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낮, 거울 앞에 선 희영은 옷장 문을 활짝 열어둔 채 한참을 서성였다. 침대 위에는 이미 옷걸이에서 빼낸 옷들이 서너 벌 널브러져 있었다.
어제 지하철역에서 도운의 '데이트' 선언을 들은 후부터 머릿속이 복잡했다. 평소 주말에 친구들을 만날 때 입는 편안한 후드티와, 작정하고 꾸민 듯한 원피스 사이에서 손이 수십 번을 오갔다.
원피스를 몸에 대보던 희영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옷걸이를 행거에 다시 걸었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것은 다리 선이 예쁘게 떨어지는 차콜색 슬랙스에 차분한 아이보리색 브이넥 니트였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소재와 핏에 신경을 쓴 차림이었다. 화장대 앞에 앉아 평소보다 눈매를 조금 더 또렷하게 다듬고, 고민 끝에 손목 안쪽에 향수를 한 번만 뿌려 귓바퀴 뒤로 가볍게 문질렀다.
약속 장소인 시내의 대형 복합 쇼핑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영화관이 있는 층으로 올라가던 희영은 매표소 근처에 서 있는 윤도운의 듬직한 뒷모습을 단번에 찾아냈다.
도운 역시 오늘만큼은 늘 입던 기능성 트레이닝복이나, 얼마 전 카페에서 봤던 각 잡힌 셔츠 차림이 아니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스웨이드 재킷에 짙은 색 생지 데님을 입은 그는,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상영관 전광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린 희영이 천천히 다가가며 가볍게 불렀다.
"윤도운 씨."
도운이 고개를 휙 돌렸다.
"아, 왔…."
도운의 인사가 채 끝맺지 못하고 멈췄다. 그의 시선이 희영의 얼굴에서 시작해 니트와 슬랙스, 그리고 평소 묵직한 발레 가방 대신 어깨에 가볍게 멘 작은 숄더백까지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아주 짧은 정적이 쇼핑몰의 백색소음 사이로 내려앉았다.
"일찍 왔네요."
희영이 먼저 입을 열며 다가섰다.
"어… 예. 차가 안 막혀가 일찍 왔습니더."
도운이 뒷목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다시 희영과 눈을 맞췄다.
"오늘 옷이, 느낌이 확 다르네요."
"이상해요?"
"아뇨. 예뻐서 잠깐 쳐다봤습니더."
직설적인 대답에 희영은 순간 숨을 참았다. 심장이 갈비뼈 안쪽을 쿵 하고 치는 것 같았지만, 굳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도운을 마주 보았다.
"…도운 씨도 오늘 머리 힘 좀 주셨네요."
"아, 예. 신경 좀 썼습니더."
도운은 뒷머리를 가볍게 털어내며 픽 웃었다. 귀 끝이 빨개져 있었다.
"팝콘 먹을랍니까?"
"네. 영화 볼 땐 먹어야죠. 카라멜 괜찮아요?"
"전 오리지널파긴 한데, 오늘은 반반으로 가시죠."
도운이 자연스럽게 매점 키오스크로 앞장서서 카드를 꽂았다. 예매한 영화는 전날 카톡으로 이야기했던 액션 영화였다. 두 사람은 팝콘과 콜라 두 잔을 들고 어두컴컴한 상영관 안으로 들어섰다.
영화가 시작되고 스크린에서 화려한 액션씬이 쏟아졌다. 스피커를 찢을 듯한 폭발음과 총격전 소리가 상영관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스크린을 향해 고정된 희영의 신경 한구석은 자꾸 자신의 오른쪽 팔걸이 부근으로 향했다. 발레 스튜디오에서 항상 대각선 뒤에서 서로를 지켜보던 거리가, 팝콘 통 하나를 사이에 두고 좁혀지자 이상한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두 사람은 말없이 스크린만 쳐다보고 있었지만, 팝콘 통을 향해 손을 뻗을 때마다 타이밍이 묘하게 겹쳤다.
희영이 팝콘을 집으려 손을 뻗었을 때, 마찬가지로 팝콘 통 안으로 들어오던 도운의 손가락과 가볍게 스쳤다.
순간 두 사람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움찔하며 손을 거둬들였다. 어두운 상영관 안, 스크린의 불빛이 번쩍일 때마다 희영은 곁눈질로 도운의 옆모습을 힐끔거렸다. 도운 역시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었지만 팝콘 통으로 뻗는 손길은 뚝 끊겨 있었다.
