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3시. 희영은 평일 한낮의 햇살이 쏟아지는 통유리창 앞 카페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모니터와 씨름하며 커피 수혈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밀린 은행 업무를 처리하려고 하루 연차를 냈다. 발레까지 생각해서 아침부터 묵직한 운동 가방까지 챙겨 나왔는데, 은행 볼일이 예상보다 너무 일찍 끝나버렸다. 그렇다고 이걸 다시 들고 집까지 갔다가 몇 시간 뒤 또 나오기도 귀찮았다.
결국 희영은 발레 가방을 든 채 학원 근처에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로 피신했다. 밀린 유튜브 영상도 보고, 다이어리도 정리하며 모처럼 평일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오후 4시를 조금 넘겼을까.
창밖 거리를 무심히 내다보던 희영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머물렀다. 카페 앞 오피스 빌딩 옆문에서 낯익은 체격의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윤도운이었다. 하지만 희영은 하마터면 그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매번 펑퍼짐한 트레이닝 바지나 땀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만 보아왔다. 그런데 지금 창밖의 도운은 핏이 딱 떨어지는 깔끔한 네이비색 셔츠에 다크 그레이 슬랙스 차림이었고, 한 손에는 얇은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머리도 제법 단정하게 정돈된 채였다.
'완전 다른 사람 같네.'
희영이 노트북에서 손을 떼고 창밖을 주시했다. 도운은 옆에 선 중년의 남성 두 명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미소를 띤 채 대화에 응하며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보폭을 맞췄다. 도로가에 검은색 세단이 도착하자, 도운은 먼저 다가가 뒷좌석 문을 열어주고 허리를 굽혀 깍듯이 인사했다. 상대방이 차에 탈 때까지 부드럽게 미소 짓던 그의 얼굴은, 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원래의 차분하고 약간은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발레 학원에서 보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진짜 회사도 다니는 사람이었네.'
희영은 턱을 괸 채 스스로도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 혼자 피식 웃었다.
미팅 상대들을 배웅하고 돌아선 도운이 차 열쇠를 꺼내려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카페 통유리창 너머, 턱을 괸 채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희영과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도운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듯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이내 골목을 건너와 카페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딸랑, 하는 종소리와 함께 다가온 도운이 희영의 테이블 앞 의자를 빼며 물었다.
"여기서 뭐 합니까?"
희영이 의자 밑에 놓인 커다란 운동 가방을 툭 차며 대답했다.
"저야 오늘 연차 써서요. 일 있어서 나왔다가 발레가 여기 근처길래 그냥 여기서 죽치고 있었어요."
"도운 씨야말로 여기서 뭐 해요?"
"아, 예. 방금 근처 거래처 미팅 끝나고 오는 길입니다."
도운이 뻐근한 뒷목을 쓸어내리며 테이블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까 그 사람들 배웅할 때부터 봤는데, 회사에서는 되게 멀쩡하시던데요. 완전 어른 같았어요."
희영이 장난스럽게 칭찬 아닌 칭찬을 던지자, 도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아니, 그럼 제가 평소에는 뭔데요. 애 취급하시는 겁니까?"
"그렇다기보단, 맨날 스텝 꼬여서 허우적대는 모습만 봐서요. 아까 문 열어주면서 웃는 거 보니까 완전 프로 영업맨이던데."
희영의 놀림에 도운이 헛기침을 하며 귀끝을 붉혔다.
"아, 그걸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요. 민망하게."
"커피 한잔 사드릴까요? 저 혼자 오래 앉아있었더니 입도 심심하던 참이었는데."
희영이 묻자 도운이 손사래를 쳤다.
"됐습니더. 제가 시킬게요. 어차피 저도 발레 가기 전까지 시간이 좀 떠서 차에서 잘까 했는데, 여기서 좀 앉아 있다 가야겠네요."
도운이 카운터로 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해 돌아왔다.
"운전 많이 해요?"
