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y My DayFICTION
‹ 몬스테라 공동양육자 · 회차 목록
EPISODE 07

보내지 못한 말들

작가의 한마디

개찰구를 통과한 진주가 손을 한 번 흔들고는 계단 아래로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던 성진도 몸을 돌려 반대편 승강장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덜컹거리는 열차에 몸을 싣고 빈자리에 앉아 업무용 가방을 무릎 위에 고쳐 안았다. 불과 십여 분 전까지만 해도 바로 곁에서 나란히 걷던 진주의 온기와 목소리가 없어지니 집으로 돌아가는 몇 정거장의 시간이 평소보다 훨씬 길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성진은 무의식적으로 오늘 저녁 내내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들을 되짚기 시작했다. 연필 냄새를 핑계로 너무 호들갑을 떨며 놀린 건 아닌가. 칼국수를 먹을 때 내 거래처 얘기만 너무 늘어놓은 건 아닐까.

식당 앞에서 진주가 ‘난 조금 더 걷고 싶은데’라고 말했을 때, 성진 역시 밥만 먹고 곧바로 헤어지기는 아쉬웠다. 하지만 먼저 밥을 먹자고 제안한 것도, 계산을 한 것도 진주였으니 식사가 끝났으면 깔끔하게 돌려보내는 것이 예의라 여겨 역 방향을 가리켰던 터였다. 진주의 그 솔직한 제안은 성진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래서 속으로 흠칫 놀랄 만큼 반가웠던 말이었다.

그러니 진주가 확인하듯 되물었을 때 ‘어, 나도’ 같은 덤덤한 말보다는 좀 더 좋다는 표현을 해도 됐지 않았을까. 진주가 자신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물어봐 주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가슴을 간지럽혔다.

조심스러웠던 시간들을 떠올리다 보니 그의 머릿속을 점령한 것은 반성보다는 불쑥불쑥 끼어드는 진주의 표정들이었다. 편집숍 안에서 진주가 시향지를 내밀었을 때, 사실 성진은 향기보다 내민 손끝과 진주의 얼굴 윤곽이 먼저 눈에 들어와 하마터면 숨을 멈출 뻔했다는 것을 진주는 아마 모를 것이다.

한참을 생각하면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문이 닫히고 스테인리스 문짝에 반사된 자신의 얼굴을 무심코 바라보던 성진의 입술 사이로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광대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는 제 얼굴을 보며 성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같이 있을 때는 별말도 몬 했으면서, 인자 와서 혼자 별생각을 다 하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가벼운 재킷을 벗어 식탁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친 뒤 거실 불을 켰다. 스위치를 켜자마자 성진의 시선이 습관처럼 거실 창가 쪽으로 향했다.

창가 한구석은 휑하게 비어 있었다. 그곳에 커다란 초록색 잎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집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그쪽으로 눈길이 가는 관성 같은 것이었다. 창가 가까이 다가갔던 성진은 몸을 돌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빈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의 머릿속으로, 두 달 전 이 집 거실로 몬스테라를 낑낑대며 들여놓던 날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성진은 두 달 뒤 진주가 파견에서 돌아올 무렵에도 두 사람이 당연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연인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당연함이 산산조각 난 것은 화분을 맡은 지 불과 사흘 뒤였다.

진주가 파견을 떠나기 전 마지막 주말. 성진은 사무실에 남아 디퓨저 거래처에 보낼 향 샘플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원료 단가표 변동 관련으로 연락이 왔고, 전체적인 견적서 수정이 필요했다. 이미 주말이었으니 월요일에 출근해서 처리해도 큰일이 나는 업무는 아니었다.

그런데 성진은 그 파일을 열었다. 조금만 더 손을 보면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해야 할 일, 나중에 찝찝하게 남겨두느니 집중한 김에 끝내는 편이 낫다는 실용적인 판단이었다. 진주와의 저녁 약속 시간이 아슬아슬하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일이 조금 늦어질 것 같다고 사정을 설명하면 늘 그래왔듯 진주가 이해해 줄 거라 짐작했다.

