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수업의 여파는 생각보다 훨씬 길고 지독했다. 희영은 주말 내내 허벅지 안쪽과 종아리에 배긴 알을 풀기 위해 폼롤러 위에서 앓는 소리를 내야 했다. 평소에는 제대로 의식조차 하지 않던 허벅지 안쪽과 종아리 깊숙한 곳까지 뻐근하게 당겼다.
하지만 두 번째 수업 날, 희영은 포기하는 대신 일찌감치 스튜디오 탈의실로 향했다. 한 번 겪어봤으니 오늘은 지난번처럼 뻣뻣하게 굳어있지 않겠다는 묘한 오기가 발동했다.
거울 앞에 선 희영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첫날의 그 완벽하고 빳빳했던 세팅과는 사뭇 달랐다. 여전히 시크한 블랙 레오타드에 핑크색 타이츠였지만, 허벅지 위까지 끌어올린 두툼한 레그워머와 상체를 데우기 위해 걸친 얇은 워머 티셔츠를 더했다. 유튜브를 보며 수십 개의 핀을 꽂았던 번 헤어도 오늘은 대충 하나로 질끈 묶어 틀어 올린 상태였다.
'그래, 멋 부리다 얼어 죽지 말고 근육이나 데우자.' 실용성을 장착한 그 모습은, 옷만 보면 두 번째 수업인 사람 같지는 않았다.
한편, 스튜디오 밖 복도 소파에는 도운이 널브러져 앉아 스마트폰 액정을 두드리고 있었다. 오늘도 여전히 품이 넉넉한 헬스장용 검은색 반팔 티셔츠와 펑퍼짐한 트레이닝복 바지 차림이었다. 180이 훌쩍 넘는 커다란 덩치를 소파에 구겨 넣은 채,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숫자 1이 사라지기 무섭게, 지난주 첫 수업부터 장염이라며 빠졌던 친구 태준의 답장이 날아왔다.
도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뜨끈한 돼지국밥 뚝배기에 부추를 잔뜩 썰어 넣고, 깍두기 국물을 부어 훌훌 마실 생각에 벌써부터 군침이 돌았다. 오늘 이 핑크빛 지옥에서 1시간 동안 뼈마디를 분해당하고 나면 그 정도 보상은 받아야 마땅했다.
곧 시작을 알리는 경쾌한 피아노 선율이 스튜디오에 울려 퍼졌고, 도운은 휴대전화를 가방에 쑤셔 넣고 강의실 입구로 향했다. 문 앞에는 강사가 출석부를 들고 서서 회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도운씨. 혼자서도 화이팅!"
강사의 나긋한 응원에 도운이 출입문 쪽을 힐끗 돌아보며 답했다.
"아뇨, 오늘은 태준이도 온답니더."
그 말에 강사가 아이패드 화면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 이태준 회원님은 지난번에 바로 환불하셨는데요."
"…예?"
순간, 도운의 뇌 정지가 왔다. 스튜디오 안의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페이드아웃 되며 삐- 하는 이명 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다.
'환불을 했다고?' 방금 전까지 국밥을 먹자며 카톡을 하던 놈이 이미 지난주에 환불을 때렸다고?
"자, 다들 자리 잡고 매트 스트레칭부터 갈게요!" 강사의 활기찬 목소리에 회원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도운은 당장이라도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이미 수업이 시작되어버린 탓에 어정쩡하게 구석의 요가 매트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뒤통수를 커다란 망치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배신감이라는 단어로는 이 끓어오르는 감정을 다 설명할 수 없었다. 짧은 매트 스트레칭이 끝날 때까지도 당연히 태준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모두 일어나서 바(Barre) 잡으실게요!"
음악이 바뀌고 본격적인 바 워크가 시작되었지만, 도운의 멘탈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원래도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뚝딱이였는데, 분노로 집중력까지 산산조각이 나버리니 연달아 순서를 놓쳤다.
"자, 오른발 탄듀 앞(Devant), 그리고 옆(À la seconde)!"
강사의 구령에 맞춰 다들 팔을 동그랗게 모아 앙 아방(En avant)을 만들 때, 도운은 홀로 허공을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고 복싱 가드를 올릴 기세로 팔을 굳히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눈앞에 이태준이 있다면 시원하게 원투 펀치를 날려버릴 기세였다.
