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수업 날. 회사에서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게 된 희영은 여유롭게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수업 시작까지 아직 시간이 꽤 남아 복도는 한산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일찌감치 스튜디오 문을 열던 희영은 멈칫했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공간 안, 거울 앞 나무 바를 잡고 서 있는 커다란 인영이 보였다. 도운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 바를 잡은 채, 오른쪽 다리를 무릎 높이까지 들어 올린 자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숨을 들이마시며 바를 잡고 있던 손을 아주 미세하게 떼어내려다 비틀거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지난주에 실패했던 중심 잡기 맹연습 중이었다.
"끼익-."
희영이 문을 여는 소리에 놀란 도운이 황급히 들고 있던 다리를 바닥으로 쾅 내리찍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양팔을 머리 위로 쭉 뻗으며 허공을 응시했다.
"연습하셨어요?"
희영이 짐을 내려놓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닌데요."
도운이 눈을 피하며 즉답했다. 평소의 사투리 억양도 사라진 완벽한 표준어였다.
"방금 한 발 들고 부들부들 떨고 계셨는데."
"스트레칭이었습니다. 복싱하다가 고관절이 좀 뭉쳐가지고예."
뻔뻔한 변명에 희영이 피식 웃었다. 사실 도운을 놀리긴 했지만, 희영 역시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이번 주 내내 집에서 양치질을 할 때마다 거울을 보며 발 순서를 밟아보았고, 회사 복사기 앞에서 인쇄물을 기다리면서도 속으로 '오른발 앞, 왼발 옆'을 중얼거리며 스텝을 외웠다.
희영이 매트를 펴고 앉아 애써 표정을 관리하고 있을 때, 도운이 슬쩍 다가와 물었다.
"연습했죠?"
"아닌데요."
"에이, 와 눈을 피합니까?"
"아니라니까요."
수업이 시작되기 전, 두 사람은 매트 위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지난주에 대충 얼버무렸던 내기의 조건을 명확하게 정리했다.
"자, 도운 씨는 바에서 손 떼고 네 카운트 버티기. 발을 바닥에 내리거나 바를 다시 잡으면 실패예요."
"오케이. 몸 흔들리는 건 상관없는 거죠?"
"네, 뭐. 안 넘어지기만 하면 봐드릴게요."
도운이 고개를 끄덕이곤 희영의 조건을 짚었다.
"오늘 센터 할 때 강사님이 알려주는 스텝, 마지막 반복까지 양쪽 방향 다 한 번도 안 틀리기. 맞죠?"
희영이 눈을 굴리며 슬쩍 꼼수를 던졌다.
"음… 발이 조금 늦게 나가는 건 틀린 거 아니죠?"
"음악이 이미 지나갔는데 그게 어떻게 성공입니까."
"아니, 그래도 최종 순서만 맞으면 되잖아요."
"에이, 얄짤없죠. 음악 밀리면 실패입니더."
도운의 단호한 철벽에 희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결국 도운은 '발 내리거나 바 잡으면 실패', 희영은 '마지막 반복까지 동작을 건너뛰거나 순서가 꼬이거나 음악에 늦으면 실패'로 깔끔하게 합의를 보았다.
"그래서, 이긴 사람이 뭐 받는 건데요?"
"음… 일단 이기고 나서 생각하죠. 둘 다 실패할 수도 있는데."
수업 중반, 드디어 도운의 밸런스 시간이 돌아왔다.
"자, 다들 다리 올리시고! 코어 힘으로 버텨볼게요. 손 천천히 떼세요!"
강사의 구령이 떨어지자, 대각선에 서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거울을 통해 허공에서 딱 마주쳤다.
도운이 숨을 참으며 바에서 손을 뗐다.
하나.
발목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둘.
몸의 중심이 오른쪽으로 살짝 쏠렸다.
셋.
희영의 눈이 조금 커졌다. 도운의 몸이 눈에 띄게 크게 휘청했고, 허공에 떠 있던 그의 오른손이 본능적으로 나무 바를 향해 떨어졌다.
'잡았다!'
희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바를 향하던 도운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도운은 이를 악물고 축이 된 다리에 꾹 힘을 주며 흔들리는 몸을 가까스로 다시 꼿꼿하게 세웠다.
넷.
"자, 바 잡으시고 휴식!"
강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도운이 바를 탁 짚었다. 그리고 숨을 몰아쉬며 가장 먼저 거울 속의 희영을 쳐다보았다.
대놓고 '봤죠?'라고 말하는 얄미운 승자의 표정이었다.
희영이 아쉽다는 듯 입술을 꽉 깨물며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도운 회원님! 중심은 지난주보다 훨씬 좋아지셨는데, 손 뗄 때 어깨랑 팔이 왜 이렇게 굳었어요? 통나무인 줄 알았어요."
강사의 팩트 폭력이 스튜디오에 울려 퍼졌다. 방금 전까지 의기양양하던 도운의 표정이 와사삭 무너졌다.
어쨌든 '바를 잡지 않는다'는 내기 조건은 달성한 셈이었다. 희영이 고개를 푹 숙이고 큭큭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바 워크를 마친 뒤 이어진 센터 워크. 이번엔 희영의 차례였다.
강사가 오늘 연습할 짧은 센터 조합을 보여주었다.