성진은 약속 시간까지 남은 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도 마우스를 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예정된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그는 자료 저장을 누르고 진주에게 전화를 걸어 먼저 밥을 먹고 있으라는 말을 꺼냈다.

오늘 못 보면 두 달 뒤에 넉넉하게 보면 되고, 저녁이 늦어지면 밤에 얼굴을 보면 된다고 여겼다. 자신이 시간을 뒤로 미루는 동안, 약속 장소로 향하기 위해 준비하던 진주가 무엇을 포기하고 얼마나 막막하게 기다리는지는 그의 얄팍한 판단에 들어 있지 않았다.

화가 난 진주가 이별을 통보하고는 전화를 끊었을 때, 성진은 한동안 멍하니 책상 위 휴대폰과 모니터의 엑셀 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떻게든 일을 계속해보려 했지만, 방금 전까지 완벽하게 수정해 두었던 단가표의 숫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같은 줄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는지 모른다.

결국 성진은 그날 그 중요했다던 자료를 제대로 끝내지도 못하고 덮었다. 일을 끝마치려고 진주와의 약속을 미뤘는데, 정작 진주와의 관계가 끝나버리자 일 따위는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걸어볼까,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했다. 하지만 당장 전화를 걸어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떠올려보면, ‘일이 안 끝나는 걸 어떡하냐’는 답답한 자기변명뿐이었다. 성진은 휴대폰을 책상 서랍에 거칠게 밀어 넣었다. ‘내일, 화 좀 풀리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그것이 성진의 비겁한 유예였다.

이별 후의 두 달간 성진은 꾸역꾸역 출근했고, 거래처 사람들을 만나 웃으며 향을 팔았으며, 동료들과 점심을 먹었다. 바쁜 날에는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쓰러져 잤다. 문제는 일이 일찍 끝나는 저녁이나, 특별한 일정이 없는 주말의 공백이었다. 예전 같으면 자연스럽게 진주에게 통화 버튼을 눌렀을 시간에 덩그러니 손이 남았다.

처음 몇 주는 ‘나도 화가 안 풀렸다’는 핑계를 댔다. 한 달이 넘어가자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연락하느냐’는 쪽으로 핑계가 바뀌었다. 연락하지 못하는 이유는 매번 그럴싸하게 바뀌었지만, 결국 성진은 진주의 상처를 마주할 용기가 없어 계속 도망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몬스테라의 말려 있던 새잎이 조금 펼쳐진 것을 발견했다. 성진은 베란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다 말고 쪼그려 앉아, 전날과 미세하게 달라진 잎사귀를 휴대폰 카메라로 찍었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같은 각도에서 잎사귀를 찍었다.

"어제보다 쪼매 더 펴졌네. 이 정도면 티 나제."

화분 앞에 쪼그려 앉은 성진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사진을 확대해 보았다. 자신이 봐도 어제 찍은 사진과 구분이 잘 가지 않아 실없이 웃음이 났다. 하지만 진주라면, 이 작은 변화를 단번에 알아보고 신기해할 것 같았다.

"보내가 뭐 할 낀데. 사진 하나 띡 보내면 다가. 뭐라 할 줄 알고."

성진은 갤러리에서 가장 잘 나온 사진을 골라 진주와의 대화방에 보내려다가 휴대폰 화면을 신경질적으로 껐다. 식물 사진 하나로 두 달의 공백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덮고 말을 거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얄팍해 보였다. 사진은 보내지 못했지만, 성진은 매일 아침 분무기로 물을 뿌리며 진주의 식물을 살폈다. 돌보는 일 자체는 평온했고, 진주에게 닿지 못하는 두려움은 잎사귀 사이로 차곡차곡 쌓여갔다.

본문 삽화

헤어지고 난 날을 회상하던 성진이 휴대폰을 꺼내 진주와의 대화방을 열어 스크롤을 위로 쭉 올렸다.

