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오후 6시.
여주는 카페 마감을 알바생에게 잠시 맡겨두고, 근처 샌드위치 가게에서 포장한 쇼핑백을 든 채 윤 드럼학원의 문을 열었다.
"여주 왔나!"
카운터에서 스케줄표를 정리하고 있던 도운이 여주를 발견하고는, 입꼬리가 귀에 걸린 채 벌떡 일어났다. 사귀기로 한 이후부터 반말을 쓰기로 한 도운은, 이제 제법 익숙하게 '여주야' 하고 부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빠 오늘 저녁도 못 먹고 풀타임 수업이라며. 이거 먹으면서 해."
"와, 내 진짜 배고파서 쓰러지기 직전이었는데. 고맙다, 진짜."
도운이 샌드위치를 받아 들며 여주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내 지금부터 딱 한 시간 반 정도 릴레이로 수업이랑 상담 있거든? 로비 소파에 앉아서 이거 같이 묵으면서 쪼매만 기다려라. 금방 끝내고 데이트 가자."
"응. 나 책 가져왔으니까 천천히 해. 방해 안 할게."
여주는 로비 한쪽에 놓인 푹신한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도운은 여주 옆에 나란히 앉아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자기 몸집만 한 가방을 멘 일곱 살 민재가 들어왔다.
"원장니임!"
"어, 우리 막내 왔나!"
도운은 먹던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여주는 책을 펼치는 대신, 무릎을 굽히고 앉아 민재와 눈높이를 맞추는 도운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레슨실 안. 도운은 아이의 등 뒤에 서서 다정하게 스틱 쥐는 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이가 박자를 놓치고 엉뚱한 곳을 쳐도, 도운은 절대 다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과장되게 놀라는 척을 하며 아이를 웃게 만들었다.
"아이고! 거기를 치면 북이 깜짝 놀란다 아이가. 살살 달래주면서, 쿵, 짝. 그렇지!"
아이의 눈높이에 완벽하게 맞춘, 한없이 다정하고 유쾌한 선생님. 여주는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보며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여주의 여유로운 감상은 다음 타임 수업에서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다.
민재가 돌아가고,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이 땀을 뻘뻘 흘리며 학원으로 들어왔다. 올해 실용음악과 입시를 앞둔 고3 학생이었다. 도운의 표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장난기 넘치던 입매가 일자로 굳게 다물렸고, 눈빛은 서늘할 정도로 날카로워졌다.
입시반 레슨실은 방음문이 살짝 열려 있어, 도운의 목소리가 로비까지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타닥, 타다닥, 쾅!
거친 드럼 소리가 몇 번 이어지다, 툭, 하고 끊겼다.
"거기서 심벌을 와 치노."
낮고 차가운 도운의 목소리에 여주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평소의 그 둥글둥글한 억양은 온데간데없었다.
"내가 필인 들어갈 때 하이햇으로 쪼개라고 몇 번을 말했노. 박자 다 밀리잖아, 지금."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아이고, 다시 쳐라. 메트로놈 템포 120에 맞춰가 정확하게 떨어질 때까지 넘길 생각 마라."
도운은 팔짱을 낀 채, 드럼 옆에 서서 매의 눈으로 학생의 손목 각도와 페달 밟는 발끝을 주시했다. 스틱으로 메트로놈을 툭툭 치며 박자를 세는 그의 모습에는 한 치의 타협도 없었다.
학생이 몇 번이고 같은 구간을 반복하며 땀을 비 오듯 쏟았지만, 도운은 빈틈없는 지적을 이어갔다.
"어깨에 힘 빼라. 손목으로만 쳐야지 억지로 힘으로 누르니까 소리가 둔탁하제. 다시."
늘 자신 앞에서는 부끄러워서 귀를 붉히고, 뚝딱거리며 말을 더듬던 윤도운.
하지만 드럼 앞에 선 '윤 원장님'은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었다. 음악 앞에서, 그리고 제자들의 미래 앞에서 그는 누구보다 진지하고 엄격한 프로였다. 여주는 책장 넘기는 것조차 잊은 채, 유리창 너머의 낯설고도 압도적인 도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진짜... 다른 사람 같네.'
입시반 수업이 끝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한 학생의 등을 두드려주며 "그래도 오늘 마지막엔 감 잡았네. 수고했다." 하고 무심한 듯 다정하게 격려하는 모습까지. 그 모든 과정이 여주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찾아온 학부모 상담 시간.
입시반 학생의 어머니가 잔뜩 예민해진 얼굴로 로비 카운터에 앉았다.
