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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5

낮에는 원장님, 밤에는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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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거리 동네 연애의 가장 큰 단점은, 두 사람의 생업 공간이 완벽하게 겹친다는 것이었다.

학원가 사거리라는 지리적 특성상, 낮 시간대에는 언제 어디서 학원 원생, 학부모, 혹은 카페 단골손님을 마주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동네 장사에서 '드럼 학원 총각 원장님이랑 카페 아가씨가 연애한대요'라는 소문이 퍼지는 건 며칠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무언의 합의를 했다. '해가 떠 있는 동안, 가게 근처에서는 철저하게 공과 사를 구분하자.'

목요일 오후 1시. 여주는 카운터 한쪽에 놓인 도운의 검은색 지갑을 챙겨 들고 카페를 나섰다. 아침에 출근길에 잠깐 들러 커피를 사 가던 도운이 정신없이 흘리고 간 것이었다.

3분을 걸어 파란 간판 세탁소를 지나 윤 드럼학원 문을 열었다.

"원장님, 안에 계세요?" "어! 여주야!"

텅 빈 로비에서 패드를 두드리고 있던 도운이, 여주를 발견하자마자 반가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도운이 그대로 여주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다가오던 찰나였다.

벌컥-

"원장님! 저 오늘 일찍 왔어요!"

연습실 안쪽 문이 열리며 초등부 에이스 지민이가 드럼 스틱을 쥐고 튀어나왔다. 그 순간, 여주를 향해 활짝 벌려졌던 도운의 두 팔이 허공에서 어색하게 멈칫했다. 도운은 0.1초 만에 벌렸던 팔을 자연스럽게 모아 기지개를 켜는 척하며, 목소리 톤을 한껏 낮췄다.

"어, 그래, 지민아. 일찍 왔네. 들어가서 패드 치고 있어라." "네! 근데 카페 사장님은 왜 오셨어요?"

지민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여주도 흠칫 놀라며 재빨리 사무적인 미소를 장착했다.

"아, 원장님이 아침에 카페에 지갑을 두고 가셔서 전해주러 왔어. 여기요, 원장님. 다음부터는 물건 잘 챙기세요."

여주가 짐짓 딱딱한 목소리로 지갑을 건네자, 도운 역시 두 손으로 공손하게 지갑을 받아 들었다.

"아이고, 사장님. 바쁘신데 여기까지 직접 가져다주시고... 진짜 감사합니다. 결제할 때 정신이 없었나 봅니다." "아니에요. 그럼 저는 영업 중이라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원장님." "예, 안녕히 가십쇼, 사장님."

서로를 향해 깍듯하게 90도로 목례를 하는 두 사람. 여주가 뒤를 돌아 학원 문을 나서기 직전, 도운과 시선이 마주쳤다. 도운은 입 모양으로만 '이따 갈게!' 하고 울상을 짓고 있었고, 여주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느라 입술을 꽉 깨문 채 학원을 빠져나왔다.

오후 3시. 이번엔 도운이 3시 루틴에 맞춰 카페로 출근 도장을 찍을 시간이었다.

"사장님, 저 왔습니데이."

다행히 카페 안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도운은 안도하며 카운터에 팔을 괴고 여주를 향해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아까 낮에는 진짜 놀랐네. 지갑 두고 온 것도 몰랐는데." "그러니까요. 지민이 아니었으면 오빠 학원 로비에서 나 안을 뻔했잖아요. 큰일 날 뻔했네." "뭐, 안으면 어떻습니까. 원장도 연애할 수 있지."

도운이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여주는 귀엽다는 듯 도운을 흘겨보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리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탬핑에 훨씬 공을 들이며, 도운의 컵에 몰래 샷을 하나 더 붓고 시럽까지 살짝 깔아주는 여주만의 은밀한 애정 표현이었다.

"자, 원장님을 위한 특제 아메리..."

딸랑-

"사장님, 아이스 바닐라 라떼 두 잔요!"

여주가 커피를 건네며 윙크를 하려던 순간, 근처 은행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 두 명이 수다를 떨며 카페로 들어왔다. 단골손님들이었다.

순식간에 카페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도운은 카운터에 기대고 있던 팔을 잽싸게 내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헛기침을 했다. 여주 역시 1초 만에 영업용 자본주의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손님들을 맞았다.

