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느지막이 눈을 뜬 희영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손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찾았다. 잠금 화면을 켜자마자 떠 있는 알림창 하나에 게슴츠레했던 눈이 조금 선명해졌다.
어젯밤 자정을 넘기며 수다를 떨다 잠들었는데, 아침이 밝자마자 대화는 끊긴 적 없다는 듯 이어지고 있었다. 희영은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당기며 타자를 쳤다.
희영은 휴대전화를 협탁 위에 툭 던져두고 다시 눈을 감았다. 따뜻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기분 좋게 늦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그날 오후 3시쯤. 거실 소파에 널브러져 유튜브를 보던 희영은, 알고리즘에 뜬 '초보자도 낚이는 배스 낚시 꿀팁'이라는 쇼츠 영상을 보다가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영상 속 남자가 물고기를 낚으려다 냅다 물에 빠지는 장면 때문이었다.
희영은 망설임 없이 공유 버튼을 누르고, 카카오톡 목록 가장 상단에 위치한 '윤도운'을 눌렀다.
희영이 소리 내어 웃었다. 오전에는 도운이 먼저 보냈고, 오후에는 웃긴 걸 발견한 희영이 먼저 보냈다. 한 번 물꼬가 터진 연락은 주말 내내 가랑비 옷 젖듯 스며들었다.
그 변화는 평일이 되자 더욱 뚜렷해졌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 만원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던 희영이 손잡이를 꽉 쥔 채 한 손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후, 꽉 막힌 올림픽대로에 멈춰있는 도운도 답장을 보냈다.
도운은 외근 중 편의점 앞에 차를 세워두고 마시는 캔 커피 사진을 찍어 보냈고, 희영은 회사 탕비실에 새로 들어온 과자 사진을 찍어 보냈다. 외근이 잦은 도운의 업무 특성상 운전 중일 때는 한두 시간씩 답장이 없기도 했고, 희영 역시 회의에 들어가면 한참 뒤에나 메시지를 확인했다. 각자의 시간이 비는 틈바구니마다 아주 짤막한 대화가 끼어들었다.
수요일 오후. 희영은 회의실 구석 자리에 앉아 노트북 모니터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앞에서 팀장이 다음 분기 기획안을 두고 한 시간째 똑같은 잔소리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지이잉-.
테이블 아래 무릎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희영은 팀장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화면을 켰다. 도운이었다.
희영은 사진을 열어보았다. 사진 속에는 뚝배기에 담긴 기괴한 비주얼의 음식이 찍혀 있었다. 붉은 국물 위로 눅눅하게 젖어가는 돈가스 세 조각. 메뉴판을 캡처한 듯한 다음 사진에는 '얼큰 돈가스 국밥'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희영은 하마터면 회의실 한가운데서 콧방귀를 뀔 뻔했다.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책상 아래로 휴대전화를 쥔 손을 숨겼다.
희영은 어깨를 잘게 떨며 웃음을 참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지루해 미칠 것 같던 오후에 잠깐 숨통이 트였다.
그리고 목요일 오후. 사무실 복사기 앞에 서 있던 희영은, 팀장이 보낸 업무 수정 지시 메일을 확인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A로 하라며. 이제 와서 갑자기 C로 바꾸면 어쩌라는 거야?'
짜증이 확 치솟은 희영은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잠금을 풀고 익숙하게 채팅방 하나를 열어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타자를 빠르게 치던 희영의 엄지손가락이 멈칫했다.
화면 최상단에 고정된 듯 자리 잡은 윤도운의 이름. 희영은 입력창에 적힌 글자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보통 회사에서 짜증 나는 일이 생기면 대학 동기들이 있는 단톡방이나 친한 직장 동료에게 가장 먼저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그런데 지금, 가장 먼저 카톡 창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윤도운이었다.
희영은 입력창의 커서가 끔뻑이는 것을 보며 아주 잠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마저 타자를 쳐서 전송 버튼을 눌렀다.
목요일 저녁, 거래처 미팅을 마치고 차에 올라탄 도운은 주차한 채 출발하기 전 휴대전화부터 확인했다. 희영이 보낸 회사 팀장 욕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도운은 핸들에 팔을 기댄 채 피식 웃으며 답장을 쳤다.
그러다 문득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번 주말 개봉 영화 소개를 듣던 도운이 타자를 이어갔다.
금요일 오후.
스튜디오 탈의실에서 나온 희영이, 매트를 깔고 있는 도운의 옆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일찍 왔네요?"