희영이 도운의 차 열쇠를 보며 묻자, 그가 커피를 들이켜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마십쇼. 하루에 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절반입니다. 엉덩이에 쥐 날 것 같아요."
"운전 오래 하면 피곤하지 않아요? 저는 면허 없어가지고, 대단해보이네요."
"뭐, 운전이야 이제 습관 돼서 괜찮습니더. 오히려 차에서 혼자 운전하면서 음악 듣고 멍때리는 시간이 길어가 은근히 편할 때도 많고."
도운은 무심하게 대답하며 셔츠 소매를 가볍게 걷어 올렸다. 발레 스튜디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윤도운의 회사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맞추셨는가 모르겠는데, 영업직이거든요. 사람 상대하는게 말도 아닙니다. 할 말 없어도 계속 말을 만들어내야 되고. 진짜 좋은 분들도 많은데, 막 말도 안되는 요구 하는 사람도 있다니까요."
희영도 은행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풀었다.
"대기 번호가 제 차롄데, 어떤 아주머니가 막무가내로 끼어들더라니까요. 은행원도 제 차례라고 계속 말하는데 귓등으로도 안 듣고. 진짜 이상한 사람 많아요."
"와,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번호표가 떡하니 있는데 새치기를 해버립니까."
도운이 고개를 저으며 맞장구를 쳤다. 평범한 직장인들의 일상적인 푸념이 자연스럽게 오갔다.
"아, 그 발레 등록시키고 튄 놈 있잖습니까. 사실 제가 복싱 시작한 것도 금마 때문이거든요. 근데 또 꾸준히 안 나와서 스파링 뛸 때마다 저한테 흠씬 두들겨 맞는 신세죠."
"은근히 자랑하시네? 친구분은 안 나오는데 도운 씨는 5년 동안 꾸준히 하셨다는 거죠?"
도운의 복싱 이야기에 희영이 장난스럽게 치켜세우자, 도운이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엔 희영의 클라이밍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갔다.
"이번에 제가 다니는 신림 쪽 암장이 리뉴얼을 했거든요. 거기 중앙에 엄청 큰 샹들리에가 있어서 예쁘기로 유명한 곳인데. 아무튼, 새로 세팅된 문제 중에 진짜 아깝게 자꾸 떨어지는 구간이 있어요. 여기 테이블 쪽에 홀드가 하나 있다고 치면, 다음 홀드가 저기 저 액자 쪽에 있단 말이에요."
희영이 손짓으로 카페 테이블과 벽면의 액자를 가리키며 열띤 설명을 이어갔다.
"그냥 팔 좀 쭉 뻗으면 닿겠구먼. 아, 희영 씨 팔이 짧아서 안 닿습니까?"
도운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희영이 발끈했다.
"아니거든요? 팔 길이가 문제가 아니라, 벽 각도가 꺾여 있어서 체중을 싣기가 엄청 까다로운 거거든요? 나중에 진짜 클라이밍장 와서 한번 매달려 보시든가."
그러다 불쑥,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여 있던 두 사람의 휴대전화 화면이 동시에 밝아지며 진동이 울렸다.
징-.
둘 다 화면을 확인하고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아…."
희영이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뭐야. 나 이거 하나 하려고 아까부터 여기 버티고 있었는데."
희영이 발치에 놓인 무거운 운동 가방을 원망스럽게 내려다보며 투덜거렸다.
도운도 휴대전화를 탁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 오늘 진짜 제대로 보여줄 수 있었는데."
"뭘요?"
"제 점프 실력이요."
도운의 허세에 희영이 코웃음을 쳤다.
"참나, 없는 걸 어떻게 보여줘요? 제 실력을 못 본거나 아쉬워하세요."
"아니, 하 거참. 하나도 안 아쉬운데요?"
휴강 문자를 확인하고도 둘 중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1주 연장해주면, 다음 달 등록일 밀리는 건가?"