"아, 네! 바닐라 라떼 두 잔 금방 준비해 드릴게요!"

그리고는 카운터 끝에 뻘쭘하게 서 있는 도운을 향해 아주 건조하고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샷 추가 나오셨습니다. 결제 도와드릴게요, 손님." "...예. 여기 카드요."

도운 역시 세상에서 가장 데면데면한 동네 주민의 표정을 한 채 카드를 내밀었다. 여주가 카드를 긁고 돌려줄 때, 두 사람의 손끝이 아주 살짝 스쳤지만 둘 다 모른 척 시선을 피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원장님." "예... 수고하십쇼, 사장님."

도운은 손님들의 눈치를 슬쩍 보며, 방금 전까지 꿀이 뚝뚝 떨어지던 카페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시큰둥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도운의 뒷모습을 보며, 여주는 에스프레소 머신 뒤에 숨어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야 했다.

그날 밤 10시 10분. 드디어 길고 길었던, 가식과 연기로 점철된 낮 시간이 모두 끝났다.

여주는 셔터를 내리고 작은 가방을 멨다. 어김없이 어닝 아래에는 도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퇴근합니까, 사장님." 도운이 장난스럽게 운을 뗐다. 여주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네. 원장님도 고생 많으셨네요."

큰길을 걷는 동안 두 사람은 평소처럼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시시콜콜한 하루 일과를 나누었다. 아직 가로등 밑에는 늦게까지 문을 연 학원들이나 스터디 카페에서 나오는 학생들이 간간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중앙공원 쪽으로 이어지는 한적한 골목길로 딱 꺾어 들어선 순간.

덥석-

"아, 진짜. 윤도운 죽는 줄 알았다."

도운이 낮게 앓는 소리를 내며 여주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여주의 허리를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겨 어깨를 맞부딪치게 만들었다.

방금 전까지 "고생 많으셨네요, 원장님" 하던 깍듯한 목소리와 적당한 거리감은 골목의 그림자 속으로 완벽하게 증발해버렸다.

"오빠,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래요." 여주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작게 웃자, 도운이 여주의 뺨에 제 코끝을 부비며 웅얼거렸다.

"보라지. 해 졌는데 뭐 어쩌겠노?. 낮에 카페에서 그 은행 직원들 들어왔을 때, 나 진짜 속으로 눈물 흘렸다 아이가. 여주가 타주는 특제 커피 받고 한껏 주접떨라 켓는데." "나도 학원에서 오빠가 입 모양으로 '이따 갈게' 할 때 웃겨서 죽는 줄 알았어요."

도운은 낮 동안 강제로 억눌러야 했던 스킨십의 한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 여주의 손을 잡은 채로 쉼 없이 여주의 머리카락을 넘겨주거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낮에는 진짜, 원장 체면 차리기 너무 힘이 드네요. 확 그냥 동네방네 여주 내 여자친구입니다하고 광고하고 다닐까."

도운의 억양 섞인 귀여운 투정에 여주가 까치발을 들어 도운의 뺨에 가볍게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도운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광고 안 해도 돼요. 밤에는 나 오빠 거 맞으니까."

본문 삽화

여주의 당돌한 대답에 도운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 낮게 웃었다. 도운은 잡고 있던 여주의 손을 이끌어 제 코트 주머니 안에 쏙 집어넣고는 꽉 쥐었다.

"이러고 훅 들어오면 반칙인데."

가로등 불빛이 주황색으로 번지는 조용한 골목길. 낮엔 시치미 뚝 떼고 "안녕히 가세요, 원장님" 하던 여주가, 밤엔 같은 사람의 손을 주머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쥐고 올려다보았다.

"오빠. 오늘은 중앙공원 말고 저기 자유공원 쪽으로 크게 돌아서 걸을래요?"

여주의 앙증맞은 제안에, 도운은 귀끝을 붉게 물들인 채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당연하지. 모락산도 타자면 탈 수 있지."

낮에는 원장님과 사장님. 하지만 밤의 셔터가 내려가고 나면, 서로의 온기를 온전히 나눌 수 있는 오빠와 여자친구. 동네 연애의 치명적인 단점은, 역설적이게도 밤이 되면 가장 짜릿하고 달콤한 특권으로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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