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7시 30분. 모니터 속 엑셀 창의 숫자들이 개미 떼처럼 보이기 시작할 무렵, 책상 위에 엎어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강영현(웬수)]. 확인하지 않아도 뻔한 내용일 테지만, 나는 피곤한 눈을 비비며 메시지를 열었다.
[야. 튀어나와.] [고기 사줘.] [빨리 3, 2, 1.]
"아, 진짜 이 미친놈이……."
절로 튀어나오는 탄식을 삼키며 나는 타자기를 부술 듯이 답장을 쳤다. [네가 사. 나 오늘 야근각이야.] 하지만 1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진동이 울렸다.
[어쩌라고. 너네 회사 1층 로비임. 안 내려오면 너네 팀장님한테 가서 너 초등학교 3학년 때 바지에 오줌 싼 얘기 푼다.]
이 인간은 서른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도무지 철이 들 기미가 안 보였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무려 20년을 붙어 다닌 소꿉친구 강영현. 우리는 서로의 흑역사를 백과사전 두께만큼 공유하고 있는, 그야말로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였다. 나는 결국 노트북을 거칠게 덮고 가방을 챙겨 1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나서자, 통유리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네이비색 수트, 살짝 풀어헤친 넥타이, 걷어붙인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잔근육. 우리 회사 여직원들이 지나가며 힐끔거릴 정도로 멀끔한 자태였지만, 내 눈엔 그저 어릴 적 콧물을 소매로 닦던 꼬맹이가 몸만 커진 느낌이었다.
"야! 강영현!"
내 부름에 고개를 든 그가 특유의 여우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내 목에 걸린 사원증 줄을 잡아당겼다.
"켁! 야! 미쳤어?" "아이고, 우리 김대리님. 금요일 저녁인데 얼굴이 왜 이렇게 팍 삭았어? 젓갈인 줄 알았네." "너 진짜 죽고 싶냐?"
내가 정강이를 걷어차려 하자, 그가 얄밉게 쏙 피하며 내 정수리에 턱을 얹었다.
"아, 쫌! 무겁다고!" "네가 하도 안 커서 내가 턱 괴기 딱 좋은 사이즈가 된 거잖아. 가자, 오빠가 고기 사줄게." "누가 오빠야, 생일도 내가 두 달이나 빠르구만!"
투닥거리며 도착한 곳은 우리 회사가 있는 여의도와 강영현의 회사가 있는 마포 사이, 우리가 대학생 때부터 뻔질나게 드나들던 허름한 삼겹살집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강영현은 익숙하게 삼겹살 3인분과 소주 한 병, 맥주 한 병을 시켰다. 고기가 나오자 그는 집게를 내 앞으로 쓱 밀어주었다.
"자, 오늘은 특별히 네가 구울 영광을 줄게." "미쳤냐? 네가 불러냈으면 네가 구워야지." "아, 나 오늘 회의하느라 입을 너무 많이 털어서 팔에 힘이 없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뻔뻔하게 나오는 강영현을 째려보다가, 결국 내가 집게를 들고 불판 위에 고기를 올렸다. 하지만 고기가 채 익기도 전에, 그가 답답하다는 듯 혀를 쯧쯧 차며 내 손에서 집게를 쏙 빼앗아 갔다.
"아휴, 고기 다 태워먹네. 넌 진짜 나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냐? 고기 하나 제대로 못 굽고." "안 태웠거든? 그리고 내가 왜 너 없으면 안 되는데?" "누가 너랑 고기 먹어줘. 내가 구워주는 거나 감사히 먹어라."
입으로는 얄밉게 나불거리면서도, 그의 손길은 꽤나 섬세했다. 노릇노릇하게 잘 익은 고기들을 타지 않게 내 앞접시 쪽으로 차곡차곡 쌓아주기 시작했다. 첫 잔으로 시원하게 소맥을 말아 건네준 그는, 내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고기를 입 안 가득 밀어 넣는 걸 보며 피식 웃었다.
"천천히 좀 먹어라. 볼따구 터지겠다, 돼지야." "오늘 부장님이… 씹, 나한테 덤터기 씌운 거 생각하면 고기가 아니라 그 인간을 씹어 먹고 싶어."