"원장님, 우리 애 이번 달 모의고사 성적이 너무 떨어졌어요. 이러다 실기 다 망치는 거 아닌가 몰라. 새벽까지라도 학원에 붙잡아두고 연습 좀 빡세게 시켜주시면 안 될까요?"
불안함에 무리한 요구를 쏟아내는 학부모를 향해, 도운은 따뜻한 커피를 내밀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찬호 요새 진짜 잘하고 있습니다.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유, 그래도 딴 애들은 밤새워서 스틱 부러질 때까지 친다는데..."
"어머니."
도운이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드럼은 체력전입니다. 지금 이 시기에 억지로 밤새워가며 무식하게 치면, 실기장 들어가기도 전에 손목 인대부터 나갑니다. 그러면 그동안 고생한 거 다 물거품 되는 겁니다."
싹싹하고 친절한 태도였지만, 도운의 목소리에는 전문가로서의 확고한 중심이 서 있었다.
"제가 찬호 손목 상태랑 체력 봐가면서 알아서 페이스 조절 시키고 있습니다. 애가 불안해서 오버 페이스 하려는 것도 제가 뜯어말리고 있는 중이거든요. 학부모님 마음 급하신 건 알지만, 저 믿고 학원에 맡기셨으면 끝까지 저 한 번 믿어주십쇼. 찬호 절대 안 뒤처집니다."
도운의 단단하고 자신감 넘치는 설명에, 학부모의 뾰족했던 표정도 점차 누그러졌다.
"원장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알겠어요. 제가 너무 조급했나 보네요."
"아닙니다. 다 찬호 잘되라고 하시는 걱정인데 제가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어머니도 찬호 밥이나 든든하게 챙겨 먹여 주십쇼."
상담을 마치고 학부모를 배웅하는 도운의 뒷모습은, 여주가 처음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보았던 그 듬직한 어른의 모습 그대로였다.
"휴우- 다 끝났다!"
마지막 학부모까지 배웅하고 학원 문을 잠근 도운이, 기지개를 켜며 여주가 앉아있는 소파 쪽으로 걸어왔다. 방금 전까지 카리스마 넘치던 '윤 원장님'은 셔터가 내려가자마자 다시 한없이 순한 남자친구로 돌아와 있었다.
"여주야, 많이 기다렸제. 지루하지 않았나?"
도운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여주의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댔다. 하루 종일 긴장하고 에너지를 쏟아부은 탓에 목소리에는 피로가 가득 묻어 있었다. 여주는 그런 도운의 땀에 젖은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 주었다.
"하나도 안 지루했어."
"진짜? 나 아까 입시반 애 잡을 때 쪼매 무섭지 않았나. 소리 너무 지른 거 같아가 눈치 보이던데."
도운이 여주의 눈치를 슬쩍 보며 묻자, 여주는 도운의 뺨을 두 손으로 가볍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아주 진지한 눈빛으로 도운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 오늘, 오빠한테 한 번 더 반한 거 같아."
"어... 어?"
여주의 직구에 도운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린애들한테 눈높이 맞춰주는 다정한 선생님인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무섭고 카리스마 있는 호랑이 선생님인 줄은 몰랐거든. 게다가 학부모님들 앞에서는 엄청 듬직하고 단단하고."
"......"
"나한테 맨날 뚝딱거리고 부끄러워하는 귀여운 오빠인 줄만 알았는데... 진짜 자기 일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을 내가 만나고 있었구나, 싶어서."
여주의 입에서 나온 '반했다'는 말과 진심 어린 칭찬에, 도운의 얼굴은 순식간에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텐션으로는 도저히 수습이 안 될 만큼 벅찬 감정이었다.
"아, 진짜... 사람 심장 터지게 와 그러는데."
도운이 부끄러운 듯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덮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입꼬리는 이미 주체할 수 없이 씰룩거리고 있었다. 도운은 제 얼굴을 덮었던 손을 떼고, 여주의 손을 덥석 깍지 껴 잡았다.
"니가 그래 예쁘게 쳐다보면서 칭찬하면, 내가 진짜 오빠 체면이고 원장 체면이고 다 버리고 여기서 당장 뽀뽀하고 싶어지잖아."
낮게 읊조리듯 내뱉는 도운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동네 지인으로 시작해, 대형견 같은 귀여움과 남자친구다운 설렘을 동시에 주던 남자.
하지만 오늘 여주가 확인한 윤도운은, 자기 삶의 운전대를 꽉 쥐고 책임감 있게 나아가는 진짜 '어른'이었다.
이 연애는, 3분 거리라는 가벼운 핑계로 포장하기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고 단단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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