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진주는 침대에 걸터앉아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냈다. 협탁 위에 올려두었던 휴대폰 화면을 한 번 톡 두드리자, 잠금 화면 위로 성진의 이름이 떠올랐다.
진주의 시선이 두 번째 문장에 가볍게 멈췄다. 식당 앞에서는 자신이 한 번 더 되묻고 나서야 들을 수 있었던 대답이었다. 지금은 굳이 캐묻지 않았는데도, 그는 오늘 저녁이 어땠는지 자기 몫의 감정을 한 줄 덧붙여 놓았다.
진주는 머리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목에 걸치고 천천히 자판을 두드렸다.
메시지를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메시지 옆의 숫자 ‘1’이 사라지고 새로운 말풍선이 떠올랐다.
밑도 끝도 없이 치고 들어오는 농담에 진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자신이 젓가락을 먼저 내려놓긴 했다. 진주가 순순히 인정하며 ‘다음엔 안 남길게’라고 대꾸하자, 성진도 작게 웃는 기호 하나를 보내왔다. 대화는 거기서 자연스럽게 끊겼다. 진주는 화면 속 웃는 기호를 잠깐 바라보다가, 살짝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짓고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다음 날 오후, 업무를 보던 진주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먼저 날짜까지 꺼내는 성진의 메시지에 진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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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오전 10시, 모니터 앞을 지키고 있던 진주의 시야 구석으로 휴대폰 화면이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메신저 알림창에 뜬 이름은 성진이었다.
진주는 마우스를 쥔 손을 잠깐 멈추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일곱 시까지 가기는 힘들 것 같다.’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던 진주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맴돌았다. 지난 연애 기간 동안 진주를 가장 지치게 만들었던 익숙한 문장이었다. 곧바로 아래 보이는 토요일 오후의 제안을 보고 잠시 고민했다. 금요일 저녁 늦게 퇴근한 사람을 붙잡고 피곤한 얼굴로 밥을 넘기거나, 밤늦게 얼굴만 잠깐 보는 일정은 당기지 않았다.
진주는 천천히 자판을 쳤다.
주말 늦잠은 포기할 수 없어 세 시부터는 괜찮다고 했더니, 성진은 ‘부터’를 쏙 빼고 딱 세 시를 골랐다. 저녁에 만나도 된다는 뜻이었는데. 진주는 답장을 보며 작게 웃었다. 저녁을 먹기 전까지 시간이 꽤 남겠네 싶어, 진주는 얼마 전 예고편을 보고 궁금했던 영화를 떠올렸다.
성진은 좋다고 답했다. 상영시간표를 보고서 오후 세 시에 영화관 로비에서 만나 세 시 반 영화를 보기로 확정했다. 성진이 곧장 영화를 예매한 뒤 모바일 티켓 화면을 캡처해 보내왔다. 진주는 확인했다는 짧은 이모티콘을 보낸 뒤 메신저 창을 닫았다.
약속은 바뀌었지만, 진주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모니터 속 문서에 집중했다.
토요일 아침, 진주는 알람 없이 느지막이 눈을 떴다. 밀린 집안일을 어느 정도 끝내고 간단하게 점심을 해 먹었다.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서야 출발할 시간에 맞춰 천천히 씻고 옷을 골랐다. 출퇴근할 때 입는 단정한 슬랙스와 블라우스 대신, 움직이기 편한 연청바지에 가벼운 니트를 걸쳤다.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인 영화관 로비에 도착했을 때, 성진은 먼저 와서 상영 시간표 전광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편안한 스웨트 셔츠 차림의 그를 발견한 진주가 다가갔다.

"왔어?"
"어. 밥은 먹고 왔나."
"응, 간단히. 그래도 팝콘이랑 콜라는 먹어야지."
진주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하자 성진도 씨익 웃으며 매점 키오스크로 향했다. 제로 콜라 두 개와 반반팝콘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은 한쪽 벽면을 크게 장식하고 있는 영화 포스터 앞에 섰다. 오늘 볼 영화는 외딴 산장에 고립된 세 명의 주인공이 기상천외한 살인 사건에 휘말리는 추리 코미디였다.
"내 볼 때 저 오른쪽 놈이 범인이다."
포스터를 유심히 보던 성진이 턱끝으로 한 인물을 가리켰다.
"엥? 뭘 보고?"
"가만 봐라. 딴 놈들은 다 앞을 보고 놀라고 있는데, 저놈 혼자 시선을 딴 데로 피하고 있잖아. 저게 다 이유가 있는 기라."
진주는 성진의 어설픈 추리에 헛웃음을 쳤다.
"포스터 눈동자 방향만 보고 범인 맞히면 그게 영화야? 나는 가운데. 원래 저런 실눈캐가 나중에 꼭 뒤통수치더라."
"아이다. 내 말이 맞다니까. 원래 포스터에 힌트를 제일 많이 숨겨놓는다."
성진이 지지 않고 우기자, 진주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 그럼 이따 영화 끝나고 누가 맞혔는지 봐."
"좋다. 내기할까."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찾았다. 3년을 만났던 사이인 만큼, 좁은 통로를 지나 자리에 앉고 음료를 홀더에 끼워 넣으며 팝콘 통을 가운데 팔걸이에 놓는 과정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영화 초반부, 성진이 범인으로 지목했던 오른쪽 인물이 경찰의 심문을 받으며 땀을 뻘뻘 흘리다 앞뒤가 맞지 않는 허술한 변명을 늘어놓는 장면이 나왔다. 진주는 팝콘을 집어 먹다 말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렇게 대놓고 수상한 짓을 하는 캐릭터는 절대 진범일 리 없었다.
