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익숙한 디퓨저 향이 감도는 스튜디오 탈의실에서 희영은 평소처럼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색 레오타드에 핑크 타이츠, 얇은 워머 티셔츠. 지난 주말 암장에서 초크를 잔뜩 묻힌 편한 바지 차림과 교차되어서인지 오늘따라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묘하게 낯설게 느껴지긴 했지만, 희영은 가볍게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내고 스튜디오 문을 열었다.
"아, 오셨습니까."
매트를 깔고 엎드려 있던 도운이 고개를 들며 인사를 건넸다. 평소와 다름없는 까치집 머리에 헐렁한 검은색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일찍 오셨네요. 근데 폼이 왜 그래요?"
희영이 매트를 들고 도운의 대각선 앞자리에 자리를 잡으며 물었다. 도운은 평소보다 훨씬 더 뻣뻣한 자세로 엎드려 끙끙대고 있었다.
"말도 마십쇼. 다음 날 아침에 등짝이랑 전완근이 다 당겨가 세수하는데 팔이 안 올라가더라니까요. 한 이틀은 고생했습니다."
도운이 그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팔뚝을 한 번 쓸었다. 그 엄살에 희영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첫날인데 너무 힘으로 타셨어요."
"아니, 매달려 있는데 어떻게 힘을 뺍니까. 떨어질까 봐 무서운데."
"그래도 초심자 치고는 진짜 많이 타신 편이에요. 복싱해서 그런가, 코어 힘은 확실히 좋으시던데."
희영의 가벼운 칭찬에 도운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생각보다' 안 붙이고 칭찬 들으니까 낫네요. 솔찌 제가 운동 신경이 좀 있긴 하죠."
"아휴, 또 허세. 스트레칭이나 잘해요. 오늘 바 워크 하다가 또 나무토막 되지 말고."
"오늘은 다릅니다. 두고 보십쇼."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서로의 근육통을 놀리고, 지난 주말의 후일담을 시시콜콜하게 나누다 보니 어느새 강사가 활기차게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자, 매트 정리하시고 바 잡으실게요!"
음악이 흐르고 본격적인 바(Barre) 워크가 시작되었다. 데미 쁠리에, 탄듀 등 기본 동작이 이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 모두 초반의 뚝딱거림에서 벗어나 제법 동작을 따라가고 있었다. 특히 도운은 여전히 몸이 크고 뻣뻣하긴 했지만, 첫날처럼 발을 헛딛거나 방향을 잃고 허우적대는 일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희영 역시 코어에 힘을 주고 척추를 세우는 감각에 훨씬 익숙해져 있었다.
'오른쪽 골반 열고, 무릎 펴고.'
희영은 속으로 구령을 되뇌며 쁠리에 동작을 이어갔다. 자신의 골반 정렬이 바르게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무심코 시선을 돌려 정면 거울을 보았을 때였다.
거울 속, 대각선 뒤쪽에 선 도운과 눈이 마주쳤다.
우연히 시선이 스친 건 아니었다. 도운은 이미 희영 쪽을 보고 있었다. 평소처럼 한쪽의 실수를 기다리는 장난스러운 얼굴도 아니었다.
눈이 마주치자 도운이 한 번 눈을 깜빡였다. 아주 짧은 틈 뒤, 먼저 시선을 정면의 자기 모습으로 돌렸다.
'…뭐야.'
희영은 잠깐 어리둥절했지만 곧 발끝에 다시 집중했다. 다만 방금 전 도운이 먼저 시선을 피한 장면이 이상하게 한 번 더 떠올랐다.
잠시 후, 파세(Passé)로 한쪽 발을 무릎 옆에 끌어올린 채 균형을 잡는 순서로 넘어갔을 때였다.
희영은 한 손으로 바를 잡고 중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자세에 신경을 쓰다 보니 양어깨가 어김없이 귀밑을 향해 슬금슬금 솟아오르고 있었다.
거울로 자신의 자세를 살피려던 희영은, 거울 너머로 도운이 자신의 양어깨를 손으로 꾹꾹 누르는 시늉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평소 희영의 거북이 자세를 놀릴 때마다 하던 익숙한 수신호였다.
