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y My Day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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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09

클린이 입장

작가의 한마디

토요일 오전, 희영은 거실 바닥에 앉아 초크백과 테이프를 가방에 쑤셔 넣고 있었다. 전날 하루 종일 들고 다녔던 발레 가방 대신 오늘은 익숙한 클라이밍 장비 가방이었다. 개인 암벽화를 챙기고 물병 뚜껑을 잠그려던 때, 바닥에 내려둔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윤도운
오늘 그 신림 클라이밍 가십니까
윤도운
어제 한번 매달려보라매요. 함 가볼까 하는데

희영은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작게 웃었다. 카페에서 팔 길이로 시비를 거는 도운에게 홧김에 한번 와보라고 한 말이었다. 설마 정말 올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박희영
진짜 올 거예요?
윤도운
오라매요
박희영
근데 클라이밍 아예 처음이죠?
윤도운
예. 진짜 처음입니다
박희영
그럼 체험강습부터 들어야 돼요
박희영
여기 일일이용+대여화+30분 강습 묶어서 3만원쯤 해요

희영은 암장 예약 페이지를 찾아 링크를 보냈다. 주말 초심자 체험강습은 시간대별로 몇 자리씩 열려 있었고, 마침 희영이 평소 가는 시간과 가까운 회차에 빈자리가 남아 있었다.

잠시 뒤 도운에게 예약했다는 답이 왔다.

희영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가방 지퍼를 닫았다. 어제 카페에서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이 바로 다음 날 실제 약속이 되어버린 게 조금 웃겼다. 새로운 클린이라니 살짝 군침이 도는 것 같기도 하고.

오후의 암장은 주말답게 북적였다. 중앙에 커다란 샹들리에가 내려오는 높은 천장 아래로 색색의 홀드가 박힌 벽들이 이어져 있었다. 매트 위에서는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벽을 올려다보거나, 방금 실패한 동작을 허공에 손으로 그려보고 있었다.

도운은 체험강습 시작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프런트에서 예약 확인을 마치고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다 희영을 발견했다.

벽 앞에 선 희영이 보였다.

발레 학원에서 늘 검은 레오타드에 핑크 타이츠를 입고 자기 자세를 확인하느라 거울만 뚫어져라 보던 모습과는 달랐다. 편한 클라이밍 팬츠와 운동용 상의 차림의 희영은 허리에 초크백을 찬 채 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가락에 초크를 묻히고, 발끝으로 매트 위를 짧게 짚으며 머릿속으로 동선을 그려보는 모습에 망설임이 없었다. 지나가던 회원이 말을 걸자 자연스럽게 웃으며 몇 마디를 주고받고 다시 벽을 바라봤다.

도운은 그 모습을 잠깐 지켜보다가 안쪽으로 걸어갔다.

희영이 먼저 그를 발견했다.

"진짜 왔네요?"

"돈 주고 예약까지 했는데 와야죠."

희영은 도운의 검은 운동복 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프런트 쪽을 가리켰다. 체험강습부터 듣고 오라는 뜻이었다.

도운이 대여 암벽화를 받아 신다가 금세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왜요?"

"이거 너무 작은 거 아닙니까? 앞이 꽉 차는데."

희영이 신발 끝을 한번 내려다봤다. 원래가 아프지 않은 정도로 꽉 끼게 신는게 정석이고, 일반 운동화처럼 앞에 여유가 있으면 안된다 설명을 해주자 도운은 영 못 미더운 얼굴로 자기 발을 내려다봤다.

잠시 뒤 체험강습 참가자들이 한쪽 초보 벽 앞으로 모였다. 도운을 포함해 서너 명 정도였다.

강사는 먼저 볼더링장 이용 규칙부터 설명했다. 누군가 등반 중인 벽 아래로 들어가지 않는 것, 올라가기 전에 주변과 매트를 확인하는 것, 무리해서 버티지 말고 떨어질 때는 바닥을 손으로 짚지 않은 채 무릎을 굽혀 충격을 흡수하는 것. 시작 홀드와 완등 홀드를 구분하는 방법도 짚어줬다.

이어 가장 쉬운 벽에서 기본 움직임을 보여줬다. 팔로 몸을 계속 끌어당기기보다 가능한 한 길게 두고, 손보다 발을 먼저 보며, 다리로 몸을 밀어 올리는 식이었다.

도운은 강사의 시범을 꽤 진지하게 봤다.

그리고 자기 차례가 되자 설명을 들은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양팔에 힘부터 잔뜩 줬다.

멀찍이서 쉬운 문제로 몸을 풀던 희영이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복싱으로 단련된 힘 덕분에 몇 동작은 그냥 당겨 올라갔지만, 금세 전완이 빳빳해졌다. 강사가 팔을 펴고 발을 보라고 다시 짚어주자 그제야 움직임이 조금씩 달라졌다.

체험강습은 약 삼십 분 만에 끝났다. 마지막에는 초보 문제 하나를 직접 완등해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도운은 첫 시도보다 확실히 힘을 덜 쓰면서 마지막 홀드까지 잡았다.

