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럼 학원 / 퇴근 직전
쿵, 치, 따, 쿵, 치, 따.
방음벽재로 꼼꼼하게 둘러싸인 드럼 학원 연습실 안. 일정한 템포로 떨어지는 메트로놈 소리에 맞춰 스틱이 가볍게 허공을 갈랐다. 윤도운은 팔짱을 낀 채, 제법 진지한 얼굴로 입시반 학생의 자세를 살폈다.
"어깨에 힘 더 빼고. 하이햇은 쪼매 더 세게 쳐도 된다."
스무 살 무렵부터 줄곧 쥐어온 스틱이지만, 남을 가르치는 일은 또 다른 근육을 쓰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꽤 적성에 맞았다. 드럼 학원 원장이라는 직함이 이젠 제법 자연스럽게 몸에 익었다.
"원장님, 저 오늘 폼 좀 괜찮지 않아요?"
"어, 오늘 좀 친다. 근데 방금 필인 들어갈 때 박자 살짝 밀린 거 알제? 그것만 신경 써서 한 번만 더 돌려보자."
입시반 에이스 녀석이 씩 웃으며 다시 스틱을 고쳐 쥐었다. 도운은 녀석의 등 뒤에 서서 고개를 까딱이며 박자를 타주었다. 드럼 의자에 앉아 땀 흘리는 학생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꽉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하루였다.
저녁 7시. 마지막 수강생까지 배웅하고 난 뒤, 도운은 학원 문을 잠그기 위해 열쇠를 꺼냈다. 슬슬 문 닫고 집에 가서 씻고, 시원한 맥주나 한 캔 깔 참이었다. 완벽한 퇴근길 시나리오였다.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전까지는.
지잉- 지이잉-
액정에 뜬 이름은 [강영현]. 도운은 습관적으로 미간을 살짝 좁히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형."
* 도운아!! 내 동생 도운아!! 문 닫았나? 안 닫았지? 형 지금 택시에서 내렸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영현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다급했다.
"네? 학원 앞이라고요? 내 이제 퇴근할 건데?"
* 딱 3분만! 아니 1분만 기다려! 형 지금 죽게 생겨서 그래!
도운은 한숨을 푹 쉬며 이마를 짚었다. 저 형이 저렇게 다급하게, 그것도 퇴근길에 안양까지 택시를 타고 날아왔다는 건 진짜로 본인이 수습할 수 없는 사고를 쳤거나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 처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잠시 후, 말끔하게 수트를 빼입은 영현이 학원 유리문을 열고 거의 울상인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살았다, 아직 안 갔네. 아,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아, 숨 막힌다. 좀 떨어져서 말해라. 무슨 일인데 여기까지 튀어오노, 아니 날아왔나."
도운이 질색하며 한걸음 물러서자, 영현이 주변을 힐끗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너, 내일 저녁에 나 대신 소개팅 좀 나가라."
"...뭐라노? 미쳤나 진짜."
도운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험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영현은 도운의 어깨를 꽉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쏘아보냈다. 평소의 그 차갑고 이지적인 '강영현 대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위기에 처한 동네 바보 형 같았다.
"우리 회사 회장님이 직접 주선하신 자리야. 나름 회사에서 나 좋게 보시고 신경 써서 마련해주신 자리라고."
"근데 그걸 왜 내가 나가는데? 형이 나가면 되잖아."
"나 지연이랑 드디어 사귀기로 했다."
아. 도운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지연. 영현과 무려 20년이나 친구로 지내다 최근 들어 묘한 기류를 풍기던, 도운도 잘 아는 그 누나였다.
"아니, 그럼 회장님한테 사실대로 말을 하든가. 만나는 사람 생겼다고."
"말했지! 안 그래도 회장님이 나 아직 혼자인 줄 알고 계속 자리 마련하시려는 거 미루고 미루다 이번엔 진짜 쐐기를 박으셨거든. 근데 내가 방금, 진짜 며칠 전에 지연이랑 마음 확인했단 말이야. 이제 막 사귀기 시작했는데 소개팅 나가는 건 진짜 미친 짓이잖아. 그래서 오늘 오후에 겨우 타이밍 잡고 말씀드렸어. 그랬더니 회장님이 '허허, 그런 건 진작 말해야지' 하시면서도 묘하게 서운해하시는 거 있지. 그래서 내가, 나보다 훨씬 멋있고 성실하고 인물 좋은 놈으로 내일 대타 꼭 보내겠다고 뻥뻥 쳐놨지."
