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수업 날.
희영은 평소처럼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강의실 안, 희영은 별생각 없이 늘 매트를 펴던 구석 자리를 향해 걸어가다 무심코 대각선 뒤쪽을 힐끗 보았다.
항상 그 자리에 먼저 널브러져 있거나 끙끙대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커다란 덩치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안 왔나 보네.'
처음엔 별생각 없이 매트를 깔고 앉아 고관절을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튜디오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자꾸만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문이 열리고, 앞줄에서 수업을 듣는 여성 회원이 들어왔다. 다시 문이 열리고, 이번엔 단발머리 회원이 들어왔다.
수업 시작이 3분도 채 남지 않았는데 도운은 나타나지 않았다.
희영은 뭉친 어깨를 주무르며 괜히 속으로 합리화를 시작했다.
'오늘 같은 동작으로 다시 내기하기로 했는데. 설마 저번 주에 한 번 이겼다고 도망가는 건 아니겠지.'
분명 도운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정정당당한 '내기 상대'가 나타나지 않으니 허전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강사가 스튜디오 중앙에 서서 박수를 두 번 쳤다.
"자, 출석 확인하고 바로 매트 시작할게요!"
강사가 아이패드를 들고 익숙하게 회원들의 이름을 부르다, 잠시 멈칫했다.
"윤도운 회원님은 아직 안 오셨나 봐요?"
희영이 본인도 모르게 다시 홱 하고 문 쪽을 돌아보았다. 강사는 그 이상 묻지 않고 "자, 다 같이 두 다리 앞으로 뻗으시고요!" 라며 바로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수업은 평소처럼 흘러갔다. 희영은 강사의 구령에 맞춰 나름대로 성실하게 다리를 늘리고 허리를 세웠다.
다만, 중간중간 바 워크 순서를 헷갈리거나 스텝이 꼬여서 허우적댔을 때 반사적으로 대각선 뒤쪽을 쳐다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거울 너머로 도운과 눈이 마주치고, 서로 얄미운 표정을 짓거나 킥킥거리며 웃음을 참았을 텐데. 오늘 거울 속에 비친 그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희영은 멋쩍게 시선을 거두며 다시 코어에 힘을 줬다.
수업이 시작되고 약 1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스튜디오 문이 아주 조심스럽게 열렸다.
검은색 반팔 티셔츠를 입은 도운이 허리를 굽히고 살금살금 들어오고 있었다. 평소보다 앞머리가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숨도 살짝 가빠 보였다.
"아이고, 죄송합니더. 회사 일이 예상보다 늦게 끝나가지고요."
도운이 강사에게 허리를 숙여 작게 사과했다.
"도운 회원님은 지금 몸 안 풀리셨으니까, 바로 바 잡지 마시고 뒤에서 조금 더 스트레칭하고 들어오세요."
급하게 뛰어온 듯한 도운이 구석으로 가 조용히 매트를 펴고 앉았다.
바를 잡고 있던 희영이 거울을 통해 힐끗 그를 확인했다. 매트에 앉은 도운 역시 고개를 들다 거울을 통해 희영과 눈이 딱 마주쳤다.
도운이 민망한 듯 입모양으로 작게 '늦어서 죄송' 하며 꾸벅 목례를 보냈다.
희영은 괜히 딴청을 피우며 시선을 돌렸다. 아까까지 문이 열릴 때마다 자꾸만 입구 쪽으로 돌아가던 희영의 시선은, 그 뒤로 더 이상 허공을 헤매지 않았다.
수업 중반, 강사가 잠깐 물을 마시라고 하자 구석에서 다리를 주무르던 도운이 희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오늘 내기는 무효죠?"
도운이 물병을 따며 밑밥을 깔았다.
"왜요?"
"왜기는요. 저 오늘 준비운동도 제대로 못 했는데, 이 상태로 대결하면 제가 너무 불리하잖아요."
"벌써 핑계 대시는 거예요?"
희영이 쏘아붙이자, 도운이 뻔뻔하게 받아쳤다.
"아니, 선수 보호, 선수 보호!"
"무슨 어디 선수세요?"
둘이 티격태격하며 말싸움을 이어갔지만, 희영도 오늘 도운의 컨디션이 온전치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결국 오늘 진행하기로 했던 리매치는 다음 주로 미뤄졌다.
"근데 박희영 씨, 저를 좀 기다리셨나보던데요?"
물을 들이켜던 도운이 뚜껑을 닫으며 툭 던지듯 물었다.
"아닌데요?"
희영이 즉답했다.
"에이, 저 들어오니까 바로 쳐다보시던데요, 뭘. 다- 압니더."
묘하게 뺀질거리며 묻는 태도에 희영이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내기 상대가 이제야 왔나 본 거죠."
도운이 피식 웃으며 반문했다.
"그게 찾은 거 아입니까?"
희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반박할 말을 찾는 사이, 도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 넘겼다.
"저 막 내기 걸어놓고 도망가는 그런 놈 아입니더."
"퍽이나요. 완전 쫄은 것 같은데."
희영이 스트레칭 밴드를 만지작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쫄았다’는 표현에 잠깐 억울한 표정을 지은 도운은 강사가 다시 모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해명도 못하고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모든 수업이 끝나고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신발장 앞에서 마주쳤다.
"다음에는 늦으면 미리 말해주세요. 괜히…."
희영이 거기까지 말하고 아차 싶어 멈췄다. 말이 입 밖으로 나간 뒤에야 괜히 친한 척하는 것처럼 들렸나 싶었다.
"뭐요?"
"아니. 늦으면 안 오나 싶어서 다른 연습하려고 하니까. 우리 내기 있는 날이잖아요."
"근데 어떻게 말합니까?"
"네?"
도운이 불편한 기색도 없이 트레이닝복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우리 연락처도 없잖아요."
순간, 둘 다 잠시 멈췄다.
"…그러네요."
"그럼 번호 교환하죠. 또 쫄아서 도망갔다는 소리 듣기 싫은데."
도운이 잠금 화면을 풀고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희영도 자신의 폰을 꺼내 번호를 찍었다.
"박희영. 맞죠?"
"네. 저도 윤도운 씨 그냥 윤도운으로 저장했어요."
"그냥이 뭡니까. 원래 윤도운인데."
"다음 주에는 늦지 마세요."
"아 또 늦으면 제가 쫄은걸로 하겠습니더. 절대로 안 늦는다, 절대로."
건물 입구에서 도운과 헤어진 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빈자리에 앉은 희영의 가방 안에서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화면을 켜보니 새로운 카카오톡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초등학생인가 싶은 유치한 내용에 희영은 화면을 보며 어이가 없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답장을 보내자마자 '1'이 곧바로 사라졌다. 잠시 후, 도운의 답장이 도착했다.
희영은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