강습이 끝난 뒤 도운은 손을 털며 희영 쪽으로 걸어왔다.

"와, 이거 생각보다 빡세네."

도운의 투덜거림에 살짝 웃은 희영은 체험강습에서 했던 것보다 조금 다른 쉬운 문제 하나를 골랐다. 도운은 시작 전에는 제법 자신만만했지만 벽에 붙자 다시 습관처럼 홀드를 세게 움켜쥐었다. 다만 이번에는 강습에서 배운 대로 스스로 팔을 펴고 발 위치를 확인하려고 했다.

첫 시도에서는 중간에 내려왔다. 두 번째에는 희영이 아래에서 발 하나만 짚어줬고, 도운은 그걸 바로 적용했다. 몸을 옆으로 틀고 다리로 벽을 밀어내자 훨씬 수월하게 다음 홀드가 잡혔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마지막 홀드를 잡은 도운이 매트로 내려왔다.

"오. 생각보다 잘하시는데요?"

도운이 바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생각보다'는 언제쯤 빼줄 겁니까."

평소처럼 말이 오갔다. 희영은 다음 문제로 이동하려다가 문득 도운이 벽 한쪽을 바라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근데 어제 말한 건 어느 겁니까?"

희영이 시선을 따라가자, 며칠째 자신을 애먹이던 새 세팅 문제가 보였다.

"저거요."

"아, 그 팔 짧아서 안 닿는다는 거."

"팔 길이 때문 아니라니까요. 벽 각도가 꺾여 있어서 저기서 체중 싣기가 엄청 까다로운 거라니까."

희영은 바로 암벽화 앞부분을 매트에 몇 번 눌러 맞추고 벽 앞으로 갔다. 도운은 한발 물러나 지켜봤다.

희영의 첫 시도는 생각보다 짧게 끝났다.

시작부터 몇 동작은 거침없었다. 발을 홀드 위에 정확하게 올리고 몸을 틀어 무게를 이동하는 동작도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카페에서 열변을 토했던 바로 그 구간, 벽의 각도가 꺾이는 면으로 넘어가는 순간 중심이 바깥쪽으로 밀렸다. 다음 홀드로 손을 뻗기 전에 체중이 빠졌고, 희영은 그대로 매트에 떨어졌다.

도운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8년 했다매요."

"8년해서 이 정도 하는 거거든요?"

희영은 전혀 타격받지 않은 얼굴로 매트에서 일어났다. 다시 벽 앞에 서서 방금 지나온 홀드들을 차례로 훑었다. 어느 지점에서 몸이 떠버렸는지 생각하는 듯 허공에 손을 한번 뻗어봤다.

도운도 장난을 그치고 벽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두 번째 시도에서는 조금 더 나아갔다. 희영은 처음과 진입 순서를 조금 바꿔 꺾이는 면에 몸을 붙여봤다. 이번에는 다음 홀드에 손끝이 거의 걸렸지만, 체중을 끝까지 싣지 못하고 다시 떨어졌다.

짧게 숨을 내쉰 희영이 매트에 앉았다. 짜증을 내는 대신 다시 벽만 올려다봤다. 손으로 허공에 동작을 그려보고, 발을 어디에 둘지 몇 번 눈으로 짚어보며 혼자 무언가를 계산했다.

도운은 옆에 서 있다가 어느 부분이 자꾸 안 되는지 물었다. 희영은 기다렸다는 듯 벽이 꺾이는 지점을 가리켰다. 멀리 뻗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다음 홀드로 넘어가기 전에 저 각도에서 체중을 제대로 실어야 하는데 자꾸 몸이 바깥으로 빠진다는 설명이었다.

카페에서 테이블과 액자를 가리키며 열변을 토하던 얘기가 실제 벽 위에서 그대로 보였다.

한참 설명하던 희영이 문득 도운을 봤다.

"도운 씨, 저 이번에 올라가는 거 영상 하나만 찍어줄래요? 어디서 몸이 뜨는지 좀 보게."

도운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를 켰다. 희영이 벽 앞으로 가는 모습을 화면 안에 맞췄다.

세 번째 시도가 시작됐다.

앞선 두 번과 같은 구간까지 도착한 희영은 이번에는 바로 다음 홀드로 손을 뻗지 않았다. 꺾인 면에서 자세를 한번 정리하고, 발에 체중이 실리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몸을 옮겼다. 이번에는 중심이 바깥으로 빠지지 않고 손이 다음 홀드에 걸렸다.

도운은 카메라 화면을 보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짧게 숨을 내쉬었다. 희영은 그대로 남은 동작을 이어갔다. 마지막 홀드까지 잡아낸 뒤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매달려 있던 희영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도운과 눈이 마주쳤다.

희영이 활짝 웃었다.

발레 학원에서 서로 실수한 걸 보며 터뜨리던 웃음과는 달랐다. 누굴 놀리는 것도, 민망함을 감추는 것도 아닌 얼굴이었다. 몇 번이나 실패했던 걸 결국 해냈다는 기쁨이 그대로 묻어났다.

"됐죠?"

도운의 대답이 아주 조금 늦었다.

"……예. 됐네요."