이진주
화분 관리비 조금 보냈어. 두 달 동안 신경 써줬잖아. 고마워.

당시 성진은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다 입금 알림과 메시지를 거의 동시에 확인했다. 진주가 화분을 부탁했을 때부터 단 한 번도 수고비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퇴근 후 식물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텅 빈 집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는 일과였고, 무엇보다 진주의 흔적을 온전히 돌려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성진은 단 일 초의 고민도 없이 금액을 다시 돌려보냈다. 하지만 그 짧은 이체 과정에는 단순히 ‘돈을 받을 수 없다’는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주는 아주 깔끔하고 예의 바르게 고마움을 표하며 관계를 정산하려 했지만, 성진은 화분을 건네주던 날 현관문 밖으로 차마 뱉지 못한 말들이 턱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돈 오만 원과 건조한 인사 몇 줄로 이 지독한 인연이 완전히 종결되는 것을, 성진은 온몸으로 거부하고 싶었다.

이진주
알았어. 그럼 잘 지내.

돈을 한사코 거절하자 돌아왔던 진주의 마지막 메시지였다. 성진은 메시지를 읽자마자 입력창을 터치했다. 무엇이라도 답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깜빡이는 커서 앞에서 손가락은 굳어버렸다. ‘응, 너도 잘 지내’라고 보내면 정말로 영영 끝일 것 같았다. 그렇다고 ‘물 너무 자주 주지 마라’ 같은 주제넘은 참견을 덧붙일 수도 없었다.

결국 성진은 아무런 답장도 보내지 못했다. 퇴근 후 캄캄한 거실에 앉아, 성진은 이미 1이 사라진 그 문장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래 끝나는 거 뻔히 알면서, 뭘 더 바랐노."

성진은 대화방을 닫으려다 말고, 화면을 위로 올렸다. 화면을 끝도 없이 넘기자 낯선 패턴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진주
오늘 언제쯤 끝나?
박성진
아직 잘 모르겠다. 변수가 좀 생겨가.
이진주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

그리고 몇 시간 뒤.

박성진
미안, 오늘 좀 힘들겠다.
이진주
응. 알았어.

그 뒤로 성진이 ‘그럼 다음 주 수요일에 볼까?’ 하고 먼저 약속을 잡는 메시지는 단 한 줄도 없었다. 며칠 뒤, 진주가 또다시 먼저 묻고 있었다.

이진주
이번 주 주말에는 시간 돼?

그동안 성진은 이 대화들을 각기 다른, 그저 ‘정말 바빴던 개별적인 날’들로만 기억했다. 하지만 스크롤을 이어서 읽어 내리자, 자신이 약속을 던져버릴 때마다 진주가 매번 같은 체념을 삼키며 다시 손을 내밀어야 했던 지난한 과정이 하나의 선명한 궤적으로 보였다.

"그날은 진짜 거래처에서 사고를 쳐가지고 바빴는데……."

처음에는 화면을 보며 중얼중얼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다음 대화, 또다음 대화를 읽을수록 성진의 입은 무겁게 다물어졌다.

"약속 하나 먼저 잡아주는 게, 그기 뭐시라고 이래 안 했노."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핑계를 대며 도망쳤던 것은 그날 하루의 저녁 식사가 아니라, 진주라는 사람에 대한 책임감 그 자체였다. 진주가 마지막 날 갑자기 돌변해 헤어지자고 억지를 부린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쌓여온 무수한 기다림의 끝에서, 더 이상 깎여나갈 마음조차 남아있지 않아 스스로 끊어낸 것이었다.

다음 날 오후. 성진은 사무실 모니터 뒤편에서 몇 번이나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사과 문장을 다듬었다. 여러 변명 같은 말들을 쓰다가 백스페이스를 꾹 눌러 전부 지워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무엇을 외면했는지 그 사실부터 덤덤하게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장문의 문장을 메모장에 완성해 두고도 곧바로 보내지는 못했다. 퇴근 시간 무렵, ‘바쁘나’라는 짧은 말로 먼저 운을 뗐다. 퇴근길이라는 진주의 답장이 오자, 이제 정말로 진심을 꺼내어 보여야 한다는 사실에 숨이 턱 막혔다.