'아, 맞다.'
희영은 반사적으로 숨을 훅 내뱉으며 잔뜩 솟아 있던 승모근을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 '됐지?'라는 의미를 담아 얄밉게 눈을 흘기며 거울 속의 도운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다시 눈이 마주치는 순간, 희영의 장난스러운 표정이 아주 잠깐 멈췄다.
도운도 평소처럼 바로 웃지 않았다. 둘은 거울 속에서 짧게 시선을 맞췄다.
'왜 또 저렇게 보지?'
도운이 자신을 보는 것 자체는 낯설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평소처럼 바로 눈으로 한마디 받아치는 타이밍이 조금 늦었다.
희영이 한 박자 늦게 눈을 흘겨 보이자 그제야 도운도 피식 웃고 자기 동작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바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스튜디오 중앙으로 모이는 센터 워크 시간이 되었다.
"자, 오늘은 중심 이동이랑 팔 같이 쓰는 콤비네이션 할게요. 앞줄 뒷줄 두 줄로 서서 진행합니다."
음악이 켜지고 동작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 모두 전보다 발레 실력이 눈에 띄게 늘어, 이젠 구령에 맞춰 스텝을 밟는 것 정도는 큰 실수 없이 소화해 내고 있었다. 희영은 거울을 보며 제 팔의 각도와 턴아웃 상태를 확인했다. 그런데 묘했다. 자신의 자세를 보려고 거울을 응시하는데, 자꾸만 시선이 한 칸 옆, 대각선 뒤에 선 도운 쪽으로 미끄러졌다.
일부러 쳐다보려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도운이 거울 속 어디쯤 서 있는지가 이상할 만큼 잘 보였다. 자기 자세를 확인하다가도 시선 끝에 도운의 움직임이 걸렸다.
몇 번이나 그쪽을 의식한 뒤에야 희영은 도운 쪽에서도 시선이 돌아오는 순간이 있다는 걸 알았다. 정면을 보고 있던 도운과 거울에서 눈이 엉키면, 희영은 자기 타이밍이 아주 조금 늦거나 이미 맞는 팔 위치를 괜히 한 번 더 고쳐 잡았다.
"회원님들!"
그때, 거울을 살피며 돌아다니던 강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자, 센터 하실 때는 거울로 본인 정렬 계속 확인하세요! 정면 보고 자기 자세 체크하면서 갑니다. 팔이랑 몸 방향 같이 봐주세요!"
강사의 말이 끝나고 희영이 다시 거울을 봤을 때, 도운과 시선이 한 번 더 겹쳤다. 희영은 잠깐 입술을 다물었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도운도 소리 없이 한 번 웃고 정면으로 돌아갔다. 희영 역시 다시 음악에 맞춰 자기 동작을 이어갔다.
수업이 끝나 옷을 갈아입고 신발장 앞에서 짐을 챙기던 두 사람은 늘 그렇듯 나란히 건물 입구로 나왔다.
"클라이밍 해보니까 왜 손에 굳은살 생기는지 알겠더만요. 몇 문제 안 탔는데도 손바닥이 난리던데."
"이제 제 손 보고 뭐라고 못 하겠죠?"
"그건 인정합니다. 8년이면 그럴 만하네예."
"조심해서 들어가요." 희영이 먼저 가볍게 인사했다.
"예. 다음 주에 봅시다. 주말에 또 벽만 너무 타지 말고예."
"도운 씨도 운동 적당히 하세요."
지하철에 올라탄 희영은 자리에 앉아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다. 까만 터널을 지나는 창문 위로 제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아.'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어깨가 또 살짝 솟아 있는 것을 발견한 희영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내쉬며 양어깨를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그 순간 오늘 거울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던 도운의 얼굴이 따라 떠올랐다.
희영은 잠깐 창문 속 자기 얼굴을 보다가 휴대전화를 켰다. 별다른 알림은 없었다. 화면을 몇 번 넘기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가, 희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