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y My Day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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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04

사과가 늦게 도착했다

작가의 한마디

퇴근 시간의 합정역 7번 출구 앞은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과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뒤엉켜 있었다. 진주는 사무실을 나서며 화장실 거울 앞에서 한 번 쓸어 넘겼던 머리를 다시 매만지며 계단을 올라왔다.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성진은 출구 앞 가로등 아래 서 있었다. 거래처를 만나러 갈 때 입던 정장보다는 좀 더 단정한 셔츠에 짙은 면바지 차림이었다. 진주보다 먼저 도착해 있던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지 않고 곧장 진주가 걸어오는 방향을 보고 있었다.

본문 삽화

"왔나."

성진이 먼저 짧게 인사를 건넸다.

"어. 오래 기다렸어?"

"아니다. 나도 방금 왔다."

가까이 다가간 진주는 성진을 가볍게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 일 늦게 안 끝났나."

"응. 복귀하고 밀린 거 다 쳐내서 오늘은 칼퇴했어."

역에서 조금 떨어진 카페로 걸어가는 동안 두 사람은 짧은 말을 주고받았다. 예전처럼 오늘 점심 메뉴가 무엇이었는지, 부장의 기분은 어땠는지까지 시시콜콜 늘어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난번 집에서 만났을 때처럼 매 문장마다 어색하게 선을 그으며 걷지는 않았다.

카페에 들어서자 성진은 메뉴판 앞을 진주에게 내어주었다. 진주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르고 물러서자, 성진도 같은 메뉴를 주문하고 카드를 냈다. 진주는 굳이 지갑을 열어 결제 실랑이를 벌이지 않았다.

진동벨이 울리고, 두 사람은 창가 쪽 구석 자리에 마주 앉았다. 유리잔 바깥으로 물방울이 맺히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던 진주가 빨대를 집어 들 때였다.

"내가 미안했다."

성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문자로도 말했지만, 나는 진짜 그날 약속 한 번 못 지킨 것 때문에 니가 헤어지자 한 줄 알았다. 미리 연락해달라 한 거, 못 만나면 다음 약속 잡아달라 했었는데…… 매번 기다려주던 걸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거더라고."

성진은 잔 겉면의 물기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을 골랐다.

"맨날 미안하다 해놓고 달라지는 게 없었으니까, 헤어지자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그냥 일 때문이니까 이해해 줄 거라 생각하고, 정작 내가 미루고 나면 니가 어떤 마음으로 기다렸는지는 한 번도 안 물어봤더라."

진주는 성진의 눈을 쳐다보았다.

"늦어질 수 있지. 근데 늦어진다는 연락을 받고도 다른 약속은 못 잡았어. 오늘 아예 못 보는 건지, 더 기다리면 되는 건지 모르니까."

진주는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하니까 멀리 나갈 수도 없고, 친구를 만날 수도 없었어. 결국 저녁 내내 비워두고 그냥 네 연락만 기다려야 했어. 그게 반복되니까, 내 시간이 나한테 있는 게 아니라 네가 언제든 옮겨도 되는 시간처럼 느껴졌어. 네가 모든 시간을 나한테 맞춰주길 바랐던 게 아니야. 그냥, 내 시간도 네 시간만큼 중요하게 여겨주길 바랐어."

"……알고 있다."

성진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니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 내가 안일했던기다."

"그런데, 하나만 더 물어볼게."

진주가 탁자 위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우리 헤어지던 날. 내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너는 왜 아무것도 안 묻고 알았다고만 했어?"

성진은 마른세수를 한 번 길게 하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그때는 나도…… 억울한 마음이 컸다."

"일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몇 번을 말해도 니가 안 받아주니까. 내가 그동안 노력했던 것도 다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니가 얼마나 지쳤는지 묻기보다는 내 기분 챙기는 게 먼저였다."

"나중에는 연락을 안 한 거야, 못 한 거야?"

"연락하려다가도, 니가 또 같은 말이냐고 하면 내가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계속 미뤘다."

"나는 너도 그만하고 싶었던 줄 알았어."

성진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진주는 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날 성진이 하지 않았던 말들을, 자신은 그렇게 받아들였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 진주는 창밖을 한 번 내다보았다가, 남은 음료를 가볍게 저었다.

"그 화분 있잖아."

성진이 고개를 들었다.

"새로 난 잎이 책장에 닿더라고. 예전 자리보다 조금 앞으로 빼놨어."

"아, 그 잎. 내도 그거 펴지는 동안 사진 찍어둔 거 있는데."

성진이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려다 멈칫했다. 진주는 가볍게 턱을 까닥였다.

"보여줘 봐."

성진이 휴대폰 갤러리를 열어 진주 쪽으로 내밀었다. 진주는 화면을 넘기며 사진들을 살폈다.

"……이거 다 같은 날 찍은 거 아니야?"

진주는 앞 사진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다음 사진을 넘겼다. 같은 자리, 같은 각도였다. 바로 앞 사진과 큰 차이가 없었다.

"아이다. 자세히 봐라. 요 끝에 잎사귀가 쪼매 더 펴졌잖아."

성진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키며 항변했다.

"글쎄. 내 눈엔 똑같은데."

"아, 진짜라니까. 그때는 분명히 달랐다."

성진이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자, 진주는 소리 내어 웃었다. 성진도 머쓱한 듯 따라 웃었다. 카페 안의 소음 사이로 두 사람의 겹쳐진 웃음소리가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진주는 사진을 몇 장 더 넘겨보다가 성진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잔 바닥에 깔린 얼음이 다 녹아갈 무렵, 진주가 시계를 확인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짐을 챙겨 일어났다.

카페를 나서기 전, 진주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너는 오늘 사과하고 나면, 이걸로 끝인 거야?"

성진은 가방을 고쳐 매려던 손을 멈추고 진주를 마주 보았다.

"아니다. 나는 아직 니 좋아한다. 다시 만나고 싶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근데 오늘 사과한 거는 그거랑 상관없다. 니가 다시 안 만나준다 해도, 내가 잘못한 거는 잘못한 거니까."

진주는 성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도 오늘 사과 들으러 나온 거였어. 다시 만날지 어떨지는 나도 아직 몰라."

성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 입구에 도착한 두 사람은 멈춰 섰다.

"조심해서 가라."

"응. 너도."

두 사람은 각자의 방향으로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진주는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머릿속에는 성진의 낮고 진중한 목소리와, 휴대폰 속 비슷한 사진들을 보며 억울한 듯 항변하던 엉뚱한 표정이 교차했다.

그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날 왜 입을 닫았는지도 처음으로 들었다. 오늘 만나기를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문득 진주는, 자신이 성진에게 과거의 일은 여러 가지 물었지만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는 제대로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두 달 동안 회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끼니는 잘 챙겨 먹었는지, 창가에서 화분이 빠져나간 빈자리는 어떤지.

분명 사과를 들으러 나간 자리였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졌다. 진주는 핸드백 안으로 손을 넣어 휴대폰을 쥐었다.

작가의 한마디

변한 건 없니

이야기 속 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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