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30분 앞둔 사무실.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업무를 마무리하던 희영의 휴대전화 화면이 밝아졌다.
저번 주에 연락처를 교환하긴 했지만, 그날 이후로 개인적인 카톡이 오간 적은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 내내 조용하던 대화창이, 수업 당일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울린 것이다.
최대한 심드렁하게 텍스트를 쳐서 보냈지만, 휴대전화를 내려놓는 희영의 입가에는 옅은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한 시간 뒤, 스튜디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희영은 익숙하게 강의실 문을 열었다. 매트 구석에 앉아 고관절을 풀고 있는 덩치를 발견하고는 속으로 작게 피식 웃었다.
"진짜 일찍 왔네요."
"오늘은 도망 안 간다고 했잖아요."
도운이 뻐근한 목을 꺾으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오늘은 준비운동 단단히 하셨나 봐요?"
"오늘은 제대로 해볼 겁니다."
"좋아요. 오늘 내기 종목은 선생님이 제일 어렵게 내주는 걸로 하죠."
"콜."
잠시 후 강사가 스튜디오 중앙에 서서 활기차게 박수를 쳤다.
"자, 다들 바(Barre) 잡으실게요! 오늘은 워밍업 끝나고 바로 센터 워크 길게 갈 거예요!"
바 워크는 평소처럼 무난하게 흘러갔다. 문제는 그 이후, 바에서 손을 놓고 홀 중앙으로 모여 진행된 센터 워크 후반부였다.
"자, 이번에는 발과 팔을 같이 써볼게요! 발은 앞으로 탄듀 했다가 닫고, 바로 옆으로 탄듀 했다가 닫습니다. 팔은 앞 탄듀에서 앙 아방으로 모으고, 옆 탄듀에서 알라스콩으로 열어줄게요. 발이 앞으로 나갈 때 팔 모으고, 옆으로 나갈 때 팔 열고! 음악에 맞춰서 같이 가볼게요.”
강사의 설명을 듣는 희영과 도운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발 순서를 외우는 것만으로도 벅찬 마당에, 거기에 팔의 움직임까지 얹으라니 초보자들에겐 꽤나 가혹한 요구였다.
"오늘 이걸로 하죠."
희영이 턱짓으로 앞을 가리키며 덤덤하게 제안했다.
"좋습니다. 마지막 세트 끝날 때까지 삐걱거리거나 순서 틀리면 바로 아웃입니다."
도운도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왈츠 음악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거울을 뚫어져라 보며 각자의 폼에 집중했다.
희영은 속으로 '앞으로 뻗고, 팔 모으고. 옆으로 뻗고, 팔 열고'를 쉴 새 없이 읊조리느라 입술을 달싹거렸다. 반면 옆자리의 도운은 거울 속 자신의 팔 각도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팔을 둥글게 만들려고 의식하면 할수록,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열 손가락이 갈퀴처럼 빳빳하게 펴져 허공을 찌르고 있었다.
스텝을 밟다 거울 너머로 그 꼴을 보게 된 희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풉' 하고 헛웃음을 뱉고 말았다.
웃음소리에 눈치를 챈 도운이 거울을 통해 희영을 향해 '뭐요'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희영은 강사 몰래 자신의 손목을 반대쪽 손으로 툭툭 치며 과장된 입모양으로 뻐끔거렸다.
'힘. 빼.'
도운이 아차 싶어 재빨리 빳빳했던 손목을 털어내며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쥐었다. 하지만 잠시 뒤엔 상황이 역전되었다. 희영은 발 순서와 팔의 타이밍을 맞추는 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긴장해서 팔을 어깨높이까지 들어 올릴 때마다, 승모근이 귀밑까지 솟아올라 거북이 꼴이 되어가고 있었다.
거울로 그걸 발견한 도운이 입을 비죽 내밀더니, 거울 속 희영을 보며 자신의 양어깨를 아래로 꾹꾹 누르는 과장된 시늉을 했다.
희영은 도운의 수신호를 보고서야 화들짝 놀라 숨을 훅 내뱉으며 잔뜩 솟아 있던 어깨를 툭 떨어뜨렸다.
