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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0

처음 자리, 마지막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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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소 사장님발(發) 열애설이 온 동네를 휩쓸고 지나간 지 한 달.

다행히 두 사람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처음 며칠간은 커피를 사러 온 단골손님들이나 학부모님들의 짓궂은 축하 인사에 얼굴을 붉혀야 했지만, 도운이 워낙 넉살 좋고 단단하게 방어막을 친 덕에 금세 평화로운 동네 연애로 자리 잡았다.

오히려 눈치 볼 것 없이 당당하게 점심시간에 같이 밥을 먹고, 오후 3시엔 보란 듯이 손을 잡고 카페 문을 여는 짜릿한 일상이 이어지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운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강영현]이었다.

"예, 형. 웬일입니까."

* 윤도운! 너희 동네에 소문 다 났다며! 그걸 왜 내가 우리 회사 회장님 입을 통해서 들어야 하는데!

도운이 흠칫 놀라 휴대폰을 귀에서 살짝 떼어냈다.

"예? 아니, 우리 동네 세탁소 사장님 입방정이 어떻게 회장님 귀까지... 아, 설마."

* 그래! 회장님이 저번 주말에 너희 학원가 쪽에서 모임 있으셨다가, 그 세탁소 사장님이랑 마주치셨단다. 두 분 골프 모임 아는 사이시라며! 거기서 '윤 원장이랑 카페 사장 연애하는 거 아시냐'고 들으셨대!

안양 9시 뉴스 세탁소의 인맥은 도운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 아무튼, 회장님이 엄청 흡족해하시면서 내일 저녁에 무조건 시간 빼란다. 자기가 맺어준 1호 대타 커플이라고, 제대로 밥 한 끼 사시겠다고. 야, 너희 첫날 만났던 거기 여의도 레스토랑으로 예약 잡아두셨어!

다음 날 저녁.

도운과 여주는 나란히 여의도의 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 앞에 서 있었다.

"와, 기분 진짜 이상하다."

여주가 레스토랑의 화려한 샹들리에를 올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오늘 여주는 오랜만에 앞치마를 벗고 첫 만남 때처럼 차분한 베이지색 코트를 걸쳤고, 도운 역시 슬리퍼가 아닌 말끔한 셔츠와 슬랙스 차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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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내 오늘 슬리퍼 끌고 올라다가 꾹 참았다 아이가."

"회장님 앞에서 슬리퍼 질질 끌고 오면 내가 모르는 사람인 척할 뻔했네."

도운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여주의 손을 자연스럽게 깍지 껴 잡았다. 처음 이 문을 열고 들어갈 때는 생판 모르는 남이었고, 서로가 대타라는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잔뜩 얼어있었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의 맞잡은 손에는 그 어떤 긴장감도 없었다.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안쪽 프라이빗 룸으로 들어가자, 백발의 회장님이 이미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오, 왔구먼! 어서들 와서 앉아."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운과 여주가 나란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회장님은 두 사람의 깍지 낀 손을 슬쩍 보고는 껄껄 웃었다.

"내가 살다 살다, 양쪽 다 대타를 내보낸 소개팅에서 진짜 인연이 탄생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 강 대리한테 소식 듣고 내가 어찌나 기가 막히고 흐뭇하던지."

"다 회장님께서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신 덕분입니다. 그때 예의상 한 번 더 만나라고 안 하셨으면, 이렇게까지 안 이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도운이 넉살 좋게 너스레를 떨자, 회장님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내 안목이 틀린 적이 없거든. 그때 처음 쓱 봤을 때부터, 둘이 아주 그림이 좋았어. 동네도 코앞이라며?"

"네, 회장님.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 매일 봅니다."

여주도 싹싹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첫 만남 때는 회장님의 등장에 사색이 되어 변명거리를 찾기 바빴던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여유롭고 편안하게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곧이어 코스 요리가 서빙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처음 만난 날 두 사람을 빵 터뜨리게 만들었던 대망의 '한우 안심 스테이크'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커다란 백색 접시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주먹 반만 한 고기.

