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y My DayFICTION
‹ 대타연애 · 회차 목록
EPISODE 19

들켰다, 그냥 사귀는 걸로

댓글

스릴 넘치는 동네 비밀 연애의 법칙 제1조.

해가 떠 있는 동안, 상가 근처 반경 100미터 이내에서는 절대 서로 아는 척하지 말 것.

하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꼬리가 길면 언젠가는 밟히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 꼬리를 살랑거리며 주체하지 못하는 대형견 한 마리가 있다면 더더욱.

금요일 밤 10시 30분.

평일의 피로가 잔뜩 쌓인 늦은 퇴근길이었지만, 여주의 오피스텔로 향하는 어두운 골목길을 걷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아, 진짜. 윤도운 오늘 숨 막혀서 죽는 줄 알았다."

도운이 여주의 손을 제 외투 주머니에 감춘 채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요. 오늘 뭐 힘든 일 있었어?"

"힘든 일은 무슨. 낮에 사장... 아니, 여주 네가 내 커피 주면서 '영수증 필요하십니까, 손님' 하는데, 진짜 서운해서 눈물 찔끔 날 뻔했다 아이가. 눈빛은 완전 북극 얼음장이더만."

도운의 앓는 소리에 여주가 큭큭거리며 어깨를 흔들었다.

"아까는 뒤에 우리 카페 단골 모임 아주머니들 쫙 서 계셨잖아. 거기서 내가 오빠한테 윙크라도 해? 동네 맘카페에 당장 소문날걸? '그 카페 아가씨랑 드럼 총각 눈 맞았다'고."

"나면 좀 어떻노. 내가 뭐 죄지었나. 건강하고 건실한 청년이 연애 좀 하겠다는데."

도운이 툴툴거리면서도, 주머니 속에서 여주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은 한없이 다정했다. 낮 동안 꾹꾹 눌러 참았던 스킨십의 한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 도운은 걸음을 멈추고 여주의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 주었다.

"그래도 밤 되니까 살 것 같네. 낮에는 쳐다보지도 못하는데."

도운이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여주를 내려다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비친 도운의 얼굴이 퍽 잘생겨서, 여주도 저도 모르게 까치발을 들고 도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진짜 윤 원장님 투정은 알아줘야 해. 귀여우니까 봐준다."

"자꾸 귀엽다 하지 말라니까..."

도운이 짐짓 발끈하는 척하며 여주의 허리를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거리가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도운이 여주의 입술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이던, 바로 그 찰나였다.

"어이구? 윤 원장님?"

골목 어귀에서 들려온 익숙하고도 경쾌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

"......!!!"

도운과 여주는 마치 감전이라도 된 사람처럼 0.1초 만에 서로를 확 밀쳐내며 떨어졌다. 스프링처럼 튀어 나간 여주는 하마터면 전봇대에 머리를 박을 뻔했고, 도운은 헛기침을 하며 하늘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목줄을 꿴 웰시코기 한 마리와 함께 밤 산책을 나온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도운의 학원 건물 1층에 있는, [파란 간판 세탁소]의 사장님이었다.

이 동네에서 10년 넘게 세탁소를 운영하며, 학원가 상인회의 회장이자 동네의 모든 소식통을 꽉 쥐고 있는 인간 '안양 9시 뉴스' 그 자체.

"세, 세탁소 사장님...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도운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경련하며 인사했다. 여주 역시 사색이 된 얼굴로 90도 배꼽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세탁소 사장님은 산책줄을 손에 단단히 쥔 채, 흠칫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방금 전까지 도운의 코트 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여주의 손과, 붉게 달아오른 도운의 귀끝에 정확히 머물렀다.

"허허, 우리 똘이 밤 산책시키고 들어가는 길인데. 훤칠한 총각이 서 있길래 누군가 했더니 윤 원장님이네. 근데 그 옆에는..."

사장님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손뼉을 짝 쳤다.

"어이구, 노란 간판 카페 사장님 아니여? 두 사람이 이렇게 늦은 밤에 으슥한 골목엔 어쩐 일로 같이 있어? 방금 보니까 아주 딱 붙어있던데."

여주의 심장이 쿵, 하고 발밑으로 떨어졌다. 머릿속으로 내일 아침 동네 맘카페와 상인회 단체 톡방에 올라갈 기사 제목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 어떡해. 뭐라고 변명하지? 우연히 만났다고 할까? 아니면 배달이 꼬여서 사과하러 왔다고 할까?'

여주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변명거리를 찾느라 입술만 달싹이고 있을 때였다.

세탁소 사장님이 사람 좋은 웃음을 허허, 터뜨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아유, 됐어, 됐어. 젊은 남녀가 밤에 손 좀 잡고 다닐 수도 있지. 내가 또 눈치는 백단이여. 둘이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됐어? 동네에서 아주 선남선녀가 눈이 맞았구먼!"

"아, 그게, 사장님..."

"걱정덜 말어. 나 입 무거운 거 알지? 상인회 사람들한텐 비밀로 해줄 테니까. 대신 나중에 우리 세탁소 오면 원장님이 커피 한 잔 쏴. 똘이야, 가자! 데이트 방해하지 말고!"

