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날씨가 부쩍 따뜻해진 탓에 평촌 학원가와 중앙공원 근처는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덕분에 목이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여주의 카페도 오픈 직후부터 쉴 새 없이 손님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하아..."
학원 주말반 오전 타임을 끝내고 여주와 늦은 점심을 먹으려던 도운은, 카페 문을 열자마자 숨을 헉 들이마셨다.
테이블은 이미 만석에, 테이크아웃을 기다리는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고, 픽업대 앞에는 배달 대행 기사 두 명이 헬멧을 쓴 채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야말로 전쟁통이었다.
"아니, 사장님. 제가 가져가야 할 봉투를 방금 딴 기사가 가져갔다니까요? 나 다음 콜도 밀려있는데 이렇게 시간 뺏기면 어떡해요!"
"저기요, 우리 주문은 언제 나와요? 15분째 기다리고 있는데."
기다림에 지친 손님의 짜증 섞인 목소리와 배달 기사의 항의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지 한 달 된 알바생 지민은 포스기 앞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가게 밖에서 유리창 너머로 웃으며 인사하려던 도운은, 차마 카운터 쪽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구석진 벽 쪽에 몸을 바짝 붙였다.
'와... 장난 아니네.'
도운이 조심스럽게 상황을 살피던 그때였다. 안쪽 창고에서 컵 홀더 박스를 들고나온 여주가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카운터로 나섰다. 평소 도운 앞에서 짓던 몽글몽글한 미소는 온데간데없는, 아주 차분하고 단단한 '사장님'의 얼굴이었다.
"기사님, 언성 낮춰주세요. 방금 다른 기사님이 실수로 가져가신 것 같은데, 제가 배달 센터 쪽에 연락해서 배차 취소하고 바로잡을 테니까 걱정 마시고요. 기사님 배달 건은 제가 지금 3분 안에 다시 뽑아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여주는 단호하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는 목소리로 배달 기사의 불만을 단숨에 잠재웠다. 기사도 여주의 깔끔한 대처에 더 이상 화를 내지 못하고 "아... 예, 빨리 좀 부탁드려요." 하며 한발 물러섰다.
여주는 곧바로 홀 손님 쪽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손님, 주문이 몰려서 지연된 점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준비해 드리고, 죄송한 마음에 사이즈 업해서 내어드리겠습니다. 조금만 더 양해 부탁드릴게요."
불만을 터뜨리려던 손님도 '사이즈 업'과 여주의 진심 어린 사과에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누그러졌다.
급한 불을 끈 여주는 에스프레소 머신 앞으로 자리를 옮기며, 패닉에 빠진 알바생 지민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지민아, 당황하지 마. 배달 기사님들 오시면 영수증 번호 꼭 두 번씩 확인해서 드리고, 밀린 홀 주문부터 순서대로 쳐내자. 넌 포스랑 픽업만 봐. 샷 내리고 제조하는 건 내가 다 할 테니까."
"네, 네! 사장님!"
그때부터 여주의 손은 말 그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한 손으로 샷을 내리면서 동시에 우유 스팀을 치고, 얼음컵을 세팅하며 시럽을 펌핑했다. 주문이 꼬이고 손님들이 밀려드는 아찔한 위기 상황이었지만, 여주의 동선에는 한 치의 낭비도 없었다. 흔들림 없이 카페의 중심을 꽉 잡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거친 파도 속에서도 끄떡없는 능숙한 선장 같았다.
"배달의 민족 주문-!"
"지민아, 저거 포장 봉투에 냅킨 두 장씩 꼭 챙겨 넣고!"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주문 알림음과 손님들의 소음 속에서, 여주의 맑고 단단한 목소리만이 카페 안의 질서를 통제하고 있었다.
도운은 구석에 선 채로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자신의 품에 안겨 부끄러워하거나, 첫 키스에 놀라 토끼눈을 뜨던 작고 귀여운 여자친구는 그곳에 없었다. 복잡한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며, 제 몫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한 명의 '사장님'만이 존재했다.
'아...'
도운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드럼 앞에서, 혹은 무대 위에서 자신이 느끼는 그 묵직한 희열과 책임감을, 여주는 이 작은 카페 안에서 매일같이 증명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다부진 옆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심장이 평소와는 다른 리듬으로 쿵쾅거렸다.
장장 한 시간에 걸친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만석이었던 테이블이 하나둘 빠지고, 밀려있던 테이크아웃 주문도 모두 해결되었다.
"휴우..."
여주가 그제야 에스프레소 머신에 이마를 기대며 길고 무거운 숨을 토해냈다. 묶고 있던 머리는 살짝 헝클어져 있었고,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도운은 카운터 위에 놓인 냅킨을 몇 장 뽑아 들고 천천히 다가갔다.
"고생 많았다, 우리 사장님."
"어...?! 깜짝이야!"
머신에 기대어 있던 여주가 도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오빠 언제 왔어? 나 전혀 못 봤는데!"
"한 사십 분 됐나. 아까 그 배달 기사님 화내실 때 문 열고 들어왔지."
"아, 진짜? 나 방금 엄청 예민하게 굴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알바생 앞에서 소리도 치고."
여주가 민망한 듯 제 헝클어진 앞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정신없이 일하느라 보이기 싫었던 모습까지 다 보여준 것 같아 괜스레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도운의 반응은 여주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도운은 카운터 너머로 손을 뻗어, 냅킨으로 여주의 이마에 맺힌 땀을 아주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닦아주었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여주를 향한 애정과 경외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멋있네."
"응?"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칭찬에 여주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갑자기 웬 금칠이야, 윤도운 씨?"
"아니... 방금 일하는 거 구석에서 지켜보는데, 나도 모르게 쫄아가지고 속으로 '와, 사장님 포스 장난 아이다' 카면서 보고 있었다 아이가. 존경심이 막 절로 튀어나오네."
도운이 뒷목을 긁적이며 눈을 피했다. 여전히 여주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도운의 귀끝이 불타는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뭐야, 그게."
여주가 픽 웃자, 도운이 헛기침을 하며 변명하듯 덧붙였다.
"아니, 진짜로. 주문 꼬인 거 척척 해결하고, 손님들한테 딱 부러지게 대처하고, 알바생 챙기고... 여주 니 쪼끄만 체구에서 우째 그런 카리스마가 나오노. 넋 놓고 봤다."
"......"
"나 방금, 진짜 너한테 또 반한 거 같다."
도운의 솔직하고도 묵직한 직구에, 이번엔 여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한 기분이었다.
얼마 전, 입시반 학생을 가르치고 학부모를 상담하던 '윤 원장님'에게 여주가 반했던 것처럼.
오늘 도운 역시 치열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는 '사장님'의 모습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애인.
하지만 그 이전에, 서로가 각자의 자리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제 몫을 다하는 어른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
"그렇게 멋있었으면, 오늘 늦은 점심은 윤 원장님이 쏘셔야겠습니더~"
여주가 도운의 사투리를 장난스럽게 따라 하며 눈웃음을 쳤다. 도운 역시 터질 듯이 붉어진 귀를 한 채로,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하지예. 소고기라도 구워 바치겠습니다, 사장님."
서로의 일하는 얼굴을 보며 한 번 더 사랑에 빠지는 연애.
3분 거리의 생활권이 만들어준, 이 동네 연애에서만 누릴 수 있는 가장 단단하고 눈부신 특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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