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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02

예의상 한 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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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 학원 연습실

며칠 후,

"그래서. 애프터는 언제 잡을 건데?"

"아니,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핸드폰은 왜 자꾸 울리고 난린데. 일 안 하나?"

도운은 어깨와 귀 사이에 휴대폰을 끼워 넣은 채, 드럼 스틱을 슥슥 닦으며 투덜거렸다. 수화기 너머의 영현은 낚시 1박 2일 풀코스 대접이라는 약속을 볼모로 잡고 며칠째 도운을 닦달하는 중이었다.

* 회장님이 어제 지나가면서 쓱 물어보시더라니까? '자네 대타로 나갔던 그 친구, 차는 한 번 더 마셨다던가?' 하고. 내 목줄이 지금 네 손에 달렸어, 윤도운.

"알았다니까요. 안 그래도 오늘 오후에 잠깐 보기로 했어요. 차 딱 한 잔 마시고, 인증샷이라도 찍어서 보내줄 테니까 그만 좀 볶으소, 진짜."

* 오, 오늘? 장소는 어딘데? 분위기 좋은 데지?

"그냥 평촌 쪽에 적당한 카페 알아봤습니다. 끊어요, 나 지금 방음벽 공사한 거 냄새 뺀다고 피톤치드 뿌려야 하니까."

도운이 서둘러 전화를 끊고 앓는 소리를 냈다. '예의상 한 번 더'라는 미션은 생각보다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물론 그날 만났던 여주라는 사람이 싫거나 불편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꽤 유쾌하고 대화가 잘 통하는 편이라 나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다만, 누군가의 등쌀에 떠밀려 억지로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피곤할 뿐이었다.

같은 시각 / 카페 마감 전

비슷한 시각, 여주 역시 앞치마를 벗어두며 깊은 한숨을 쉬고 있었다.

* 여주야, 진짜 미안해. 근데 나 오늘 팀장님한테 또 불려 갔었단 말이야. 회장님이 나만 보면 그 소개팅 어떻게 됐냐고 묻는다고...

"알아요, 언니. 오늘 보기로 했어. 딱 예의 바르게 커피 한 잔 마시고, 회장님 체면 쫙 살려드리고 올 테니까 걱정 마."

* 역시 우리 여주밖에 없다! 언니가 다음에 진짜 맛있는 거 사줄게!

전화를 끊은 여주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겼다. 지난번 레스토랑에서는 어쩌다 보니 한껏 차려입은 모양새가 되었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서로 대타라는 것도 알고, 어떤 로맨틱한 기대를 품고 나가는 자리도 아니었으니까. 여주는 편안한 니트에 청바지 차림으로 가볍게 카페를 나섰다.

예의상 한 번 더 / 평촌 베이커리 카페

약속 장소는 번화가에서 조금 벗어난, 조용하고 넓은 베이커리 카페였다. 도운이 먼저 도착해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늘어지는 후드티 대신 깔끔한 셔츠에 가디건을 걸친 편안한 차림이었다.

"일찍 오셨네요."

여주가 다가와 인사를 건네자, 멍하니 창밖을 보던 도운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네. 방금 왔습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고생은요. 며칠 만이네요, 대타님."

여주의 장난스러운 호칭에 도운의 입가에도 편안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게요. 그동안 닦달 좀 당하셨습니까?"

"말도 마세요. 저희 선배가 어찌나 볶아대는지. 커피 마시는 거 인증샷이라도 찍어서 보내야 할 판이에요."

본문 삽화

"어? 우리 쪽 형도 똑같은 소리 하던데. 진짜 한 장 찍어서 공유하실랍니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자마자 지난 며칠간 겪었던 주선자들의 압박을 안주 삼아 한바탕 웃었다. 긴장감이 감돌았던 첫 만남과는 공기부터가 달랐다. '회장님 체면 살리기'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진 동지애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커피는 제가 살게요. 지난번엔 회장님이 다 내고 가셨잖아요."

여주가 지갑을 꺼내며 말하자 도운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어차피 이따가 영현이... 아, 영현이 형한테 영수증 청구할 거거든요."

"아, 그런 깊은 뜻이. 그럼 감사히 얻어먹겠습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과 가벼운 조각 케이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화가 이어졌다. 무거운 목적이 사라진 자리는 생각보다 훨씬 편안했다. 두 사람 다 각자의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는 '자영업자의 고충'으로 흘러갔다.

"어제는 알바생이 갑자기 당일에 아프다고 펑크를 내서, 저 혼자 오픈부터 마감까지 꼬박 서 있었잖아요. 진짜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어요."

여주가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도운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아이고, 그거 진짜 막막하죠. 저도 혼자 학원 보는데, 가끔 드럼 페달 고장 나고 스피커 찢어지고 하면 진짜 멘붕 옵니다. 게다가 요즘은 입시반 애들 실기 기간이라 제가 더 예민해져 가지고. 며칠 전에 방음벽 공사까지 새로 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와, 원장님도 고생 많으시네요."