진주가 슬쩍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살폈다. 틀렸다는 걸 깨닫고 머쓱해할 줄 알았던 성진은 오히려 확신에 찬 눈빛으로 스크린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진주 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을 때 '내 말이 맞지 않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댔다. 스크린의 불빛에 비친 그의 표정이 묘하게 웃겨서, 진주는 팝콘을 씹으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아야 했다.
중반부를 넘어서며 영화는 본격적인 코미디로 방향을 틀었다. 진범을 찾기 위해 잔뜩 긴장하며 어두운 지하실로 내려가던 주인공들이, 천장에서 떨어진 고무 장난감에 기겁하며 서로의 머리채를 잡고 뒹구는 장면이었다.
"푸흡."
성진이 먼저 팝콘을 씹다 말고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에 진주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스크린 속 엉뚱한 실수와 슬랩스틱에 두 사람은 비슷한 타이밍에 어깨를 들썩이며 반응했다.
영화의 결말은 두 사람의 예상을 완벽하게 빗나갔다. 성진이 지목했던 시선 피하던 인물도, 진주가 의심했던 실실 웃던 인물도 범인이 아니었다. 사건의 전말은 아예 제3의 인물이 벌인 엉뚱한 촌극으로 밝혀졌다.
"봐라. 내가 뭐랬어. 그 형사는 처음부터 이상했다니까."
상영관 불이 켜지고 로비로 걸어 나오는 내내 진주가 억지를 부렸다.
"니가 언제 형사라 했노. 가운데 놈이라며."
"아니지, 형사가 마지막에 문 열고 들어올 때 내가 '헉' 했잖아. 그때부터 알아본 거지."
"참 나. 그때는 영화 보는 사람들 다 알았을 타이밍이다. 어디서 숟가락을 얹노."
성진이 어림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두 사람은 논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관 건물을 빠져나와 거리를 걸었다. 누가 먼저 어디로 가자는 말을 꺼낼 필요도 없이, 진주가 근처의 조용한 카페를 가리키자 성진도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맞췄다. 카페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아서도 한동안은 영화 이야기로 열을 올렸다. 진주가 자신이 먼저 눈치챘던 복선들을 늘어놓으면, 성진은 그건 감독이 대놓고 보여준 미끼였다며 깎아내렸다. 진주가 포스터 시선 방향 타령을 하던 성진의 어설픈 추리를 다시 끌어와 놀리면, 성진은 진주의 실눈캐 배신자론을 들먹이며 반격했다. 둘 다 보기 좋게 틀렸으니 서로 우기고 놀릴 여지는 차고 넘쳤다.
한바탕 웃고 떠들며 음료가 반쯤 줄어들었을 무렵, 대화가 잠깐 잦아들었다. 진주가 빨대로 얼음을 이리저리 휘젓다가 문득 물었다.
"어제 미팅은 잘 끝났어?"
"어. 다행히 거래처에서 샘플을 마음에 들어 하더라. 다음 주에 세부 견적만 한 번 더 확인하면 될 것 같다."
이야기를 듣던 진주는 유리잔 겉면에 맺힌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훔쳐냈다. 문득,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평온함의 실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금요일 저녁, 진주는 성진에게서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른 채 기다리지 않았다. 식은 저녁밥을 앞에 두고 혼자 화를 삭이거나, 카페에 덩그러니 앉아 다른 계획들을 보류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시간을 충분히 보내고 나와, 미리 바꾼 약속 시간에 맞춰 함께 영화를 보고 마주 앉아 웃고 있었다.
진주는 턱을 괸 채 성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음 주에도, 이 사람과 새로운 것을 보고 또 이런저런 실없는 농담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피어올랐다.
"우리 원래 금요일에 가려던 식당 있잖아."
진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거기 다음 주에 갈까?"
성진은 진주의 말에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캘린더를 열었다.
"다음 주…… 수요일은 거래처 미팅 끝나고 회식이 있을 것 같아가 좀 늦고. 딴 날은 다 괜찮다. 언제가 좋노."
"음, 나는 월요일은 회의 있어서 좀 피곤할 것 같고. 목요일 어때? 목요일 일곱 시."
"알았다. 목요일 일곱 시에 거기서 보자."
성진이 캘린더에 일정을 입력하는 것을 보며 진주는 빨대를 가볍게 물었다. 약속이 확정되자마자, 진주는 다시 탁자 위로 몸을 조금 기울이며 눈을 반짝였다.
"근데 솔직히 말해서, 아까 지하실 내려갈 때 내가 그 형사 쳐다본 거 봤지. 그때 내가 먼저 눈치챘다니까."
성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숨을 들이켰다.
"아까는 문 열고 들어올 때 알았다며. 언제 또 지하실로 바뀌었노."
"아니, 지하실에서부터 느낌이 쎄했다는 거지. 너는 오른쪽 아저씨가 변명을 그렇게 허술하게 하는 걸 보면서도 몰랐으면서."
끝난 줄 알았던 영화 이야기가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진주도 자신의 말이 다소 억지스럽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지 않으려 한 번 더 우겨보았다. 성진은 결국 픽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이 왜 포스터에서부터 그런 추리를 했는지 말도 안 되는 근거들을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