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 열한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희영은 늦은 아침을 먹고 소파에 늘어져 있었다. 전날 발레 수업의 피로가 아직 조금 남아 있었지만, 오늘은 클라이밍도 쉬는 날이었다. 모처럼 아무 일정도 없는 주말이었다.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희영은 화면을 한 번 읽고 그대로 멈췄다.
답장은 거의 바로 왔다.
잠시 뒤 도운의 메시지가 연달아 올라왔다.
희영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 웃었다. ‘가끔’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체험 한 번 만에 자기 암벽화를 알아보고 있다는 게 영 수상했다.
그럴 줄 알았다.
몇 초 뒤.
희영은 자기가 장비를 사러 갈 때 종종 들르는 클라이밍 전문점을 떠올렸다. 지하철로 찾아가기 어렵지 않고, 입문용 모델도 여러 종류를 신어볼 수 있는 곳이었다. 매장 이름을 보내주려다가 손가락이 멈췄다.
설명만 해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이어 도착한 메시지가 빨랐다.
희영은 채팅창을 내려다봤다.
특별할 것도 없는 부탁이었다. 처음 클라이밍을 해본 사람이 8년 한 사람에게 장비를 봐달라고 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약속은 싱겁게 잡혔다.
오후 세 시 조금 전, 희영은 클라이밍 전문점 앞에 먼저 도착했다. 평소 암장에 갈 때 입는 운동복 대신 청바지에 얇은 니트를 입고 작은 숄더백 하나만 메고 있었다. 멀리서 도운이 걸어왔다. 검은색 후드 집업 안에 흰 티셔츠, 편한 바지 차림이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많이 기다렸습니까?”
“저도 방금 왔어요. 근데 진짜 오늘 살 거예요?”
“그라니까 왔습니더. 구경만 하러 사람을 부르겠습니까.”
희영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먼저 매장 문을 열었다.
벽 한쪽에는 암벽화가 색과 형태별로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도운은 들어서자마자 걸음을 늦췄다. 얼핏 보기엔 다 비슷해 보이는 신발들이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밑창 모양도, 발등을 조이는 방식도 제각각이었다.
직원이 다가와 클라이밍 경력을 묻자 도운이 잠깐 머뭇거리더니 한 번 해봤다고 답했다.
직원의 시선이 아주 잠깐 희영 쪽으로 향했다. 희영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웃지 마이소.”
도운이 낮게 중얼거렸다.
“안 웃었는데요.”
“지금 웃고 있잖아요.”
직원은 처음이라면 발을 심하게 꺾는 형태보다 밑창이 비교적 평평하고 편한 모델부터 신어보는 게 좋다고 설명했다. 평소 신는 운동화 사이즈와 발볼을 확인한 뒤 몇 켤레를 가져왔다.
도운은 첫 번째 신발을 신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또 작습니다.”
“지난번 대여화 때도 똑같은 말 했잖아요.”
“아니, 이번에도 발끝이 꽉 낍니더.”
희영이 앞코와 뒤꿈치 쪽을 눈으로 확인했다. 처음 신는 사람이 견디기 힘들 만큼 조일 필요는 없지만, 일반 운동화처럼 발이 안에서 놀아서도 안 됐다.
“일어나서 한번 움직여봐요. 뒤꿈치 뜨는지 보고, 발가락 어디 한 군데 찌르듯 아픈 데 없는지도 봐요. 전체적으로 딱 붙는 정도면 괜찮아요.”
도운은 매장 안을 몇 걸음 걸은 뒤 한쪽 발씩 들어 뒤꿈치가 뜨는지 확인했다. 옆에서 표정을 살피던 희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뒤꿈치가 좀 뜨는 것 같은데. 다른 거 신어봐요.”
도운은 군말 없이 다시 앉았다.
두 번째.
세 번째.
한 모델은 발볼이 너무 좁았고, 다른 하나는 뒤꿈치가 미세하게 남았다. 희영이 이것저것 짚어줄 때마다 도운은 반박하지 않고 그대로 벗고 다시 신었다.
네 번째 신발을 신고 일어선 도운을 보던 희영이 결국 웃었다.
“오늘 왜 이렇게 말을 잘 들어요?”
“예?”
“뭐 하라는 대로 군말 없이 따르는 게 어색해서.”
도운이 자기 발을 한번 내려다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는 건 아는 사람 말 들어야죠.”
너무 당연한 답이 돌아와 희영은 잠깐 할 말을 잃었다가 도운의 발끝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건 괜찮아 보여요. 발가락 아파요?”
“아니요. 딱 붙기는 하는데 아프진 않습니다.”
“그럼 그 정도가 나아요. 처음부터 고수들 신는 거 따라 산다고 발 접어 넣을 필요 없어요.”
도운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한참을 신었다 벗었다 한 끝에 도운은 입문용으로 무난한 평평한 형태의 암벽화 한 켤레를 골랐다. 계산을 마친 그가 종이 쇼핑백을 받아들자 희영이 어이없다는 듯 그걸 한번 내려다봤다.