"자, 음악 조금 더 빨라집니다. 팔 부드럽게 연결하세요! 멈추지 말고!"
두 번째 세트가 시작되었다.
도운은 방금 전 어깨를 내렸던 희영이 동작이 빨라지면서 또다시 승모근을 들어 올리진 않는지 확인하느라 곁눈질을 했다. 다행히 희영의 어깨는 잘 고정되어 있었다. 도운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이었다.
"윤도운 회원님! 집중!"
강사의 쩌렁쩌렁한 지적이 스튜디오 안에 울려 퍼졌다. 남의 자세를 봐주며 고개를 끄덕이느라, 정작 도운 자신의 팔은 앙 아방 자세 그대로 배꼽 앞에 굳어 있었던 것이다. 곳곳에서 큭큭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도운의 귀끝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황급히 정면을 응시하며 굳어 있던 팔을 휙 열어젖혔다. 희영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희영의 비웃음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희영이 곁눈질을 시작했다. 도운이 앞으로 탄듀를 해야 할 타이밍에 스텝이 꼬였는지 옆으로 발을 빼려 하고 있었다. 희영은 도운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턱짓으로 앞을 가리키며 맹렬하게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희영 회원님 지금 팔 방향 놓치셨어요!"
이번엔 강사의 불똥이 정확히 희영에게 튀었다. 도운에게 턱짓을 하느라, 희영의 양팔은 어정쩡하게 허공에서 멈춰 있었다. 거울 속에서, 도운이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꾹 누르며 소리 없는 폭소를 터뜨렸다. 희영은 얼굴이 확 달아올라 황급히 팔을 양옆으로 펴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수업이 끝나고,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신발장 앞에서 짐을 챙겼다. 둘 사이엔 유치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아, 솔직히 오늘 제가 완전 이긴 건데 억울하네요."
단화를 꺾어 신으며 희영이 먼저 선수를 쳤다.
"무슨 소립니까. 솔찌 어깨 제대로 하셨으면은 저 틀릴 일도 없었겠고만은."
가방을 둘러메던 도운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그러니까 제 걸 왜 봐요? 오지랖은."
"아니, 거북이처럼 목이 쏙 들어가는데 동지로서 어떻게 가만히 봅니까. 근데 희영 씨도 제 스텝 챙겨주다가 걸렸잖아요."
"그거야 거울로 틀리는 게 너무 빤히 보이니까 무의식적으로 그런 거죠!"
"저도 똑같습니다."
결국 오늘 내기는 무승부로 끝났다.
"어휴, 말을 말죠."
희영이 가방을 챙겨 들고 복도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도운이 신발장 거울을 보며 머리를 대충 털어내다, 무심한 목소리로 툭 던졌다.
"근데 마지막 세트 때는 폼 꽤 괜찮았습니다. 금방 금방 느네요."
먼저 걸음을 옮기려던 희영의 발이 멈칫했다.
'그걸 계속 보고 있었네.'
희영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되받아쳤다.
"…도운 씨도 처음엔 장작 패는 줄 알았는데, 나중엔 좀 낫던데요."
이번엔 머리를 털던 도운의 손이 멈칫했다.
신발장 앞엔 짧은 정적이 흘렀다.
"어휴, 가죠. 다리 후들거려 죽겠네."
"내일 근육통 쩔겠네요. 계단 내려갈 때 조심하십쇼."
둘은 어색한 분위기를 덮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건물 입구에서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온 희영은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거실 바닥 폼롤러 위에 엎드려 있었다.
지이잉-.
협탁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희영은 폼롤러를 굴리던 다리를 멈추고 엎드린 채 자판을 두드렸다.
곧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희영이 피식 웃으며 타자를 쳤다.
대화가 끝난 줄 알고 폰을 내려놓으려는데, 1분쯤 뒤 다시 진동이 울렸다.
화면 속 텍스트를 본 희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바람을 뱉었다. 그러면서도 본인도 모르게 폰을 쥐고 잔뜩 긴장해 있던 양어깨를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귀밑까지 솟아 있던 승모근이 편안하게 제자리를 찾았다.
희영은 다시 바짝 엎드려 답장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