도운과 여주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도운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여주를 향해 아주 작게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여백의 미.'

"푸흡!"

여주가 하마터면 마시던 와인을 뿜을 뻔하며 급하게 냅킨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식탁 아래로 여주의 구두 앞코가 도운의 정강이를 툭, 걷어찼다. 도운은 정강이를 걷어차이면서도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었다.

"음? 왜 그러나?"

회장님이 의아하게 묻자, 여주가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스테이크가... 너무 예쁘게 플레이팅 되어서요. 잘 먹겠습니다, 회장님."

"허허, 그래. 많이들 먹어."

식사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회장님은 두 사람의 싹싹하고 단단한 태도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회장님이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늘 밥은 내가 맺어준 1호 대타 커플을 위한 축하의 의미니, 부담 갖지 말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예쁘게들 잘 만나봐. 내 나중에 두 사람 청첩장 나오면 주례라도 서 줄 테니까."

"아이고, 회장님. 주례 섭외 1순위로 모시겠습니다."

도운이 넙죽 대답하자, 여주가 또다시 얼굴을 붉히며 도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선 회장님은 "젊은 사람들끼리 데이트 더 하라"며 먼저 대기시켜 둔 차를 타고 떠났다.

남겨진 도운과 여주는 선선한 여의도의 밤공기를 맞으며 한강 공원 쪽으로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와... 오늘 진짜 너무 많이 웃어서 광대가 다 아프네."

여주가 볼을 문지르며 웃자, 도운이 여주의 손을 이끌어 제 코트 주머니 안에 쏙 집어넣었다. 이제는 아주 당연하고 익숙해진 두 사람만의 맞춤 퍼즐 같았다.

"그러게. 첫날에 여기서 밥 먹고 헤어질 땐 등에 식은땀이 쫙 났었는데."

도운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빠 아까 회장님 앞에서 주례 선다고 할 때 대답 엄청 빨리 하더라? 김칫국 진짜 제대로 마셨어, 윤 원장님."

"김칫국 아이라, 내 빅 픽처다. 동네방네 소문도 다 났고, 회장님한테 도장도 찍혔는데 이제 너 나한테서 못 도망간다."

도운이 장난스럽게 콧방귀를 뀌며 여주의 어깨를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여주야."

"응."

"우리 첫날에 여기서 헤어질 때, '조만간 예의상 차 한 번 더 마십시다' 하고 헤어졌던 거 기억나나."

"당연하지. 속으론 '이 귀찮은 미션을 언제 하나' 했으면서."

여주의 핀잔에 도운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고는 주머니 속에서 여주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아주 느릿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그런 핑계는 평생 안 만들어도 되겠네. 예의상 볼 필요 없으니까."

"......"

"그냥 평생, 매일 내 속도에 맞춰서 같이 걷자. 3분 거리에서."

화려한 이벤트나 거창한 수식어는 없었다. 하지만 윤도운이라는 사람의 가장 담백하고 진솔한 고백에, 여주는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내일 당장 3시부터 와서 커피나 받아 가. 늦으면 샷 추가 안 해줄 거니까."

"아, 그건 진짜 안 되는데. 2시 50분부터 문 앞에 서 있겠습니다, 사장님."

도운이 여주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차가운 강바람이 불었지만, 맞잡은 두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 덕에 하나도 춥지 않았다.

서로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나갔던 가장 어색하고 완벽한 대타.

하지만 그 우연한 대타는 돌고 돌아, 서로의 인생에서 절대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진짜'가 되었다.

두 사람은 밤거리를 걸어,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그들의 무대인 안양의 3분 거리 동네로 발걸음을 돌렸다.

노란 간판과 파란 간판이 마주 보는, 작고 사랑스러운 그들의 일상으로.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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