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는 약속 시간인 일곱 시보다 십오 분쯤 먼저 식당 앞에 도착했다. 통유리 벽면 바깥쪽에 큼지막하게 붙은 메뉴판을 보며, 며칠 전 휴대폰 화면으로 봤던 들깨칼국수와 수육의 가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수육 사진이 생각보다 접시를 가득 채우고 있어서 진주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토요일 저녁, 다 못 먹을 거라고 놀리던 성진의 메시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진주야."
골목 쪽에서 성진이 걸어오고 있었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은, 오히려 조금 이른 등장이었다. 가벼운 재킷 안에 단정한 셔츠를 입고, 한 손에는 서류가 든 업무용 가방을 들고 있었다.

"일찍 왔네. 퇴근하고 바로 온 거야?"
"어. 오후에 거래처 들렀다가, 사무실에서 남은 것 좀 정리하고 바로 나왔다."
진주는 성진의 어깨와 가방을 한 번 훑어보았다. 금요일 합정역 앞에서 보았던 성진은 '사과하러 온 사람'의 긴장이 배어 있었지만, 오늘은 늦은 오후까지 거래처와 사무실을 오가다 막 퇴근한 직장인의 옷차림이었다.
"들어가자. 예약 안 했는데 다행히 자리는 있네."
두 사람은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번거로움 없이 곧바로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자마자 진주가 메뉴판을 보며 들깨칼국수를 고르자, 성진도 같은 것을 주문하겠다고 했다. 진주는 메뉴판 하단의 수육 사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성진을 쳐다보았다.
"수육도 시킬 거지?"
"니 위 늘려왔다며. 둘이 다 먹을 수 있겠나."
"먹기 전부터 그러기야? 못 먹으면 남기면 되지."
진주가 가볍게 흘겨보며 직원을 불렀다. 직원이 주문을 받아 가는 사이, 성진은 가방을 의자 옆 빈 공간에 내려놓고 물병을 들어 진주의 컵을 채웠다. 진주는 수저 두 벌을 꺼내 한 벌을 맞은편에 놓았다.
"오늘 거래처에서는 뭐 했는데?"
"어, 의뢰가 새로 들어와가 미팅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은 각자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가볍게 늘어놓았다.
"나왔습니다.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직원이 김이 오르는 뚝배기 두 개와 수육 접시를 내려놓았다. 진주는 숟가락으로 걸쭉한 들깨 국물부터 한 모금 떠먹었다. 파견지에서 먹었던 것과 완벽하게 똑같은 맛은 아니었지만, 고소하고 묵직한 국물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성진은 숟가락을 들기 전, 진주가 한입 먹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부터 살피더니 자기도 국물을 맛보았다.
"괜찮네."
"그치. 근데 조금만 더 걸쭉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이게 낫다. 너무 뻑뻑하면 면 넘기기 힘들더라."
성진은 수육 한 점을 집어 겉절이와 함께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식탁 위로 올랐다.
"역시 칼국수 집은 김치가 본체야."
"여는 겉절이가 달달해가 수육이랑도 억수 잘 어울린다."
"오, 그래?"
식사가 중간쯤 지났을 때, 진주가 토요일에 들었던 디퓨저 거래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그때 주문 들어왔다던 거, 언제 납품하기로 했어?"
"다음 달 초. 문제 없으면 다음 주 중으로는 제조 완료되지 않을까 싶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칼국수 면을 젓가락으로 휘젓던 진주가 문득 궁금해진 것을 질문했다.
"근데 넌 그중에 뭐가 제일 좋았는데?"
"뭐가?"
"아까 납품 확정됐다던 향. 결국 걔네가 고른 향이 네가 맡기에도 제일 좋았어?"
진주의 질문에 성진은 젓가락으로 겉절이 끝부분을 작게 찢어내며 대답했다.
"아이다. 나는 저번에 개발팀에서 다시 넘겨준 샘플 중 하나가 더 나았는데, 고객사 쪽에서는 그게 너무 무겁다고 빼 달라 하더라고."
"처음 샘플이 어떤 향이었는데?"
"나무 냄새 나는 쪽."
진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무 냄새도 여러 가지잖아."
"음…… 새 연필 깎으면 나는 냄새 있지 않나. 연필밥 냄새."