"오른발 앞(Devant)으로 탄듀, 닫고. 옆(À la seconde)으로 탄듀, 닫고. 무릎 굽혀서 데미 쁠리에(Demi-plié). 올라오고. 바로 반대쪽 왼발 반복할게요!"
단순한 동작들의 연결이었지만, 음악에 맞춰 좌우 방향을 전환해야 하는 초보자들에겐 꽤 헷갈리는 순서였다.
첫 번째는 강사가 앞에서 함께 시범을 보이며 진행했다. 희영은 무난하게 성공했다.
두 번째는 구령만 듣고 음악에 맞추기. 이번에도 희영은 헷갈리지 않고 정확한 발을 내밀었다. 일주일 내내 복사기 앞에서 스텝을 밟은 보람이 있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도운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지는 게 거울로 보였다. 희영은 속으로 '됐다. 오늘 나 좀 된다'라며 승리를 확신했다.
"자, 마지막 한 번 더 갈게요! 이번엔 방향 바꿔서 왼발부터 시작!"
마지막 세 번째 반복.
왼발 앞, 닫고. 왼발 옆, 닫고. 데미 쁠리에.
여기까지는 완벽했다. 이제 다시 반대쪽인 오른발로 넘어가야 하는 타이밍. 희영의 뇌는 분명 '오른발 앞'을 지시했다.
그런데 반대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순간, 방금까지 움직이던 왼발에 익숙해진 나머지, 전환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갔다.
희영의 '왼발'이 다시 툭 하고 나가버렸다.
발이 나간 직후, 희영은 자신이 틀렸다는 걸 깨닫고 그 자리에 멈칫 굳어버렸다.
허공에서 갈 길을 잃고 멈춰 있는 희영의 발을 도운이 정확히 포착했다. 도운의 입꼬리가 천천히, 아주 얄밉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희영이 거울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눈으로 욕을 했지만, 도운은 이미 완벽한 승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든 수업이 끝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신발장 앞.
"제가 이긴 거 맞죠?"
가방을 멘 도운이 단화를 꺼내 신는 희영을 향해 쐐기를 박았다.
희영이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렸다.
"아니, 진짜 딱 한 번 틀린 건데."
"한 번도 안 틀리기로 했잖아요."
"도운 씨도 아까 거의 바 잡을 뻔했거든요?"
"안 잡았습니다."
"손가락 한 3센티 남았어요."
"안 닿았으면 성공입니더."
논리적으로 도운의 승리가 맞았다.
"그래서, 이기면 뭐 받는 건데요?"
투덜거리며 단화를 다 신은 희영이 물었다.
그제야 두 사람은 오늘 내기에 벌칙이 없었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도운이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그럼 음료수 하나 사주이소. 땀을 너무 많이 흘렸더니 목마르네예."
"겨우요?"
"뭐, 그럼 끝나고 국밥이라도 사달라 할까예?"
"됐어요. 그놈의 국밥은 이제 그만 좀 놓아주세요."
학원 건물을 나선 두 사람은 각자 갈 길로 흩어지는 대신, 건물 1층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편의점 냉장고 문을 연 도운은 수많은 화려한 음료수들을 제치고, 차가운 이온 음료 한 병을 집어 들었다.
"이긴 사람이 겨우 이거 골라요? 비싼 거 먹지."
"남의 돈이라고 굳이 비싼 거 고르면 좀 양심없다 아닙니까. 이거면 충분합니더."
계산대에 카드를 내민 희영은 그를 슬쩍 다시 보았다.
두 사람은 곧바로 헤어지지 않았다. 편의점 앞 작은 테라스 파라솔 아래에 나란히 서서 뚜껑을 땄다.
"도운 씨는 발레 끝나고도 복싱 가요?"
"미쳤습니꺼. 지금 다리가 이 모양인데 줄넘기 뛰다가 쓰러질 일 있나. 복싱은 발레 없는 날에 갑니더."
도운이 이온 음료를 꿀꺽꿀꺽 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저도 오늘 발레 오기 전에 어제 클라이밍 한 거 때문에 어깨 근육통 와서 파스 붙이고 왔어요."
"제 말이요. 발레 시작하고 나서 운동 스케줄이 아주 빡빡해졌심더."
음료를 반쯤 비워낸 도운이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솔찌 말해서 이번 내기는 제가 생각해도 제 조건이 너무 유리했던 것 같은데요."
그 말에 희영이 즉시 반응했다.
"지금 이겨놓고 여유 부리는 거예요?"
"아니, 다음에는 같은 동작으로 해야 공평하지 않겠습니꺼."
"좋아요. 다음 주에는 같은 동작으로 해요."
음료를 마시고 편의점 앞을 나서자 헤어질 시간이었다.
도운이 손에 든 스포츠음료 병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며 인사했다.
"잘 먹었습니다. 다음 주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 주엔 제가 얻어먹을 건데요."
"자신 있습니까?"
"허어? 이번 주에 학원에 일찍 와서 연습하셨던 분이 한번 이겼다고 너무 으스대시는데요?"
희영의 정곡을 찌르는 공격에 도운이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멈칫했다. 도운이 눈을 가늘게 뜨며 반격했다.
"……에이, 집에서 발 꼼지락대면서 연습했잖아요. 안 봐도 비디오구만."
이번에는 희영이 멈칫했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당황한 희영의 인정에, 도운이 결국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