"그게 나라고?"
"어. 너."
영현이 도운의 어깨를 토닥이며 씩 웃었다. 도운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흘렸다.
"아, 진짜 곤란한데... 상대방 분은 무슨 죄고. 나와봤는데 강영현이 아니고 웬 드럼 치는 윤도운이 앉아있으면."
"그래서 회장님이 상대쪽에도 언질은 주셨대. 내가 못 나가서 대신 다른 사람 나간다고. 그러니까 너는 내일 그냥 밥만 맛있게 먹고, 예의 바르게 차 한 잔 마시고 오면 돼. 어? 내가 진짜 이번 주말에 너랑 낚시 가줄게. 형이 낚시터도 예약하고, 떡밥도 다 준비할게. 밤낚시 1박 2일 콜?"
순간 도운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맨날 낚시 좀 같이 가자고 조르면 비린내 난다고 질색을 하던 형들이었다. 그런데 밤낚시 1박 2일에 풀코스 대접이라니. 도운은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영현은 도운의 손에 고급 레스토랑의 이름이 적힌 메모지를 쥐여주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쌩하니 다시 택시를 잡으러 뛰어나갔다.
"아... 진짜 저 형을 어쩌면 좋노."
다음 날 저녁 / 여의도 이탈리안 레스토랑
다음 날 저녁.
도운이 안내받은 곳은 은은한 조명과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는, 꽤나 프라이빗한 분위기의 여의도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창가 쪽 테이블에 앉은 도운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뻘쭘하네 진짜...'

나이 차이 나는 형들 사이에서 막내 노릇 하는 건 익숙했지만, 이런 격식 있는 자리에서, 그것도 모르는 사람과 단둘이 마주 앉아야 한다는 건 도운의 적성에 영 맞지 않았다. 다행히 하루 전날 미리 언질을 받은 덕에 평소의 헐렁한 후드티 차림은 면할 수 있었다. 깔끔한 니트에 면바지, 단정한 코트. 뭐,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문전박대당할 차림은 아니지 싶었다.
속으로 영현을 세 번쯤 원망하고 있을 무렵, 또각거리는 구두 발소리가 테이블 가까이에서 멈췄다.
"저기..."
도운이 고개를 들었다. 약간 웨이브 진 머리를 자연스럽게 묶고, 차분한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도운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그녀의 약간 피곤해 보이면서도 다부진 눈매였다.
"아, 네. 앉으세요."
도운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했다. 여자, 여주 역시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투명하고도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도운은 물 잔만 만지작거렸고, 여주는 메뉴판을 보는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이거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하나.'
도운이 속으로 수만 가지 오프닝 멘트를 시뮬레이션하고 있을 때였다. 적어도 상대방은 영현이 나온다고 기대하고 나왔을 텐데, 대타가 나왔으니 실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상황 설명부터 제대로 하고 사과하는 게 맞겠다 싶었다. 도운이 먼저 입을 뗐다.
"저기요."
"저기."
하필 타이밍이 겹쳤다. 두 사람은 놀란 듯 서로를 쳐다보다가 동시에 웃어버렸다.
"아, 먼저 말씀하세요."
도운이 손을 내밀며 양보했다. 여주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테이블 위로 두 손을 모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제가 원래 이 자리에 나오기로 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아는 언니가, 아니 선배가 회장님 주선이라 잡힌 자리인데... 상대방 분께는 너무 죄송하지만 제가 대타로 나왔습니다. 기분 상하셨다면 정말 죄송해요."
여주의 입에서 나온 말은 도운의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도운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제 얼굴에 번지는 실소를 숨기지 못하고 큭큭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긴장해서 굳어 있던 어깨가 한순간에 탁 풀렸다.
여주가 당황한 얼굴로 도운을 쳐다보았다.
"저, 왜 웃으시는지..."
"아, 죄송합니다. 그게 아이라..."
도운은 웃음을 참느라 귀끝이 살짝 붉어진 채로 대답했다.
"사실 저도 대타거든요."
"네?"
이번엔 여주의 눈이 커졌다.
"저한테 나오라고 부탁한 형도 회장님 주선이라 거절은 못 했는데,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소개팅 나가는 건 도저히 못 할 짓이라면서 저를 이리로 밀어 넣었거든요. 저는 나오시는 분이 대타인 줄도 모르고, 강영현 대신 웬 시커먼 놈이 나와서 실망하셨을까 봐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도운의 솔직한 고백에, 여주 역시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테이블에 얼굴을 묻을 듯이 엎드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색하고 무거웠던 공기가 순식간에 휘발되어 날아갔다.