"외근 안 나갔다 했잖아요."
도운이 하던 스트레칭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희영을 보며 답했다. 마치 아까까지 텍스트로 떠들던 대화를 공기 중으로 그대로 옮겨온 것처럼 어떤 어색함도 없었다.
수업이 시작되고, 워밍업과 바(Barre) 워크가 진행되었다. 센터 워크 시간, 희영이 스텝을 밟다 팔의 방향을 잃고 살짝 허우적댔다. 그 모습을 거울로 포착한 도운이, 눈을 치켜뜨고 제 팔을 휙휙 휘저으며 무언의 수신호를 보냈다.
희영은 도운의 신호를 알아듣고 황급히 팔의 위치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거울 너머로 도운을 향해 입모양으로 '땡큐'라며 얄밉게 웃어 보였다. 도운도 소리 없이 큭큭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50분의 수업이 끝나고, 옷을 갈아입고 건물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같은 쪽으로 몇 걸음 걸었다.
"아오, 오늘도 종아리 터지겠네요."
희영이 뻐근한 다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조심해서 가요."
희영이 가볍게 인사하며 지하철역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뒤돌아 걷는 희영의 옆으로, 도운이 당연하다는 듯 걸음을 맞춰 따라왔다.
희영이 걸음을 늦추며 고개를 돌렸다.
"어? 도운 씨 차 안 가져왔어요? 이쪽 주차장 아니잖아요."
"아, 예. 오늘 외근 없어서 차 안 가져왔습니더. 저도 지하철 타야 됩니더."
도운이 가방끈을 쥐며 담백하게 대답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지하철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선선한 가을밤의 공기가 기분 좋게 뺨을 스쳤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옆에서 걷는 도운이 묘하게 조용해졌다. 정면만 응시한 채 약간 말을 고르는 듯한 기색이었다. 희영은 그 미세한 공기의 변화를 알아챘지만 가만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역 입구가 저만치 보일 무렵, 도운이 걸음을 늦추며 불쑥 입을 열었다.
"희영 씨, 내일도 암장 갑니까."
"아니요. 이번 주 회사 때문에 너무 피곤해서 내일은 진짜 쉴 거예요. 왜요?"
도운이 희영을 한번 보고 입을 열었다.
"주중에 말했던 그 액션 영화요. 내일 같이 보러 갈랍니까."
희영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희영은 도운의 얼굴을 한번 봤다. 이번에는 발레도, 클라이밍도, 장비를 봐줄 일도 없었다.
희영을 따라 걸음을 멈춘 도운이 몸을 돌려 그녀와 눈을 맞췄다.
"예. 내일 딱히 할 거 없으면 같이 보러 가자고요."
희영은 잠깐 도운을 바라봤다. 지금까지는 만날 때마다 먼저 이유가 있었다. 이번에는 그게 없었다.
"영화를… 둘이요?"
희영이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도운은 잠깐 입술을 다물었다가 희영을 똑바로 봤다.
"네, 둘이요."
잠깐의 틈 뒤, 도운이 덧붙였다.
"영화 보고, 밥도 먹고. 그냥 데이트 하자는 겁니더."
희영은 아주 잠깐 숨을 멈췄다. 예상했던 말이 실제로 도운의 입에서 나오자 느낌이 조금 달랐다.
대답을 고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좋아요. 그럼 내일 데이트해요."
희영의 수락에 도운의 얼굴에 시원한 웃음이 번졌다.
"알겠습니더. 영화 예매는 제가 할 테니까, 시간 정해서 카톡 할게요."
"그래요. 내일 봐요."
두 사람은 그대로 나란히 역 안으로 들어갔다. 개찰구를 지나 서로 타야 할 방향을 확인한 뒤,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길이 갈리는 곳에서야 걸음을 멈췄다.
"그럼 진짜 내일 봐요."
"예. 내일 봅시더."
희영은 반대편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무거운 발레 가방의 끈을 한 번 고쳐 멨다. 주머니 속 휴대전화는 울리지 않았지만, 방금 전 도운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냥 데이트 하자는 겁니더.’
에스컬레이터가 절반쯤 내려갔을 때, 희영은 문득 내일을 떠올렸다. 내일은 발레 가방도, 암벽화도 필요 없었다. 그냥 윤도운을 만나러 나가는 날이었다.
'내일은 뭐 입고 나가지.'
희영은 지하철역의 웅웅거리는 소음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