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 월요일, 모니터 화면에 띄워진 엑셀 창의 숫자들이 흐릿하게 뭉개져 보일 무렵이었다. 마우스를 쥐고 있던 희영이 무심코 고개를 돌려 뻐근한 목을 꺾었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뭉친 승모근의 통증이 찌릿하게 밀려왔다.
'아, 또 어깨 올라가 있었네.'
모니터에 집중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거북이처럼 목을 빼고 어깨를 잔뜩 움츠리는 건 희영의 오랜 고질병이었다. 습관적으로 승모근을 주무르던 희영의 뇌리에, 불현듯 지난 금요일 밤 도운에게서 받았던 카카오톡 메시지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단호하고 얄미웠던 텍스트. 희영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픽 내뱉으며 위로 솟아 있던 양어깨를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키보드를 두드리다 말고 혼자 실실 웃던 희영은, 서랍을 열어 노란색 포스트잇 한 장과 네임펜을 꺼냈다. 그리고 굵은 글씨로 장난스럽게 꾹꾹 눌러 적었다.
[어깨 내려]
포스트잇을 모니터 우측 하단 베젤에 딱 붙여놓고 나니, 왠지 모르게 발레 스튜디오 거울 너머로 어깨를 누르는 시늉을 하던 도운의 얼굴이 겹쳐 보여 또다시 실소가 터졌다.
그로부터 서너 시간이 지난 늦은 오후. 커피를 타서 자리로 돌아온 희영은 모니터 옆에 붙은 노란색 포스트잇을 보고 새삼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회사 모니터에 발레 학원 동지(?)의 잔소리를 붙여놓고 일하는 자신이 조금 웃겼다.
희영은 휴대전화를 들어 포스트잇이 잘 보이게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원래는 클라이밍 암장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에 올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갤러리 앱을 켠 순간, 불쑥 윤도운의 이름이 머릿속을 치고 들어왔다.
희영은 별다른 고민 없이 카카오톡을 열어 도운과의 대화창을 켰다.

쿵, 쉭, 쿵.
체육관 안을 가득 채우는 날카로운 줄넘기 소리와 샌드백 타격음. 코끝을 찌르는 땀 냄새와 후끈한 열기.
검은색 기능성 민소매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도운은, 전면 거울 앞에서 가볍게 섀도복싱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양손에는 새빨간 핸드랩이 단단하게 감겨 있었다. 가볍게 뛰는 스텝은 경쾌했고, 허공을 가르는 잽과 훅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발레 학원 거울 앞에서는 왼쪽과 오른쪽을 헷갈려 삐걱거리던 그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머리로 계산하기도 전에 근육이 먼저 반응하는 노련한 움직임이었다.
"야, 도운아. 미트 한 3라운드만 치자."
샌드백을 치고 있던 태준이 땀을 닦으며 도운을 불렀다.
"어. 물 한 모금만 마시고 가자."
도운은 거울 앞에서 스텝을 멈추고 체육관 한구석에 둔 자신의 스포츠 가방 쪽으로 걸어갔다.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물병을 꺼내려던 찰나, 가방 틈바구니에 박혀 있던 휴대전화 화면이 훅 밝아졌다.
평소 같았으면 체육관에 들어선 순간부터 폰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도운이었다. 운동 흐름이 끊기는 걸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운은 수건을 목에 걸치고 자연스럽게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잠금 화면을 풀자, 모니터 옆에 붙은 샛노란 포스트잇 사진이 떠올랐다.
'어깨 내려'라는 글씨를 보자마자, 도운의 입술 사이로 "푸흡" 하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물병을 쥔 채 짝다리를 짚고 선 도운이 빠르게 타자를 쳤다.
'손가락.'
도운은 폰을 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부터 손목까지 꽉 감긴 핸드랩에 자연스럽게 힘을 빼둔 손. 지난 수업에서 갈퀴처럼 펴진 자신의 손가락을 보고 기겁하며 입모양으로 '힘 빼'라고 말하던 희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도운은 자신의 손을 사진으로 찍어서 ‘완벽하게 힘 빠진 손’하고 변명할까 하다가, 카메라 앱을 켜려던 손가락을 잠시 멈췄다.
