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밤 10시 30분.
평소 같았으면 진작에 간판 불을 끄고 셔터를 내렸을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 여주의 카페는 절반의 조명만을 남겨둔 채 조용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여주는 테이블 위로 의자들을 전부 뒤집어 올려두고, 카운터 안쪽에서 에스프레소 머신 주변을 행주로 연신 닦아냈다. 벌써 세 번이나 닦아서 먼지 하나 없이 반짝거렸지만,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면 계속 손을 움직여야만 했다.
'언제쯤 오려나. 차가 많이 막히나.'
여주가 휴대폰 화면을 껐다 켜기를 반복하던 그때였다.
딸랑-
골목의 고요함을 깨는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열렸다.
"사장님, 문 안 닫았지요?"
커다란 백팩을 한쪽 어깨에 멘 도운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KTX에서 내리자마자 짐도 풀지 않고 곧바로 학원가 사거리까지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앞머리가 땀에 살짝 젖어 있었지만, 여주를 발견한 도운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환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원장님! 진짜 왔네요? 피곤하실 텐데 내일 오시지."
"내일 오후 3시까지 어떻게 기다립니까. 목말라 죽겠는데."
도운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카운터 앞의 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늘 헐렁한 슬리퍼 차림으로 오던 동네 지인이 아니라, 며칠 만에 멀리서 자신을 보러 한달음에 달려온 사람.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평소와 다르게 훅 달아올랐다.
"앉아계세요. 제가 VVIP용으로 엄청 정성 들여서 내려드릴게요."
여주는 미리 세팅해 둔 포터필터를 잡았다. 메시지에서 약속했던 것처럼 아주 꼼꼼하게 탬핑을 하고, 쫀득한 에스프레소 샷을 진하게 내렸다. 얼음이 가득 담긴 잔에 샷이 섞여 들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자, 윤도운 원장님 전용 아이스 아메리카노 샷 추가입니다."
"와, 진짜 감사합니다. 부산에서 내내 이 맛이 얼마나 그립던지."
도운이 커피를 받아 들고 단숨에 절반을 쭉 들이켰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도운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하아... 살 것 같다. 진짜 이거지."
도운이 만족스러운 듯 커피 잔을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여주도 카운터 안쪽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그런 도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공연은 잘 끝났어요? 피곤해 보이는데."
"예, 뭐. 늘 하던 거니까요. 근데 며칠 학원 비웠더니 쳐야 할 패드 진도가 산더미입니다."
도운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일상적인 대화였지만, 텅 빈 카페 안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시선은 허공에서 자꾸만 끈적하게 얽혔다. 도운의 시선이 여주의 눈에서, 코끝으로, 그리고 다시 눈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평소처럼 장난을 치거나 실없는 소리로 분위기를 풀 법도 한데, 오늘따라 도운의 표정은 퍽 진지했다.
"사장님."
가라앉은 목소리로 도운이 먼저 입을 뗐다.
"네."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하십니까. 여의도에서 고기 썰었던 날."
"당연하죠. 둘 다 대타로 나와서 엄청 어색했잖아요. 원장님 그때 여백의 미를 미백의 여라고..."
"아, 진짜. 그건 무덤까지 비밀로 해달라니까예."
도운이 귀를 살짝 붉히며 작게 웃었다. 하지만 여주를 바라보는 다정한 눈빛만큼은 피하지 않았다.
"그때는, 솔직히 영현이 형 대신 억지로 끌려나온 거였거든요. 형이 하도 사정사정을 해서 어쩔 수 없이요."
"저도 그랬죠. 회장님 체면 때문에."
"근데예."
도운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두 손을 가볍게 깍지 끼며 여주를 똑바로 응시했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서, 네가 대신 나갈래 하고 묻는다면... 저는 누가 안 시켜도 제가 먼저 나갔을 겁니다."
"......"
"사장님 보려고요."
훅 들어온 직구에 여주의 심장이 쿵, 하고 크게 요동쳤다. 늘 능글맞게 상황을 모면하거나 부끄러워하며 도망치던 사람이,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단단한 눈빛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기 3분 거리에 있는 학원 놔두고 맨날 슬리퍼 끌고 여기까지 커피 사러 온 것도, 비 오는 날 굳이 방향 틀어서 데려다준 것도, 조카 지훈이 앞에서 남자친구 아니라고 하면서 속으로 엄청 찔렸던 것도 다..."
도운이 깍지 꼈던 손을 풀고, 카운터 위로 손을 조금 더 뻗어 여주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 그냥, 제가 사장님을 좋아해서 그런 겁니다."
도운의 목소리는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카페 안을 채웠다.
"이제는 회장님 체면 핑계로, 예의상 차 한 번 더 마신다는 핑계로, 아니면 커피 산다는 핑계 말고."
도운이 살짝 마른입술을 축이고는 다정하게 덧붙였다.
"그냥, 서로 보고 싶어서 봤으면 좋겠는데요. 우리."
솔직하고 담백한 고백이었다. 화려한 수식어나 거창한 이벤트는 없었지만, 그래서 더 윤도운다운 고백이었다. 그가 얼마나 진심으로 자신의 일상에 스며들었는지 여주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여주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려 환하게 웃었다.
"저도 그래요."
"......"
"이제는 핑계 없어도, 언제든지 만날 수 있잖아요. 우리."
여주의 명확한 대답에, 도운의 굳어있던 어깨가 스르르 풀리며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긴장했던 탓인지 도운의 귀끝은 평소보다 훨씬 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와... 진짜. 살면서 무대 올라가기 전보다 더 떨렸네."
도운이 양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작게 탄식하자, 여주가 소리 내어 웃었다. 무거웠던 공기가 순식간에 편안하고 따뜻한 온기로 바뀌었다.
웃음이 잦아들고,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기분 좋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도운이 카운터 위에 놓인 여주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그잔을 씻고 커피를 내리느라 조금 거칠어진, 다부지고 작은 손.
도운은 천천히 손을 뻗어, 스틱을 쥐고 샌드백을 치느라 굳은살이 배인 손으로 여주의 손을 살포시 덮었다. 투박하지만 한없이 따뜻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여주는 손을 빼는 대신, 도운의 손 안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그의 온기를 마주 잡았다.
가장 어색했던 소개팅 대타에서, 우연한 동네 지인으로.
서로의 일하는 얼굴을 존중하고, 부재를 아쉬워하며 핑계를 만들던 시간들을 지나.
의자가 모두 뒤집혀 올라간 텅 빈 카페 안.
두 사람의 3분 거리 연애가, 마침내 핑계 없는 진짜 시작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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