세탁소 사장님은 윙크까지 찡긋 날려주고는 웰시코기와 함께 유유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사장님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골목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았다. 찬 바람이 휭 불고 지나갔다.

"......오빠."

"......어."

여주가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끝났어. 세탁소 사장님 입 무겁다는 거, 올해 들은 거짓말 중에 일등인 거 알지. 내일 점심시간이면 상가 건물 1층부터 꼭대기 층까지 소문 다 날걸?"

"하아..."

여주가 얼굴을 감싸 쥐며 절망했다.

동네 장사하는 사람들끼리 연애한다는 게 소문나면, 손님들이 올 때마다 한마디씩 얹을 게 뻔했다. '원장님 연애하신다면서요?', '카페 사장님이랑 만난다며?'

조용하고 평화로웠던 일상이 순식간에 동네의 가십거리로 전락할 위기였다.

"어떡해. 오빠 학원 학부모님들 귀에도 들어가면..."

여주가 발동동 구르며 도운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 낮까지만 해도 학부모들을 상대하느라 원장 체면을 끔찍하게 챙기던 도운이 아니던가. 도운 역시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데.

도운은 허전해진 외투 주머니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이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어찌 된 일인지, 방금 전까지 하얗게 질려있던 도운의 얼굴에 아주 편안하고 시원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본문 삽화

도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여주에게 다가가 아까 세탁소 사장님에게 들키기 직전처럼 여주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제 외투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오, 오빠?"

"차라리 잘 됐네."

도운의 담담한 한마디에 여주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내가 며칠 전부터 속으로 벼르고 있었거든. 밤에만 오빠 노릇 하는 거, 진짜 감질나서 못 해 먹겠다고."

"무슨 소리야. 소문나면 오빠 학원..."

"소문나면 뭐 우짤 낀데. 내가 뭐 도둑질을 했나, 바람을 피웠나."

도운이 특유의 부산 억양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씩씩하게 말했다. 평소 뚝딱거리던 귀여운 남자친구가 아니라, 얼마 전 학부모를 상대할 때 보여줬던 그 단단하고 책임감 있는 '어른'의 얼굴이었다.

"동네방네 소문 다 나면 오히려 땡큐지. 이제 저기 앞건물 대리 같은 놈들이 사장님 예쁘다면서 찝쩍거릴 일도 없을 끼고. 나도 3시 땡 치면 눈치 안 보고 당당하게 커피 사러 갈 수 있고."

도운은 주머니 속에서 여주의 손을 꽉 쥐며, 여주를 안심시키듯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상인회 사람들이 물어보면 내가 다 방어할게. '드럼 원장이 노란 카페 사장님 너무 좋아서 쫓아다니다가 겨우 사귀게 된 거니까, 우리 사장님 일하시는데 놀리지 마십쇼' 하고 딱 쉴드 칠 테니까."

"오빠..."

"그러니까 여주 너는 아무 걱정 말고, 내일도 탬핑 꼼꼼하게 해서 샷이나 팍팍 내려도. 나 내일부턴 점심시간에 숨지도 않고 정문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갈 거니까."

도운의 단단하고 든든한 직진에, 여주의 귓가에서 윙윙거리던 불안한 소음들이 순식간에 싹 가라앉았다.

어쩌면 세탁소 사장님에게 들킨 건 위기가 아니라, 그동안 3분 거리라는 핑계 뒤에 숨어있던 두 사람을 밝은 양지로 끌어내 준 완벽한 타이밍이었을지도 모른다.

여주는 긴장이 풀린 듯 바람 빠진 소리로 웃으며, 도운의 주머니 안에서 그의 손을 꽉 마주 잡았다.

"진짜지? 내일 학부모님들이 물어봐도 절대 당황하지 않기야."

"당연하제. 내가 명색이 윤도운인데."

도운이 여주의 코끝을 가볍게 톡 치며 윙크를 날렸다.

"자, 이제 방해꾼도 갔으니까. 아까 하던 거 마저 할까?"

도운이 능글맞게 웃으며 다시 고개를 숙여왔다. 이번에는 여주도 피하지 않고, 까치발을 들어 도운의 입술에 아주 가볍고 경쾌하게 입을 맞췄다.

내일 아침이면 동네 전체가 떠들썩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여주의 곁에는, 그 어떤 소문과 시선 앞에서도 단단하게 자신의 손을 잡아줄 든든한 내 편이 서 있었다.

비밀 연애의 스릴은 끝났지만, 이제 진짜 세상 밖으로 나온 '동네 연애'의 달콤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회차의 댓글

이름과 비밀번호로 남기는 감상. 수정하거나 삭제할 때 같은 비밀번호가 필요해요.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이름과 댓글은 공개됩니다. 비밀번호는 다른 곳에서 쓰는 것과 다르게 정해 주세요.

기존 소설 화면으로 보기 ↗

이야기 속 내 이름

한글 이름을 입력하면 조사가 함께 바뀝니다. 이 기기에만 저장돼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