“진짜 샀네.”
“희영 씨가 사도 된다매요.”
“제가 언제 사도 된다고 했어요. 사려면 이게 낫다고 했지.”
“그게 그 말 아닙니까.”
“전혀 아닌데요.”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하며 매장을 나왔다. 희영은 자연스럽게 지하철역 쪽으로 몸을 돌리려다 옆에서 걸음을 맞춘 도운을 봤다.
“커피 한잔 할랍니까?”
희영은 잠깐 멈췄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네 시를 조금 넘긴 정도였다.
“그래요. 어차피 여기까지 왔는데.”
근처 카페에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 도운은 쇼핑백을 의자 옆에 세워두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근데 진짜 클라이밍까지 계속 할 생각이에요?”
희영이 다시 물었다.
“계속이라고 할 정도는 아입니더. 복싱은 원래 꾸준히 하는 거고, 발레는 일주일에 한 번이고.”
“거기에 클라이밍도 가끔.”
“그렇죠.”
“진짜 운동 좋아하네.”
“희영 씨도 일주일에 세 번씩 벽 타면서 누구 보고 그럽니까.”
“저는 발레 빼면 하나만 하잖아요.”
“에이, 하나를 8년씩 하는 게 더 무섭습니더.”
희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도운도 따라 웃다가 컵 겉면에 맺힌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근데 왜 오래 하는지는 조금 알겠더라고요.”
“클라이밍이요?”
“예. 지난번에 마지막에 하나 잡았을 때 좀 기분 좋던데. 처음에 안 되던 거 되니까.”
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수업 쉬는 시간에 자기가 설명했던 말을 이제 도운이 자기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계속 하게 되는 거예요. 하나 되면 그다음 게 또 안 되거든요.”
“끝이 없네.”
“그래서 재밌죠.”
잠깐 클라이밍 얘기를 하던 대화는 금세 다른 쪽으로 흘렀다. 도운이 복싱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산 장갑 이야기를 꺼냈고, 희영은 처음 산 암벽화를 사이즈를 잘못 골라 몇 달 고생했던 일을 털어놨다.
그러다 장비 얘기는 쇼핑 습관으로, 쇼핑 습관은 쉬는 날 뭐 하느냐는 이야기로 넘어갔다.
“도운 씨는 운동 안 하는 날엔 뭐 해요?”
“집에 있거나 낚시 갑니다.”
희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낚시도 해요?”
“예. 근데 그건 운동 아닙니더.”
“아니, 진짜 취미가 왜 이렇게 많아요.”
“앉아서 물 보는 게 취미 하나 더 있는 정도입니더. 희영 씨는요?”
희영은 클라이밍이 없는 날이면 집에서 늘어져 있거나, 여행 갈 곳을 찾아보며 시간을 보내는 편이라고 했다. 도운은 의외라는 듯 여행 이야기를 물었고, 희영은 최근 저장해둔 곳 몇 군데를 보여주다가 어느새 휴대전화 사진첩까지 열어 설명하고 있었다.
다섯 시가 조금 넘어 둘은 카페를 나왔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목에서 도운은 새 암벽화가 든 쇼핑백을 한 번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 이거 본전은 뽑아야 됩니더.”
“그러니까 제가 벌써 사지 말랬잖아요.”
“사놓으면 가게 되겠죠.”
“그 논리면 헬스장도 연간권 끊으면 매일 가게요?”
“그건 또 다른 문제고.”
희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역 입구에서 둘은 짧게 인사하고 갈라졌다. 희영은 계단 아래로 내려갔고, 도운은 쇼핑백을 든 채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밤 열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씻고 침대에 누운 희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는 윤도운의 이름과 함께 영상 하나가 떠 있었다.
희영은 영상을 눌렀다. 화면 속에는 규모가 꽤 큰 클라이밍장이 나왔다. 높은 벽과 독특한 구조물이 빠르게 지나가고, 마지막에는 한 사람이 긴 동작으로 다음 홀드를 잡는 장면이 이어졌다.
희영은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처음에는 영상 얘기였다. 저 암장은 난이도 체계가 어떻고, 초보자가 가기에는 어떤지, 희영이 예전에 가봤던 곳 중 어디가 좋았는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얘기가 조금씩 옆으로 샜다.
대화는 또 거기서 끝날 것 같았다.
희영은 휴대전화를 베개 옆에 내려놓았다.
삼 분쯤 지났을까.
다시 진동이 울렸다.
이번엔 클라이밍과 아무 상관없는 짧은 강아지 영상이었다. 희영은 황당한 내용에 소리 없이 웃다가 바로 답장을 쳤다.
그 뒤로는 정말 아무 얘기나 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 요즘 자주 먹는 간식, 다음 주 날씨, 도운이 낚시 갈 때마다 왜 꼭 새벽에 나가는지 같은 이야기까지.
희영이 문득 화면 위 시간을 확인했을 때는 자정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별 얘기도 아닌데 희영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웃으면서 다시 휴대전화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