잠시 후, 도운이 아예 한 손을 콜라에 고정했다. 희영이 팝콘을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공간을 비워준 것이었다. 희영은 소리 없이 팝콘을 입에 넣었다. 그 뒤로 한동안은 영화보다 오른쪽 팔걸이와 팝콘 통 쪽이 더 신경 쓰였다.
그래도 영화가 후반으로 넘어갈 즈음에는 다시 스크린에 빠져들었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상영관에 불이 켜졌다.
"와, 후반부 액션 진짜 살벌하네요."
희영이 뻐근한 목을 돌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제 말이요. 차 부서질 때 속이 다 시원하던데."
"근데 마지막에 그 배신자 어떻게 된 거예요? 저 중간에 약간 놓쳤는데."
"아, 그거 주인공이 컨테이너 박스 위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상영관 밖으로 걸어 나오는 동안, 두 사람은 영화 내용에 대해 활기차게 떠들었다. 어두운 곳에서 잠깐 유지됐던 긴장감을 털어내듯, 둘 다 금세 평소의 편안한 말투로 돌아와 있었다.
쇼핑몰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있었다.
"저녁은 제가 살게요. 근처에 맛있는 데 있나 볼까요?"
희영이 휴대전화를 꺼내려 하자, 도운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근처에 파스타집 알아봤는데, 그쪽으로 가시죠. 예약해 뒀습니더."
도운의 입에서 나온 '파스타'라는 단어에 희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국밥의 인상이 좀 강했던 탓일지, 파스타나 스테이크 같은걸 잘 먹는 타입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탓이다.
"파스타요? 도운 씨 국밥 당기는 거 억지로 참는 거 아니고요?"
"아닙니더. 저도 칼질할 줄 압니다."
예약해 둔 레스토랑은 창밖으로 시내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곳이었다. 테이블 간격이 넓어 말소리가 섞이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주문한 뒤, 먼저 나온 샐러드를 나눠 먹으며 자연스럽게 물잔을 부딪쳤다.
"근데 이번 수강 기간도 이제 거의 끝나가네요."
샐러드를 포크로 찌르며 희영이 먼저 운을 뗐다.
"시간 진짜 빠르다. 첫날 우리 뚝딱거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더. 그 환불한 놈한테 전화한다고 밖에 나가 씩씩댔던 게 저번 주 같은데."
도운이 물잔을 내려놓으며 작게 웃었다.
"희영 씨는 다음 달도 계속할 겁니까?"
도운의 질문에 희영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이제 턴 도는 거 약간 감 잡았거든요. 기왕 시작한 거 뽕 뽑아야죠. 도운 씨는요?"
"저도 무조건 등록할 겁니더."
"의외네요. 복싱 때문에 바쁘다면서요."
희영이 물잔을 매만지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처음엔 친구 때문에 억지로 갔던 거잖아요. 설마 진짜 발레에 재능을 발견한 건 아니죠?"
도운은 테이블 위에 두 손을 깍지 껴 올린 채 희영을 가만히 응시했다. 식당의 펜던트 조명 빛이 도운의 눈동자에 흔들림 없이 맺혀 있었다.
"아니요. 솔찌 발레가 막 엄청 재밌고 적성에 맞고 그런 건 아입니더."
도운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학원 가는 날이 기다려지더라고요."
희영의 입가에 맴돌던 옅은 미소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거기 가면 희영 씨가 있으니까요."
희영은 샐러드를 쥔 포크를 천천히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본 도운의 얼굴엔 어떤 농담의 기색도 없었다.
"처음엔 그냥 같이 못해서 웃겼는데, 어느 순간부터 학원 가는 날이 기다려졌습니더. 요즘은 뭐 하나 생기면 희영 씨한테 먼저 말하게 되고, 하루 종일 카톡 해놓고도 만나면 또 할 말이 생기고요."
도운은 깍지 낀 손에 아주 살짝 힘을 주었다.
"어제 데이트하자고 말해놓고 생각해보니까 확실히 알겠더라고요. 저 희영 씨 많이 좋아합니더."
희영은 숨을 작게 들이켰다. 언제부터 이 사람이 자신의 일상 한가운데 자리를 잡은 건지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어제 지하철역에서 데이트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속으로 깊게 안도했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했다.
"빙빙 돌려 말하는 거 잘 못하겠고."
도운이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작게 미소 지었다.
"희영 씨도 저랑 같은 마음이면, 우리 이제 운동 친구 말고 제대로 만나봅시다."
희영은 손에 쥐고 있던 냅킨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도운의 솔직한 고백을 듣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저도 도운 씨 좋아해요."
이번에는 희영도 돌려 말하지 않았다.
도운의 눈이 아주 조금 커졌다.
희영은 그 표정을 보고서야 평소처럼 입꼬리를 시원하게 끌어올렸다.
