주가 한걸음 물러서는데, 조수석 쪽 창문이 부드럽게 내려갔다.
"사장님!"
빗소리를 뚫고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여주가 고개를 숙여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운전석에는 한 손으로 핸들을 쥔 채 여주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는 도운이 있었다.
"원장님?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방금 홍대 쪽에서 일 하나 끝나고 넘어오는 길입니다. 퇴근하시는 길입니까?"
"네, 근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택시가 안 잡히네요."
"타세요. 데려다 드릴게요."
평소 같았으면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고 거절했을 텐데, 오늘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이젠 서로 선 하나를 스스럼없이 갈아주고, 바쁠 때 커피 배달을 부탁할 만큼 가까워진 '동네 지인'이지 않은가.
"진짜요? 방향 안 반대예요?"
"안양 바닥이 넓어 봐야 거기서 거깁니다. 얼른 타십쇼, 비 다 맞겠다."
여주가 빗물을 털어내며 조수석에 올라타자, 도운이 기다렸다는 듯 히터의 온도를 살짝 높였다.
"감사합니다. 진짜 구세주네요, 오늘. 저번엔 스피커도 고쳐주시고, 오늘은 차까지 태워주시고. 제가 원장님한테 빚이 너무 많은데요?"
"에이, 무슨 빚입니까. 포스터도 제일 좋은 자리에 붙이셨잖아요. 아, 정 찝찝하시면 오늘 차비는 내일 아메리카노 라지 사이즈로 받겠습니다."
"어유, 그럼요. 샷 추가도 두 번 팍팍 해드릴게요."
여주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도운이 소리 내어 웃으며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조수석 / 빗길 위의 대화
차 안은 바깥의 거센 빗소리가 무색할 만큼 조용하고 따뜻했다. 라디오에서는 잔잔한 재즈 음악이 아주 작게 흘러나오고 있었고, 차 내부에선 은은하고 시원한 방향제 향이 났다. 매번 슬리퍼를 끌고 커피를 사러 오던 헐렁한 원장님이 아니라, 능숙하게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빗길을 달리는 운전자의 옆모습은 꽤나 낯설면서도 신선했다.
그때였다.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합류하려는 찰나, 옆 차선에서 깜빡이도 켜지 않은 흰색 세단 한 대가 무리하게 도운의 차 앞으로 훅 끼어들었다.
"어흑!"
여주가 놀라 짧은 비명을 지르며 손잡이를 꽉 쥐었다. 도운의 발이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고, 차가 빗길에 살짝 밀리며 끼익- 소리와 함께 가까스로 멈춰 섰다. 자칫하면 크게 사고가 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괜찮습니까? 어디 부딪힌 데 없어요?"
도운이 즉각 비상등을 켜고는 여주 쪽을 향해 다급하게 물었다. 여주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도운의 시선이 앞서가는 흰색 세단 쪽으로 향했다. 순간 도운의 미간이 무섭게 찌푸려졌고, 운전대를 쥔 손등에 힘줄이 툭 불거졌다.
여주는 내심 도운이 클랙슨을 길게 울리거나 창문을 내리고 험한 소리를 할 줄 알았다. 그럴 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도운은 깊은숨을 한 번 내쉬더니, 불거졌던 손의 힘을 천천히 풀었다.
"하아... 아이고, 빗길인데 참 엄청 급하셨는갑네."
화를 내는 대신 작게 중얼거리며 혀를 찰 뿐이었다. 도운은 여주가 진정할 수 있도록 잠시 기다려준 뒤, 다시 부드럽게 엑셀을 밟았다.
"원장님, 화 안 나세요? 방금 진짜 위험했는데."
"아, 놀라셨죠. 죄송합니다."
"아니요, 원장님이 잘못하신 것도 아닌데. 근데 운전 엄청 점잖게 하시네요. 보통 방금 같은 상황이면 쌍욕부터 나오지 않아요?"

여주의 물음에 도운이 핸들을 고쳐 쥐며 희미하게 웃었다.
"속으로는 욕 엄청 했죠. 근데요, 동네에서 장사하는 놈이 차 끌고 다니면서 함부로 성질내고 빵빵거리면 안 됩니다."
"네? 왜요?"
"방금 저 앞 차에 우리 학원 애기 학부모님이 타고 계실지 우째 압니까. 만약에 제가 창문 내리고 욕했는데, 내일 학원에서 그 학부모님 마주치면... 어휴, 상상만 해도 아찔하네요. 그냥 참는 게 이기는 겁니다."