"그래도 뭐, 애들 드럼 치면서 스트레스 푸는 거 보면 또 기분 좋고 그렇습니다. 사장님도 손님들이 커피 맛있다고 하면 피로가 싹 풀리고 그러지 않습니까."

"맞아요. 그 맛에 장사하죠."

서로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쯤 되면 '예의상 한 번 더'라는 미션은 차고 넘치게 달성한 셈이었다.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타이밍을 재던 여주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희 진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네요. 지난번엔 여의도에서 보고, 오늘은 안양에서 보고. 원장님 학원은 어느 쪽에 있으세요? 출퇴근하시기 안 멀어요?"

"아, 저는 평촌 학원가 쪽에 있습니다. 집이랑 가까워서 걸어 다니거든요. 그 소방서 뒤쪽 블록에 윤 드럼학원이라고..."

도운의 대답에 여주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커피를 마시려던 동작 그대로 굳어버린 여주가 도운을 빤히 쳐다보았다.

"네? 소방서 뒤쪽이요?"

"네. 왜요? 혹시 아십니까?"

"헐... 저 거기 아는데. 혹시 그 건물 1층에 파란색 간판 세탁소 있는 곳 아니에요?"

"맞습니다! 어? 그걸 어떻게 아시지."

여주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이마를 짚었다.

"원장님, 저 그 세탁소에서 모퉁이 하나만 돌면 나오는 노란 간판 카페 사장이에요."

"...예?!"

이번엔 도운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도운은 머릿속으로 학원에서부터 그 '노란 간판 카페'까지의 동선을 그려보았다.

"아니... 거기 우리 학원에서 걸어서 한 3분? 아니, 뛰면 1분 컷인데? 저 그 앞 맨날 지나가는데요?"

"저도요! 저 학원가 쪽에 밥 먹으러 갈 때 맨날 그 골목 지나가거든요. 윤 드럼학원 간판도 본 적 있어요. 3층 맞죠?"

"와... 세상 진짜 좁네. 진짜 등잔 밑이 어둡네요."

도운의 말에 여주가 큭큭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도운 역시 이 기막힌 우연이 꽤나 유쾌하게 느껴졌다.

"아니,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사람들끼리 첫날엔 여의도까지 가서 스테이크를 썰고, 오늘은 여기까지 나와서 커피를 마신 거네요?"

여주의 말에 도운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보탰다.

"그러게 말입니다. 동네 마실 나오듯이 슬리퍼 끌고 만나도 될 거리였는데."

두 사람은 어처구니없는 이 상황이 퍽 재미있는 듯 한참을 웃었다. '소개팅 상대'라는 어색한 프레임은 완전히 깨져버렸다. 그 자리에 남은 건 '우연히 알게 된 아주 가까운 동네 이웃'이라는 편안한 타이틀이었다.

"그럼 우리, 미션은 이걸로 완벽하게 클리어한 걸로 하죠. 선배한테는 아주 잘 만나고 왔다고 할게요."

여주가 잔에 남은 커피를 비우며 산뜻하게 말했다. 도운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영현이 형한테 그렇게 보고하겠습니다. 회장님 귀에도 무사히 들어가겠죠."

카페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돌아가는 길도, 도착해야 할 목적지도 같았다. 나란히 걷는 발걸음이 첫 만남 때보다 훨씬 가벼웠다.

"원장님, 저희 진짜 가까우니까 오가다 마주치면 모른 척하지 마세요. 동네 주민끼리 인사나 하고 지내요."

"당연하죠. 사장님 카페에 커피 마시러 가도 됩니까? 맨날 프랜차이즈 커피만 마셨는데."

"아유, 환영이죠. 원장님 오시면 제가 특별히 샷 추가 무료로 해드릴게요."

"오, 진짜요? 그럼 사장님 나중에 스트레스받아서 드럼 치러 오시면, 제가 입시반 애들 쓰는 좋은 스틱 공짜로 하나 드리겠습니다."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두 사람에게 익숙한 학원가 사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도운의 드럼 학원 간판과, 그 모퉁이를 돌면 있을 여주의 카페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늘 즐거웠어요."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여주가 먼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도운 역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편안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네, 사장님도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또 뵙겠습니다."

도운은 횡단보도를 건너 노란색 간판이 있는 골목 쪽으로 사라지는 여주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억지로 밀려 나와 예의상 만났던 관계는 오늘로 끝이 났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앞으로 저 골목을 지날 때마다 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노란색 간판을 한 번씩 쳐다보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 영현이 형한테 청구할 영수증 안 받았네."

도운은 빈손을 내려다보며 뒤늦게 중얼거렸지만, 굳이 다시 돌아가진 않았다. 그냥 낚시 가서 형 지갑을 털면 그만이었다. 기분 좋은 봄바람이 부는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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