"그라지않을까요? 뭐, 돈 떼먹히는 거 아니니까 다행이긴 한데."
자연스럽게 휴강에 대한 수다로 시작된 대화는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화제는 다시 클라이밍 이야기로 가지를 뻗어나갔다.
"근데 도운 씨 일하러 안 가도 돼요? 땡땡이 아니에요?"
한참 떠들던 희영이 문득 시계를 확인하며 물었다.
도운도 자신의 휴대전화 시계를 확인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시간이 벌써 이래 됐네."
어느새 바깥은 뉘엿뉘엿 해가 지고, 퇴근 시간을 알리는 차량들의 붉은 후미등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저 미팅이 오늘 마지막 외근이었습니다. 원래 끝나고 직퇴 처리하려고 했거든요. 차에 짐도 다 실어놨고. 천천히 발레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 줄 몰랐네요."
카페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오후의 나른함은 사라지고 어느새 저녁 시간이었다.
"근데 희영 씨, 배 안고픕니까"
"많이 고파요. 아까 낮에 대충 빵 하나 주워 먹은 게 다예요."
"저도 슬 배고픈데."
도운이 몸을 살짝 앞으로 숙이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럼, 밥 먹고 갈랍니까?"
"그래요. 근처에 뭐 맛있는 데 있나?"
근처 식당을 검색하던 중, 도운의 시선이 골목 모퉁이에 있는 커다란 간판에 잠깐 멈췄다.
'원조 돼지국밥 전문점'
도운의 시선을 따라간 희영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예?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저 도운씨 눈빛 다 봤어요. 근데 제가 어제 먹어서, 국밥은 패스."
결국 두 사람이 합의를 본 곳은 정갈한 일본식 솥밥집이었다.
식당에 들어서자, 가벼운 몸의 도운과 달리 희영은 큼지막한 발레 가방을 의자 옆 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어휴, 짐스러워."
희영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리자, 도운이 피식 웃었다.
"발레는 취소됐는데 발레 가방 들고 여기 앉아있는 게 좀 웃기긴 하네요."
"진짜요. 나 오늘 하루 종일 이거 들고 뭐 하고 다니는 건지."
희영도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터뜨리며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외근직의 고충과 희영의 회사 생활 이야기로 부드럽게 흘러갔다.
식사가 끝날 무렵, 도운이 계산서 쪽으로 손을 뻗자 희영이 재빨리 자기 몫의 카드를 내밀었다.
"더치페이 해요."
"에이, 제가 먹자고 했는데 제가 사야죠."
"저도 배고파서 먹은 건데요, 뭐."
도운이 몇 번 만류했지만, 희영이 확고하게 나오자 결국 "그럼 알겠습니더"라며 깔끔하게 각자 계산을 마쳤다.
식당을 나오니 밤공기가 제법 서늘해져 있었다. 오후의 밝은 햇살 아래 만났던 두 사람은, 어느새 깜깜한 밤거리의 가로등 불빛 아래 서 있었다.
"차 저쪽 주차장에 대놨다 했죠? 조심해서 가요."
희영이 지하철역 쪽을 가리키며 인사하자, 도운이 차 키를 빙빙 돌리며 물었다.
"지하철 타러 가요? 제가 역까지 태워다 드립니까?"
"아유, 됐어요. 여기서 역까지 5분이면 가는데 굳이 차 뺄 필요 있나요. 길이 더 막힐걸요."
"가방 무거워 보이는데 진짜 괜찮겠어요?"
"운동 가방 하나 든 걸로 뭘 데려다줘요. 저 클라이밍 8년 차예요."
희영이 씩씩하게 가방을 고쳐 메며 거절하자, 도운도 더 이상 무리해서 붙잡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고, 주말 잘 보내이소."
"네, 도운 씨도 운전 조심하고요."
가벼운 인사를 끝으로 두 사람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운은 차가 있는 공영 주차장으로, 희영은 지하철역 입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