"와... 진짜요? 저희 언니도 사실 마음에 둔 사람이 따로 있거든요. 근데 회장님 주선이라 차마 거절을 못 하고 끙끙 앓다가, 당일인 오늘 아침에 도저히 양심에 찔려서 못 나가겠다고 회장님한테 고해성사를 했대요. 회장님 체면은 살려야 하니까 저보고 얼굴만 비추고 오라고 사정사정을 해서..."
"저희 쪽 형도 똑같습니다. 회장님 체면 살려야 한다고, 저보고 밥만 먹고 싹싹하게 굴다 오라고."
서로의 처지가 완전히 똑같다는 걸 확인하자, 알 수 없는 묘한 동질감이 싹텄다. 이 자리는 더 이상 부담스러운 소개팅이 아니었다. 그저 곤란한 지인들 때문에 억지로 끌려나온 두 '피해자'의 위로 파티에 가까웠다.
"다행이네요. 저 진짜 오기 전까지 엄청 부담스러웠거든요. 처음 뵙는 분한테 대타라고 어떻게 말해야 하나 싶어서요."
"저도요. 아, 말 놓으시죠, 아니, 편하게 하시죠. 아, 제가 말을 좀... 편하게 듣겠습니다."
도운이 특유의 억양과 함께 살짝 꼬인 말을 내뱉자 여주가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그럼 우리, 이왕 나온 거 밥이나 편하게 맛있게 먹고 가요. 밥값은 그쪽 형님이나 저희 언니가 내겠죠, 뭐."
"당연하죠. 제일 비싼 걸로 시켜도 무죄입니다, 오늘."
두 사람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메뉴판을 펼쳤다. 방금 전까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요리 이름들이 이제야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도운은 여주에게 메뉴 선택권을 넘겼고, 여주는 익숙하게 코스 요리 두 개를 주문했다.
식전 빵이 나오고 가벼운 대화가 이어졌다. 소개팅 특유의 '호구조사'가 아니라, 일상적인 불평불만에 가까웠다.
"원래 그 선배가 그런 식이에요. 자기가 벌려놓고 수습은 맨날 제가 하고."
여주가 버터를 바르며 툴툴거리자 도운이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 형도 똑같습니다. 일할 때는 안 그러면서, 꼭 사적인 일은 막내인 저한테 떠넘기고... 아, 저는 드럼 칩니다. 학원 하나 하고 있고요."
"아, 진짜요? 어쩐지 손가락에 굳은살이 있으시길래 운동하시나 했어요. 저는 카페 해요."
서로의 직업을 덤덤하게 교환하며 웃고 떠드는 사이, 메인 요리인 한우 안심 스테이크가 서빙되었다. 직원이 정중하게 접시를 내려놓고 돌아가자, 도운은 커다란 백색 접시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주먹 반만 한 고기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이거... 접시는 이만~한데 고기는 콩알만 하네요."
"원래 파인 다이닝이 좀 그렇죠."
"이런 게 그건가, 미백의 여... 아니, 여백의 미."
도운이 진지한 얼굴로 나이프를 들며 중얼거렸다. 여주가 물을 마시려다 말고 풉, 하고 사레가 들렸다.
"미백의 여요...?"
"아... 말이 헛나왔습니다. 제가 가끔 이럽니다."
도운은 스스로의 말실수를 깨닫고는 순식간에 귀부터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평소 친한 형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텐데, 처음 보는 여주 앞이라니 속으로 이불을 수백 번은 찼다. 여주는 냅킨으로 입가를 가린 채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을 웃었다.
"원장님, 되게 재밌으신 분이네요."
"놀리지 마십시오... 진짜 쥐구멍에 숨고 싶으니까."
"안 놀려요. 덕분에 긴장 다 풀렸어요."
여주의 말에 도운도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둘이 고기를 썰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음, 분위기가 나쁘지 않구먼."
갑자기 들려온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에 두 사람의 움직임이 동시에 멈췄다. 테이블 옆에는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게 빗어 넘긴 백발에, 고급스러운 캐시미어 코트를 걸친 노신사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도운과 여주는 직감적으로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회장님.'
두 사람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회장님은 손을 휘휘 저으며 제지했다.
"됐네, 됐어. 앉아들 있어. 근처에서 저녁 약속이 있어서 왔다가, 혹시나 해서 들러봤지."