이진주
그때도 사과는 했잖아.

성진은 ‘이번에는 진짜 진심이다’라는 말을 먼저 치려다 손을 거뒀다. 과거에도 자신은 매번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해놓고 똑같은 짓을 반복했다. 진주가 자신의 사과를 믿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잠깐 시간을 내어줄 수 있겠냐고 물어본 뒤부터는 일 분이 멀다 하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다음 날 오후, 진주가 ‘금요일 일곱 시에 보자’고 수락의 메시지를 보냈을 때 성진은 크게 안도했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얼굴을 마주하고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막막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성진은 캘린더를 열어 일곱 시라는 시간에 굵게 밑줄을 긋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시간에 맞출 수 있도록 업무 일정을 쪼개어 맞추기 시작했다.

금요일 카페에서 오해 없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진주의 반응을 기다리는 게 그렇게 긴장되고 진이 빠질 수 없었다. 사과를 마친 뒤 진주가 휴대폰 속 식물 사진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킥킥 웃음을 터뜨렸을 때 성진은 이상하게 마음이 간지러웠다.

토요일의 예기치 않은 통화도 마찬가지였다. 전화기 너머로 바스락거리며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성진은 머릿속으로 진주가 방바닥에 앉아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수첩을 짚어가는 표정을 선명하게 그리고 있었다. 성진이 반가웠던 것은 진주가 자신의 일상을 다시 종알종알 들려주는 그 익숙한 목소리 자체였다.

오늘 식당에서 진주가 ‘너는 어떤 향이 제일 좋았는데?’라고 물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성진은 피식 웃었다. 거래처를 상대할 때처럼 논리 정연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뜬금없이 연필 깎는 냄새가 좋다고 주절거리는 바람에 진주에게 실컷 놀림만 받았다. 하지만 묘하게도 오늘 하루를 처음부터 훑어볼수록, 자책해야 할 실수들보다는 진주와 마주 보며 웃었던 순간들, 다시 입 밖으로 꺼내어 굴려보고 싶은 말들이 자꾸만 늘어났다.

빈 화분 자리를 다시 한 번 눈에 담은 성진이, 휴대폰 속 진주와의 가장 최근 대화로 시선을 옮겼다.

입력창을 터치한 성진의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잠시 맴돌았다. 굳이 집에 도착했냐고 또 연락을 남기면, 겨우 편안해진 진주에게 다시 부담을 지우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망설임이 일었다.

"아까 같이 걸을 때 입으로 뱉었으면 됐을 걸, 인자 와서 방구석에서 뭐 하노."

성진이 휴대폰을 쥔 채 짧게 자신을 타박했다. 성진은 더 이상 완벽한 타이밍이나 그럴싸한 명분을 재지 않기로 했다. 자판을 누르는 그의 손가락에 망설임이 사라졌다.

박성진
집에 잘 들어갔나.
박성진
나도 아까 밥만 묵고 헤어졌으면 아쉬울 뻔했다. 더 걸어서 좋았어.

오늘 진주가 ‘재미있었다’고 던져준 용기에, 뒤늦게나마 자신의 진짜 감정을 보태어 보내는 답장이었다. 전송 버튼을 누른 성진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려다 말고, 자신이 방금 보낸 두 줄의 문장을 다시 한번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본다고 답장이 빨리 오나."

성진은 휴대폰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화면이 어두워지자 손가락으로 한 번 건드려 다시 밝혔다.

작가의 한마디

덩딘 시점 한 번에 하느라 조금 길었습니다.

이야기 속 내 이름

한글 이름을 입력하면 조사가 함께 바뀝니다. 이 기기에만 저장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