희영은 매트로 내려와 초크 묻은 손을 털며 도운에게 다가왔다. 도운은 촬영을 끝내고도 잠깐 그대로 서 있었다.

희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뭘 그렇게 봐요?"

"예?"

"왜 그렇게 쳐다봐요."

그제야 도운이 시선을 한번 피했다가 다시 희영을 봤다. 평소 같으면 바로 한마디 놀렸을 텐데, 이번에는 입을 열기까지 짧은 틈이 생겼다.

"아니. 진짜 잘하길래."

희영도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뭐, 8년 했으니까요."

괜히 초크백 입구를 정리하던 희영이 먼저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도운 차례였다.

조금 전보다 한 단계 어려운 문제 앞에 선 도운은 첫 시도에서 금방 떨어졌다. 희영이 발을 놓을 위치를 짚어주자 그는 말없이 벽을 다시 올려다봤다.

두 번째 시도부터는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체험강습에서 배운 기본과 희영이 짚어준 부분을 하나씩 적용하고, 실패하면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갔다. 평소 발레 학원에서 어설픈 동작 하나에도 억울하다고 투덜거리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희영은 아래에서 그 모습을 보다가 잠깐 시선을 멈췄다.

며칠 전 도운이 보내온 붉은 핸드랩 사진이 문득 떠올랐다. 복싱할 때도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싶었다. 입을 다물고 벽 위 홀드만 바라보는 표정이 평소와는 제법 달랐다.

도운이 아래를 내려다봤을 때 희영은 조금 늦게서야 다음 발 위치를 가리켰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도운도 마지막 홀드를 잡았다. 매트로 내려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자기 운동신경을 자랑하는 모습에 희영은 다시 평소처럼 코웃음을 쳤다. 이제 막 초보 문제 하나 성공한 거라며 바로 기를 눌러놓자 도운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렇게 몇 문제를 더 반복하고 나니 도운이 양손을 펴고 찡그렸다.

"와, 손바닥 따갑네."

희영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손 줘봐요."

도운이 별생각 없이 손을 내밀었다. 희영은 그의 손바닥을 위로 펼쳐 손가락 아래쪽을 살폈다. 홀드를 세게 쥔 부분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봐요. 너무 꽉 잡아서 그래요. 아까 강사님도 힘 빼라고 했잖아요."

희영은 익숙하게 마찰된 부분을 손끝으로 한번 눌러 확인했다. 도운은 대답하지 않고 잠깐 아래를 내려다봤다.

희영의 손이 자기 손을 잡고 있었고, 고개를 숙인 얼굴이 생각보다 가까웠다.

"많이 아파요?"

희영이 고개를 들었다.

도운의 대답이 반 박자 늦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더."

희영은 별다른 생각 없이 손을 놓았다. 피부가 벗겨진 건 아니라 굳이 테이핑할 정도는 아니었다.

도운은 놓인 자기 손을 한번 내려다보다가 손가락을 가볍게 접었다 폈다.

운동을 마무리하기 전, 희영은 도운이 조금 전 성공했던 문제를 다시 해보라고 했다. 첫 클라이밍인데 기록 하나쯤은 남겨야 하지 않겠냐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도운은 처음엔 됐다고 했지만 결국 다시 벽에 붙었다. 이번에는 희영이 촬영했고, 도운은 아까보다 훨씬 수월하게 마지막 홀드까지 올라갔다.

영상을 확인한 희영이 생각보다 진짜 잘한다고 인정하자 도운은 또 '생각보다'를 빼달라고 투덜거렸다.

암장 벤치에 앉아 장비를 정리할 무렵, 도운의 전완은 눈에 띄게 팽팽해져 있었다. 그는 손을 연신 털면서 희영이 이걸 정말 몇 년째 꾸준히 하고 있냐며 대단해했다. 희영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어깨를 들썩였다.

“와 직접 보니까 인정입니다.발레 할때랑 딴 판이네요.”

“거 칭찬을 할꺼면 그냥 하지 발레는 또 왜 꺼낸대요?”

“암튼 칭찬 아입니까. 달라 보이네요.”

세모눈을 뜨던 희영은 장난기가 섞이지 않은 칭찬으로 돌아오자 오늘따라 왜 그렇게 후하냐며 괜히 웃어넘겼다.

그날 밤, 샤워를 마친 도운은 침대에 기대앉아 희영과의 카톡을 열었다. 처음 해본 클라이밍 영상이 어떻게 찍혔나 확인하려던 참이었다. 암장을 나서기 전 서로 카톡으로 보내준 영상 두 개가 나란히 남아 있었다.

도운은 별생각 없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 속 희영이 벽을 올라갔다. 두 번이나 실패했던 구간, 벽의 각도가 꺾이는 지점에서 몸을 정리하고 체중을 실은 뒤 다음 홀드를 잡았다. 마지막 홀드에 손이 닿은 뒤에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카메라 쪽을 보며 웃는 순간 영상이 끝났다.

'잘하긴 진짜 잘하네.'

잠깐 멈췄던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화면을 다시 눌렀다.

작가의 한마디

저는 클라이밍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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