회장님은 도운과 여주를 번갈아 보며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그 짧은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엄청난 위기감이 스쳤다. 양쪽 다 대타로 나온 사실을 들키면 주선자인 회장님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터였다.
"저기, 회장님. 그게요..."
도운이 영현을 대신해 변명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회장님이 먼저 선수를 쳤다.
"강 대리 놈이 드디어 만나는 사람이 생겼다고 소개팅 전날인 어제 급하게 연락을 주질 않나, 김 팀장 쪽에서도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서 도저히 못 나오겠다고 당일인 오늘 아침에 펑크를 내질 않나. 내가 아주 어이가 없어서 한소리 하려다가 참았네."
도운과 여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미 다 알고 오신 거였다.
"내가 중매를 서겠다고 판을 깔았는데, 양쪽 다 대타를 보냈다니 처음엔 좀 괘씸하고 황당하더군. 체면도 좀 안 서고 말이야. 그래서 이 자식들, 대타로 누굴 내보냈나 궁금해서 쓱 와봤더니..."
회장님은 굳어있는 두 사람의 얼굴과, 절반쯤 비워진 스테이크 접시, 그리고 방금 전까지 두 사람이 웃고 떠들던 편안한 공기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매서운 눈빛과는 다르게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막상 와서 보니 둘이 생각보다 꽤 잘 어울려 보이네. 아까 보니까 재밌게들 웃고 있던데."
"아, 네... 그게..."
여주가 어색하게 대답하며 도운의 눈치를 살폈다. 도운 역시 어정쩡하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회장님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말했다.
"어찌 됐든, 내가 판을 깔았고 자네들도 시간 내서 나왔으니 이렇게 한 번 밥 먹고 끝내면 내 체면이 좀 그렇네. 기왕 이렇게 된 거, 다음번에 예의상 차 한 번은 더 보게. 내가 만든 자리인데 한 번만 보고 끝나는 건 싫으니까."
회장님의 말은 명령조가 아니라, 은근한 부탁이자 본인의 체면치레에 가까웠다.
"그 뒤로는 뭐, 젊은 사람들 마음이지. 내가 더 간섭할 생각은 없네. 밥값은 내가 계산하고 갈 테니, 마저들 편하게 먹게나."
회장님은 껄껄 웃으며 돌아서더니, 웨이터를 향해 손짓하며 계산대로 향했다. 회장님의 뒷모습이 레스토랑 문밖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도운과 여주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가... 가셨네요."
도운이 넥타이도 매지 않은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게요. 엄청 무서운 분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유쾌하시네요."
여주도 긴장이 풀렸는지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았다.
"그나저나 큰일 났네요."
도운의 말에 여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왜요?"
"회장님이 '차 한 번은 더 보라'고 미션 주고 가셨잖아요. 형들한테 확인까지 할 기세던데."
도운이 난처하다는 듯 턱을 긁적였다. 여주는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뭐, 어때요. 진짜로 연애하라고 강요하신 것도 아니고, 그냥 예의상 한 번 더 보라는 거잖아요. 체면 살려드리게."
"그... 렇죠? 그냥 차 한 잔 마시면 되는 거니까."
도운은 여주의 쿨한 반응에 내심 안도했다. 불편한 사이로 억지로 다시 만나야 했다면 거절할 핑계를 찾았겠지만, 오늘 한 시간 남짓 대화해 본 이 카페 사장님은 생각보다 대화가 잘 통하고 편안했다. 말실수를 해도 웃어넘겨 줄 만큼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그럼 우리, 조만간 진짜 예의상 차 한 잔만 더 해요. 제가 살게요."
여주가 먼저 제안했다.
"아닙니다. 제가 미백... 아니, 여백의 미도 보여드렸는데 차는 제가 사야죠."
도운이 또다시 귀를 붉히며 농담을 던지자, 여주가 소리 내어 웃었다.
"좋아요. 그럼 조만간 시간 맞춰봐요, 대타님."
"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대타님."
레스토랑을 나서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처음에 들어올 때와 달리 무척이나 가벼웠다. 억지로 밀려 나온 대타 소개팅이었지만, 기분 나쁜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공유한 비밀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
도운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여주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생각보다, 아주 꼬인 날은 아니었다고.
그리고 영현이 형한테는, 이번 주말 낚시 때 미끼 끼우는 것부터 회 뜨는 것까지 전부 다 시켜 먹어야겠다고 다짐하며, 도운 역시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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