"잠깐 물 드시고 센터 갈게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도운이 물병 대신 휴대전화를 낚아채 복도로 튀어나갔다.
강의실 안에서, 미끄러운 땀을 닦아내며 텀블러를 들고 숨을 고르던 희영의 귀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선명하게 꽂혔다.
"아니 미친놈아!!!"
아주 분노가 꽉 들어찬, 억센 경상도 사투리였다. 희영은 하마터면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평소 스튜디오 안에서 쓰던 어설프게 순화된 억양이 아닌, 날 것 그대로의 폭발이었다. 휴게실 소파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유리문을 뚫고 스튜디오 안까지 아주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니 아까 국밥 특으로 쏜다 안 했나! 환불을 쳐 해놓고 국밥이 넘어가나!!"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는 우아한 발레 스튜디오 복도에 울려 퍼지는 거칠고 투박한 항의였다.
"니 내일 체육관 오기만 해봐라. 진짜 가만 안 둔다."
희영은 간신히 물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어깨가 주체할 수 없이 들썩거렸다. 첫 번째 수업의 수치심과 오늘 바 워크에서의 긴장감이, 저 찰진 사투리 욕설 한 방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국밥이 넘어가나'라는 대목에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스트레칭을 하는 척 매트 위로 고개를 완전히 처박아야 했다.
잠시 후, 뒤늦게 자신의 성량을 인지하고 아차 싶었는지 통화를 끊은 도운이 씩씩거리며 강의실로 들어왔다. 커다란 어깨가 분노로 씩씩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그가 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걸음을 옮기다,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잘게 떨고 있는 희영을 발견했다.
도운이 다가오는 낌새에 고개를 든 희영과, 거울을 통해 웃음을 꾹 참던 그녀의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들렸습니꺼?"
도운이 헛기침을 하며 민망한 듯 아주 작게 물었다. 목덜미부터 귀끝까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는 방금 전까지 뿜어내던 살기 대신 머쓱함이 가득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사투리를 애써 집어넣으려는 듯 억양도 다시 어색하게 평평해져 있었다.
"조금요."
희영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입술을 깨물어 누르며 답했다. 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덩치 큰 남자가, 동지를 버리고 튄 친구 때문에 복수심에 불타오르면서도 민망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너무나도 우스웠다.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희영이 "푸하학!" 하고 현실 웃음을 시원하게 터뜨리고 말았다.
희영이 끅끅대며 웃자, 도운도 어이가 없어서 이마를 짚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진짜 나쁜 놈 아닙니까. 환불 때려놓고 나보고 먼저 들어가 있으라니, 사람 바보 만들고."
"그러게요. 저 아까 밖에서 국밥 얘기하실 때 진짜 너무 웃겨가지고…."
수업 후반부 센터 워크에서도 도운의 분노 게이지는 다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1번 포지션에서 양발로 가볍게 점프를 뛰는 소테(Sauté) 동작이 반복될 때, 도운은 착지할 때마다 '쿵! 쿵!' 하고 웅장하게 바닥을 울렸다. 흡사 링 위에서 무거운 스텝을 뛰는 파이터 같았다. 희영은 곁눈질로 도운을 볼 때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복근에 힘이 빡 들어갔다.
모든 수업이 끝나고, 지친 몸을 이끌고 건물 입구의 계단을 내려오며 희영이 물었다.
"그래도… 계속 나오시는 거죠?"
도운이 헛기침을 큼큼 하더니 단호하게 답했다. "아, 제가 와 그만둡니꺼. 돈 낸 건 뽕 뽑아야죠."
도운이 주먹을 가볍게 쥐며 다짐하듯 덧붙였다. "그 배신자 자식 보란 듯이, 제가 여기서 다리 일자로 찢어서 사진 보내줄 겁니다."
그 비장한 선언에 희영이 픽 웃으며 도운의 걸음걸이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아까의 분노 섞인 점프 여파인지, 도운은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한쪽 다리가 미세하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거… 올해 안에는 가능하시겠어요?"
희영의 장난기 어린 질문에 도운이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허벅지를 슬쩍 주무르더니, 꽤나 진지한 얼굴로 되물었다.
"……내년까지 봐야 됩니꺼?"
희영의 웃음이 먼저 터졌다. 도운도 결국 따라 웃으며 후들거리는 허벅지를 한 번 더 주물렀다. 건물 입구에서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각자 지하철역과 주차장 쪽으로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