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전, 여주의 향기와 살결이 닿았던 가슴팍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피곤해서 앓는 소리를 내던 몸살 기운은 싹 달아나고, 온몸에 알 수 없는 열기만이 가득했다.
친구라고 부르기엔 이미 선을 한참 넘어버린, 위험하고도 달콤한 자각이었다.
그 숨 막히던 드럼 연습실에서의 해프닝 다음 날.
여주는 아침부터 묘하게 붕 뜬 기분으로 카페 문을 열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예열하고 테이블을 닦는 내내, 자꾸만 등 뒤로 닿아오던 도운의 단단한 가슴팍과 귓가를 스치던 낮은 목소리가 떠올라 고개를 세차게 저어야 했다.
'미쳤어, 진짜. 일하자, 일.'
스스로를 다독이며 바쁘게 오전과 점심 피크 타임을 쳐냈다. 어느덧 카페 벽에 걸린 시계가 오후 2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의 시간, 오후 3시.
여주는 포스기 앞을 정리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머신 쪽으로 다가가 포터필터에 원두를 담고 있었다. 탬핑을 하고 샷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여주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아..."
그러고 보니, 도운은 어젯밤 연습실에서 허둥지둥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여주에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이렇게 말했었다.
[사장님! 저 내일부터 일요일까지 부산에 세션 공연하러 내려갑니다! 학원 며칠 닫으니까 저 없다고 심심해하시면 안 됩니데이!]
자신을 놀리려 덧붙인 농담이었지만, 어제는 그 농담에 대꾸할 정신조차 없어서 대충 고개만 끄덕이고 와버렸었다.
여주는 허공에 멈춰있던 손을 천천히 거두고, 머신 아래에 놓여있던 샷 잔을 치웠다. 도운은 오늘 오지 않는다. 그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몸이 습관처럼 윤도운 전용 '아이스 아메리카노 샷 추가'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주는 괜스레 머쓱해져 빈 카운터 앞을 서성였다.
딸랑-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문 쪽으로 향했지만, 들어오는 건 근처 학원의 강사들이나 동네 단골손님들뿐이었다. 늘 슬리퍼를 직찍 끌고 후드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사장님, 저 왔습니데이." 하고 들어오는 헐렁한 원장님은 없었다.
여주는 창가 자리에 남아있는 빈 잔을 치우며, 무심코 창밖 사거리 쪽을 내다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파란 간판 아래에서 땡땡이치는 학원 아이들을 붙잡아 오거나, 학부모와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도운의 모습이 보일 시간이었다. 하지만 불이 꺼진 3층 학원 창문은 오늘따라 유독 까맣고 조용해 보였다.
고작 3분 거리에 있는 사람 하나가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왁자지껄한 학원가 골목이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느껴졌다.
'진짜... 내 일상에 엄청 들어와 있었구나.'
여주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하루 시계가, 어느새 도운이 찾아오는 오후 3시와 도운이 퇴근하는 밤 10시에 맞춰져서 굴러가고 있었다는 것을.
비슷한 시각, 부산 광안리 근처의 한 공연장 대기실.
"도운아, 물 마실래?"
"아, 예. 형. 고맙습니다."
리허설을 마치고 대기실 소파에 늘어져 있던 도운이 생수병을 받아 들었다. 오랜만에 내려온 고향이었고, 좋아하는 무대 위에서 드럼을 치는 일이었지만 어쩐지 텐션이 평소만큼 오르지 않았다.
도운은 생수병을 만지작거리며 테이블 위에 놓인 프랜차이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까 점심을 먹고 한 모금 마셨는데, 영 밍밍하고 쓴맛만 강해서 그대로 방치해둔 참이었다.
'확실히... 거기가 커피를 잘하긴 해.'
산미 없이 고소하고 묵직한, 샷을 팍팍 추가해서 얼음이 녹아도 끝까지 진했던 그 커피. 도운은 입맛을 쩝 다시며 휴대폰 화면을 켰다.
[사장님, 혹시 부산까지 배달 됩니까?]
메시지 창을 열고 습관처럼 텍스트를 쳤다가, 이내 백스페이스를 눌러 쭈르륵 지워버렸다.
어제 연습실에서의 일 때문에 여주가 불편해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너무 훅 다가갔나. 놀라서 도망치던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 않게 장난을 쳤을 텐데, 이제는 연락 하나, 농담 한마디에도 수백 번 고민이 앞섰다.
"하아... 윤도운 쫄보 다 됐네."

도운이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빨리 안양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시원한 바닷바람도, 끝내주는 돼지국밥도 다 좋지만, 지금 도운에게 가장 필요한 건 모퉁이 돌면 바로 보이는 노란 간판과 그 안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웃어주는 사람이었다.
토요일 저녁.
주말 피크 타임을 넘기고 녹초가 된 여주가 카운터 의자에 앉아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지잉-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에 여주의 굽어있던 허리가 용수철처럼 꼿꼿하게 펴졌다.
[윤도운 원장님 : (사진)]
메시지를 열어보니,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광안대교와 바다를 찍은 사진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메시지 하나가 더 도착했다.
[윤도운 원장님 : 부산 바다 직입니데이. 근데예, 여기 커피는 영 맛이 없네요. 사장님이 타주는 샷 추가가 너무 그립습니다.]
사진과 짧은 글귀일 뿐인데, 마치 도운이 눈앞에서 특유의 억양으로 앓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아 여주의 입가에 스르륵 미소가 번졌다.
'나만 허전한 건 아니었네.'
이상하게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던 지난 이틀의 시간이, 이 문자 한 통에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여주는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답장을 보냈다.
[여기 커피가 쫌 맛있긴 하죠. 내일 올라오세요? 오시면 탬핑 엄청 꼼꼼하게 해서 진짜 맛있게 내려드릴게요.]
[윤도운 원장님 : 와, 내일 저녁 늦게 도착하는데 그때까지 문 열어두실 겁니까?]
[제가 원장님은 특별히 VVIP로 모신다고 했잖아요. 조심히 올라오세요.]
마지막 답장을 보내고 나서, 여주는 휴대폰을 양손으로 꼭 쥔 채 조용히 웃었다.
이전의 두 사람이었다면, "그럼 다음에 커피 사주십쇼" 정도로 끝났을 대화였다. 하지만 이제 여주는 늦은 시간까지 그를 기다리겠다고 말하고 있었고, 도운은 굳이 멀리서 안양의 작은 카페 커피가 그립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이제는 안다.
도운이 없는 이 골목이 얼마나 조용하고 심심한지.
그가 커피를 사러 오지 않는 오후 3시가 얼마나 텅 비어 있는지.
여주는 카페의 노란 조명을 올려다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빨리, 내일 저녁이 왔으면 좋겠다.
웃기지도 않는 핑계 따위는 모두 던져버리고, 그냥 보고 싶어서 봤다고 말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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