"연필? 그 냄새를 디퓨저로 맡고 싶다고?"
"나는 좋은데. 왜, 이상하나."
"그냥, 신기해서."
성진이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기울이며 눈을 크게 떴다. 연필 냄새를 돈 주고 사고 싶다는 성진의 엉뚱한 취향에 진주가 킥킥 웃었다. 그에게서는 늘 머스크향이 났다. 그래서 그런 향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늘 일 이야기를 할 때는 납품 날짜나 출장 일정만 먼저 물어봤다는 걸 깨달았다.
"일은 어떻노?"
성진의 질문에 진주는 출장 복귀 후 정리하고 있는 전시 결과 보고서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보탰다.
"출장 다녀와서 좀 정신없긴 했는데, 그래도 이번 프로젝트는 얼추 끝났어. 그때 안내판 가려졌던 거. 보고서에 현장 사진이랑 관람객 동선 꼬인 거 다 첨부하려니까, 수첩에 막 날려 쓴 글씨가 내가 봐도 못 알아보겠는 거야. 그거 해독한다고 오늘 오전 다 보냈어."
"아, 그래서 토요일에 통화할 때 그래 종이 뒤지는 소리가 났나."
성진의 반응에 진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다 들렸어?"
"어. 처음에는 뭐 과자 봉지 뜯는 줄 알았다."
"과자 안 먹었거든."
자신이 설명에 열을 올리는 동안 수첩을 뒤적거리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고스란히 넘어갔다는 사실에 진주가 머쓱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통화 중 각자의 공간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퍼즐을 맞추듯 뒤늦게 알아가고 있었다.
결국 수육은 두어 점 남았다. 진주가 배가 부르다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잠시 뒤, 진주가 먼저 계산대로 향했다. 먼저 밥을 먹자고 제안한 사람이 사는 것이 당연했다.
"잘 묵었다."
식당 밖으로 나온 성진이 가방을 고쳐들며 말했다. 진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성진이 자연스럽게 망원역 쪽을 가리켰다.
"지하철, 타고 가나?"
진주는 바로 발걸음을 떼지 않고 시계를 확인했다. 여덟 시 십오 분. 저녁 식사를 마쳤고 계산도 끝났으니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진주는 이대로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해버리고 싶지 않았다.
진주는 잠깐 망설이다가 성진에게 직접 물었다.
"너 집에 가서 할 일 있어?"
"아니. 왜?"
"난 조금 더 걷고 싶은데."
성진은 걸음을 멈추고 진주를 쳐다보았다.
"어. 걷자."
성진의 대답은 짧았다. 진주는 그가 단지 자신이 제안했기 때문에 억지로 맞춰주는 것인지 신경이 쓰여 한 번 더 물었다.
"나한테 맞추는 거 말고. 너도 그러고 싶어?"
"어. 나도."
성진은 눈을 피하지 않고 담백하게 대답했다. 진주가 먼저 역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자, 성진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으로 걸음을 맞췄다. 두 사람은 뚜렷한 목적지 없이, 작은 카페와 공방들의 불빛이 이어지는 망리단길의 골목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십 분쯤 걸었을 무렵, 진주의 시선이 골목 모퉁이에 자리한 작은 편집숍의 쇼윈도에 멈췄다. 따뜻한 조명 아래에 캔들과 디퓨저, 룸스프레이 같은 향 제품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아까 말한 거, 저런 데도 있어?"
진주가 성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성진은 통유리 너머의 진열대를 살피더니 대답했다.
"글쎄. 비슷한 거라면 아마도 있지 싶은데."
"들어가 보자."
진주가 앞장서서 가게 문을 열었다. 가게 안은 좁고 은은한 향기로 가득했다. 성진은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숨을 깊게 마셨다.
"이거 냄새 좋다."
진주가 처음 집어 든 시향지의 향을 맡으며 말했다. 상큼하고 가벼운 시트러스 계열의 향이었다. 진주가 향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 성진은 반대쪽 진열대에서 갈색 시약병 모양의 디퓨저 앞에 놓인 시향지를 들며 말했다.
"이리 와 봐라."
성진이 진주를 불렀다. 진주가 다가가 성진이 내민 시향지에 코를 댔다.