"근데 윤도운 씨, 저 클라이밍 8년 한 거 알죠?"
"예. 알죠."
도운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다.
"저, 한 번 잡은 건 절대로 쉽게 안 놓쳐요. 나중에 후회해도 늦었어요."
희영의 단호하고도 유쾌한 대답에 잠시 굳어 있던 도운의 어깨가 스르르 풀렸다. 도운의 얼굴에 안도감이 섞인 시원한 웃음이 번졌다.
"와. 그거 엄청 든든하네요."
"그러니까 앞으로 발레 학원에서 나 쳐다보면서 깐족거리거나 오지랖 부리면 가만 안 둬요."
"에이, 그건 약속 못 하겠는데요. 거북이처럼 목 집어넣고 낑낑대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봅니까."
"아, 진짜 이 인간이 끝까지."
둘이 마주 보고 웃다가 잠깐 대화가 끊겼다. 도운이 물잔을 들었다 놓더니 희영을 다시 봤다.
"그라면 우리 오늘부터 사귀는 겁니꺼?"
희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고백까지 해놓고 그걸 또 물어요?"
"확실한 게 좋으니까 그렇죠."
"네. 오늘부터요."
마침 직원이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서빙하며 대화가 한 박자 끊어졌다. 방금 전까지 테이블 위를 맴돌던 팽팽한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시 익숙한 티키타카가 돌아왔지만,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웃는 눈빛 속에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온도가 담겨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오자 도운이 희영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집까지 데려다 드릴까요? 차 바로 저쪽에 있습니더."
희영은 잠깐 도운을 올려다보다가, 웃음을 참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너무 설레서 안 되겠어요. 옆에 더 앉아 있으면 집에 가서도 잠 못 잘 것 같아서."
도운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희영은 괜히 숄더백 끈을 고쳐 잡으며 짐짓 정중하게 덧붙였다.
"다음부터는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 기억해 놓겠습니더. 그라면 오늘은 역까지만 데려다줄게요."
"네. 오늘은 거기까지요."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으며 지하철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을밤의 공기는 제법 차가웠지만, 나란히 걷는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웠다. 역으로 향하는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릴 때였다.
도운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더니, 자신의 스웨이드 재킷 옆에서 가볍게 흔들리고 있는 희영의 손을 자연스럽게 감싸 쥐었다.
희영의 어깨가 흠칫 굳었지만 이내 힘을 빼고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맡겼다. 핸드랩을 감고 샌드백을 치던 손바닥이, 희영의 굳은살 박인 손바닥과 맞닿았다. 도운의 손은 꽤 컸고 따뜻했다.
"손이 차네요."
도운이 희영의 손을 꽉 쥔 채로 제 스웨이드 재킷 주머니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수족냉증이 좀 있어요."
희영이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주머니 속에서 맞잡은 손의 온기가 기분 좋게 번져나갔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고, 두 사람은 주머니 속에 손을 넣은 채 발걸음을 맞춰 횡단보도를 건넜다.
지하철역 입구.
평소 학원 입구에서 '다음 주에 봐요'라며 손을 흔들던 때와는 달랐다. 오늘 처음 함께 온 영화관 근처 역 앞에서 두 사람은 쉽게 손을 놓지 못했다. 도운이 아쉬운 듯 희영의 손을 한 번 더 꾹 쥐었다가 놓았다.
"도착하면 톡 남겨요."
"네. 도운 씨도요."
희영이 개찰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멈춰 섰다. 그리고 휙 뒤를 돌아보며 도운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근데 도운 씨, 내일은 뭐 할 거예요?"
도운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내일요? 내일 일요일인데."
"내일 일요일인데, 뭐 할 거냐고요. 할 거 없으면 또 밥이나 먹든가."
희영의 쿨한 선제공격에 도운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아. 좋습니더. 내일 점심쯤 어디서 볼지 카톡합시다."
"그래요. 조심히 들어가요."
역 입구의 계단을 내려가던 희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도운은 여전히 입구에 서서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희영을 지켜보고 있었다.
희영이 역 안쪽으로 사라지는 걸 본 뒤에야 도운은 주차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개찰구를 지나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선 희영은 방금 전까지 도운과 맞잡고 있던 오른손을 왼손으로 가볍게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는 아직 묵직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발레 학원 첫날, 짝다리를 짚고 허우적대던 엉성한 남자가 이렇게 자신의 일상 한가운데로 훅 치고 들어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희영은 지하철 승강장을 향해 걸어가며 화면 끝에 붙은 낯선 호칭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발걸음이 소테라도 뛰듯 가볍게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