도운의 대답에 여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동네 장사'라는 특수성을 이유로 들었지만, 순간적인 분노 앞에서도 자신의 자리와 책임을 먼저 떠올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평소의 능글맞고 가벼운 모습 뒤에 자리 잡은 단단한 어른의 태도. 여주의 시선이 잠시 도운의 옆얼굴에 머물렀다.
"원장님."
"네."
"좀 멋있네요, 방금."
"네? 아, 쫌. 놀리지 마십쇼."
도운이 또 귀끝을 붉히며 시선을 앞 유리창으로 고정했다. 차 안에 감돌던 미세한 긴장감이 기분 좋은 온기로 바뀌어갔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춰 섰을 때, 여주가 슬쩍 뒷좌석 쪽을 돌아보았다. 뒷자리에는 커다란 심벌 가방과 악기 케이스들이 실려 있었다.
"오늘 홍대 다녀오셨다고 했죠? 공연하신 거예요?"
"아, 네. 아는 형님 밴드에서 드럼 세션 펑크가 났다고 급하게 헬프를 쳐서요. 낮에 애들 수업 싹 몰아서 해놓고 다녀오는 길입니다."
"원장님 진짜 바쁘게 사시네요. 학원 운영하는 것만 해도 벅차실 텐데, 세션까지 다녀오시고."
"피곤하긴 한데... 그래도 드럼은 계속 치고 싶어서요."
신호가 바뀌고 차가 다시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빗소리가 와이퍼 움직이는 소리와 섞여 일정한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학원에만 박혀서 애들만 가르치다 보면, 한 번씩 제가 드럼 치는 사람인지 그냥 장사하는 사람인지 헷갈릴 때가 있거든요. 게다가 무대 위에서 사람들하고 합 맞추고 쾅쾅 때릴 때 느끼는 그 맛이 있습니다. 그걸 고등학교 때 저희 동네 형들이랑 밴드 하면서 처음 알았는데, 아직도 그걸 못 끊네요."
도운의 목소리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 형님들이 지난번에 소개팅 대타 보내신 그분들이에요?"
"네. 영현이 형, 그리고 성진이 형이라고... 친형들보다 더 자주 보고 징그럽게 붙어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다들 각자 일하느라 바쁜데도 한 번씩 모여서 악기 만지면 옛날 생각도 나고 좋거든요."
도운이 슬쩍 고개를 돌려 여주를 바라보았다.
"사장님은요? 사장님은 왜 카페를 차리셨습니까? 혼자서 오픈부터 마감까지 다 하는 거, 그거 진짜 보통 체력 아니면 못 하는 거잖아요."
도운의 물음에 여주가 창창에 맺힌 빗방울들을 바라보며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음... 그냥, 내 공간, 내 속도를 갖고 싶었어요."
"내 속도요?"
"네. 회사 다닐 때는 남들이 정해놓은 시간표에 억지로 저를 끼워 맞춰야 했거든요. 근데 이 작은 카페 안에서는 온전히 제가 주인이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원두를 고르고, 제 손으로 커피를 내리고, 찾아오는 손님들한테 제 속도대로 온기를 전해주고. 몸은 좀 고되도 그게 참 좋더라고요."
여주의 담담한 고백에 도운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의 형태는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선택한 일과 공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책임감을 품고 있었다. 그 사실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한 뼘 더 좁혀주는 듯했다.
어느새 차가 여주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다 왔네요. 오늘 진짜 감사합니다. 원장님 아니었으면 저 오늘 카페에서 자야 했을지도 몰라요."
"에이, 뭘 또 카페에서 잡니까. 비 많이 오니까 조심해서 뛰어가십쇼."
여주가 우산을 펴고 차에서 내리려다, 잠시 멈칫하고는 도운을 돌아보았다.
"원장님도 조심히 가세요. 운전 얌전하게 잘하시는 건 알지만, 그래도 빗길이니까."
"네, 걱정 마십쇼. 내일 늦은 오후쯤에 커피 사러 또 갈게요."
도운이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주가 차 문을 닫고 오피스텔 현관으로 뛰어 들어가는 뒷모습을, 도운은 비상등을 켠 채 끝까지 지켜보았다. 여주가 무사히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도운의 차가 천천히 빗속으로 멀어졌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여주는, 묘하게 평소보다 조금 더 뛰는 것 같은 심장 부근을 가만히 손으로 짚어 보았다.
비 오는 밤, 따뜻했던 차 안의 온도와 옅게 배어있던 시원한 향기가 꽤 오래도록 코끝에 맴도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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