"……어, 진짜네."
"맞지?"
"응. 진짜 연필 깎을 때 나는 그 나무 냄새다."
진주의 동의에 성진이 조금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나름 수요가 있는 향이라니까는."
"아니, 누가 틀렸대? 냄새 안 좋다고 한 적도 없는데 혼자 왜 이래."
"편안해지는 향이지 않나?"
"음, 어릴 때 필통 냄새 같아. 좀 추억이 생각나는 향이긴 하네."
진주가 성진의 호들갑을 가볍게 타박하며 웃었다. 같은 향을 맡아도 진주의 머릿속에는 학창 시절 새 학기에 샀던 필통 냄새가 떠올랐고, 성진은 묵직하고 차분한 나무 냄새 자체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름만 봐서는 무슨 향인지 진짜 모르겠다. 다 영어로 복잡하게 써 놔서."
진주가 진열대에 붙은 제품 설명 카드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 그래서 거래처 만날 때도 말로만 설명하면 안 된다. 시원하다, 우디하다 이런 말로만 표현하면은 서로 생각하는 향이 다 달라서, 무조건 샘플 들고 가야 일이 빨리 끝난다."
성진이 시향지 끝을 가볍게 털며 대답했다. 진주는 샘플들이 빼곡하게 놓여 있는 성진의 선반이 생각나 기분이 묘해졌다. 연애 초반에는 그 향들에도 궁금증을 가졌던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주는 직원을 불러 자신이 방금 좋다고 했던 시트러스 향과 비슷한 제품들을 더 추천받았다. 그 사이 성진은 조금 떨어진 캔들 진열대로 이동해 다른 향들을 맡아보고 있었다.
직원의 추천을 받은 향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찾은 진주가 성진 쪽으로 돌아섰다.
"성진아, 이것도 한 번 맡아봐."
성진이 캔들을 내려놓고 진주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진주는 그가 코를 댈 수 있도록 시향지를 쥔 손을 그대로 뻗고 기다렸다. 성진의 얼굴이 진주의 손가락 한 뼘 앞까지 다가왔다.
"이것도 좀 가볍네. 니가 아까 처음 집었던 거랑 비슷한데?"
"그렇지? 나는 계속 이런 쪽이 더 당기네."
진주는 직원이 건네준 시향지 두 장을 겹쳐 들고 숍 밖으로 나왔다. 하나는 자신이 고른 상큼한 향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진이 골랐던 마른 나무 향이었다. 성진이 골랐던 향을 다시 맡아보니, 처음보다는 한결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거 별로라며. 와 계속 맡노?"
진주가 손에 든 시향지를 번갈아 맡는 모습을 보며 성진이 농담을 건넸다.
"별로라고는 안 했어. 연필 냄새 난다고 했지."
가자미눈으로 하는 진주의 대꾸에 성진이 소리 내어 웃었고, 진주도 시향지를 내려다보며 따라 웃었다. 그가 왜 이런 향을 편안해하는지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어느덧 두 사람의 발걸음이 다시 망원역 입구에 다다랐다. 식당 앞에서는 조금 더 같이 걷고 싶어 걸음을 늦췄지만, 이제는 나란히 걸으며 밤거리를 충분히 구경한 뒤였다.
"저녁 잘 묵었다."
성진이 계단을 내려가며 먼저 가볍게 인사했다. 진주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오늘 저녁을 제안하고 걷자고 했던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꺼내어 놓았다.
"오늘 재밌었어."
"내도."
"밥만 먹고 갔으면 아까울 뻔했네."
진주의 말에 성진은 가만히 얼굴을 쳐다보며 웃었다. 진주는 가방 지퍼를 열어 안쪽 주머니에 두 장의 시향지를 밀어 넣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성진은 개찰구 쪽으로 몸을 틀지 않은 채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갈게. 조심해서 들어가."
진주는 개찰구를 지나려다 돌아서서 손을 살짝 들었다. 자신을 보고 있던 성진이 마주 손을 흔들었다. 진주가 카드를 찍은 뒤에야 그도 몸을 돌렸다.
성진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을 때는 왜 이제 와서 사과하려는지 궁금했다.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헤어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가 궁금했다.
오늘은 그냥, 먼저 걷자고 하기를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