'운동하다 말고 손 사진까지 찍어 보내는 건 쪼매 오바 아닌가.'
그러자 1초도 안 되어 답장이 날아왔다.
희영의 짧은 도발에 도운은 결국 헛웃음을 치며 카메라 앱을 다시 켰다.
그는 방금까지 운동하느라 살짝 끝이 붉어진 손을 대충 찰칵 사진을 찍었다. 체육관 바닥과 빨간 붕대가 감긴 투박한 손만 나온 엉망인 구도였다.
"야."
도운이 폰을 쥔 채 입꼬리를 올리고 있을 때, 등 뒤에서 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트를 양손에 낀 태준이 링 밧줄에 기대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야, 윤도운."
도운이 그제야 폰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어, 간다."
태준이 미트 두 개를 툭툭 부딪치며 도운을 쳐다보았다.
"니 원래 운동할 때 폰 안 보잖아."
평소 같았으면 벌써 링 위에 올라와서 스텝을 밟고 있어야 할 놈이, 가방 앞에 서서 실실 웃으며 타자를 치고 있는 꼴이 낯설었다.
"어, 뭐 좀 왔다."
도운이 폰을 가방에 던져 넣으며 링 위로 올라갔다.
"급한 거가?"
태준이 묻자, 도운이 짧게 답했다.
"아니. 뭐, 타자 치는 데 몇 초나 걸린다고. 미트나 대라."
태준은 "아, 예예." 하고 미트를 들어 올렸다.
도운의 거친 호흡과 함께 미트 훈련이 시작되었다.
"원, 투! 쓱, 빡!"
태준이 미트를 내미는 위치가 바뀌기가 무섭게 도운의 몸도 따라 움직였다. 잽과 스트레이트가 연달아 꽂히고, 이어지는 회피 신호에는 생각할 틈도 없이 상체가 미끄러지듯 빠졌다.
"아오, 손목아. 야, 그만."
태준이 미트를 벗어던지며 손목을 털었다.
"니 발레 학원 가서 하체 튼실해졌나? 오늘따라 체중이 팍팍 실리네."
태준이 헥헥대며 농담을 던지자, 도운이 글러브로 태준의 어깨를 밀쳤다.
"헛소리하네. 발레 가면 다리가 더 후들거린다."
"근데 니 그거 계속 다닐 기가?"
"뭘."
"발레 말이다. 처음엔 내가 같이 가자고 할 때 죽어도 안 간다 카드만. 와 니 혼자 계속 다니노?"
도운은 숨을 몰아쉬며 링 밧줄에 팔을 걸쳤다.
"아, 기왕 돈 냈으니까 뽕은 뽑아야지. 중간에 그만두면 돈 아깝잖아."
도운이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수건을 집어 들었다.
운동을 마치고 샤워실에서 씻고 나온 도운은, 탈의실 벤치에 앉아 다시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아까 보냈던 핸드랩 사진 아래로 희영의 답장이 도착해 있었다.
소리 없이 큭큭거리며 액정만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먼저 옷을 다 갈아입은 태준이 탈의실을 빠져나가며 도운의 어깨를 툭 쳤다.
"뭐고 여자생겼나. 아까부터 폰보면서 실실 쪼개고."
그 말에 도운이 흠칫 놀라 휴대전화를 허벅지 위로 엎었다.
"아, 씨. 빨리 가라 좀."
태준은 씩 웃으며 쿨하게 사라졌다.
덩그러니 혼자 남은 탈의실.
도운은 엎어둔 휴대전화를 다시 뒤집었다. 화면에는 조금 전 희영과 주고받은 시시한 대화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문득 태준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니 원래 운동할 때 폰 안 보잖아.’
‘아까부터 폰보면서 실실 쪼개고.’
'내가 그랬나.'
도운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수롭지 않게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뭐, 마침 알림이 떠 있으니까 본 거지.'
체육관 밖으로 나와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며 버스 정류장에 서 있을 때, 폰이 다시 진동했다.
희영이 보낸 메시지였다. 도운이 피식 웃으며 타자를 쳤다.
자신을 허풍쟁이 취급하는 희영의 도발에, 도운은 코웃음을 쳤다.
도운이 화면을 내려다보다 피식 웃었다.
"아, 진짜 사람 긁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