나는 입 안에 고기를 우물거리며 오늘 하루 동안 쌓인 회사 스트레스를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영현은 턱을 괸 채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중간중간 내 말을 끊으며 깐족거렸을 텐데, 오늘따라 그는 그저 고기를 뒤집으며 간간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서 내가 화장실 가서 진짜 육성으로 쌍욕을… 야, 듣고 있냐?"
열변을 토하던 중, 강영현의 시선이 내 얼굴에 빤히 머물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 아니라, 묘하게 진지하고 깊은 눈빛이었다. 가게 안의 시끌벅적한 소음이 순간 음소거된 것처럼 고요하게 느껴졌다.
"왜… 왜 그렇게 보는데."
내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자, 그가 불판 위로 상체를 쑥 기울이며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숨결이 닿을 만큼 훅 좁혀진 거리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했다. 심장이 갑자기 미친 듯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가 긴 손가락을 뻗어 내 입가로 가져왔다.
"너……." "어, 어?" "입술 옆에 쌈장 묻었어. 칠칠맞기는 진짜. 초딩이냐?"
그의 엄지손가락이 내 입가를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는 묻은 쌈장을 냅킨에 닦아내며 얄밉게 킬킬거렸다.
"얼굴 붉어지는 거 봐라. 왜? 내가 갑자기 뽀뽀라도 할 줄 알았어?" "미… 미친놈아! 죽여버려 진짜!!"
나는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테이블 위에 있던 상추를 집어 그를 향해 마구 던졌다. 강영현은 상추를 이리저리 피하며 배를 잡고 웃어댔다.
"아, 진짜 김ㅇㅇ 반응 타격감 최고야. 넌 평생 나한테 놀림당하면서 살아야 돼." "안 먹어! 나 집에 갈 거야!" "야야, 알았어. 미안해. 고기 더 시켜줄게 앉아. 어?"
그가 웃음을 참으며 내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장난기 다분한 상황이었지만, 내 손목을 감싸 쥔 그의 손아귀 힘은 단단했고, 손바닥은 이상할 정도로 뜨거웠다.
자리로 다시 주저앉으며 나는 애써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냥 20년 지기 불알친구의 뻔한 장난일 뿐인데, 왜 갑자기 이런 다는 거지?
강영현은 다시 익숙한 솜씨로 내 잔에 맥주를 채워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잔을 부딪치며 마주친 그의 눈동자 속에는, 아까의 그 묘한 온기가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았다.
상추 투척 사건 이후, 나는 괜한 민망함에 눈앞에 놓인 소맥을 물처럼 들이켰다. 평소 주량을 훌쩍 넘긴 속도였다. 강영현은 처음엔 낄낄거리며 내 안주를 뺏어 먹더니, 내가 세 병째 소주를 까려고 하자 덥석 내 손목을 낚아챘다.
"야, 김ㅇㅇ. 그만 마셔. 너 내일 주말 내내 변기통 부여잡고 시체 놀이 할래?" "놔라아... 나 아직 부장님 욕 반도 못 했거든? 오늘 다 풀고 갈 거야."
혀가 반쯤 꼬인 내 목소리에 강영현은 작게 한숨을 쉬며 내 손에서 소주병을 빼앗아 테이블 저 멀리 치워버렸다.
"다 풀긴 뭘 다 풀어. 이미 네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여의도 한복판을 떠돌고 있구만. 일어나, 집에 가자."
그는 익숙하게 계산서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비틀거리며 그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나섰다. 고깃집 문을 열고 나오자, 아까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하늘에서 후덕지근한 여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아씨, 비 오네."
강영현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는 처마 밑에 쭈그려 앉아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우산... 우산이 어디... 어? 야, 강영현." "왜. 너 또 우산 안 챙겼지?" "아니... 우산이 문제가 아니라... 나 집 열쇠가 없어."
내 말에 그가 헛웃음을 쳤다.
"잘 찾아봐. 맨날 파우치 밑에 처박아두잖아." "진짜 없어. 아침에 늦어서 책상 위에 올려두고 그냥 나왔나 봐. 도어락 고장 나서 열쇠로 바꿔놨단 말이야..."
술기운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금요일 밤 11시. 회사는 이미 보안이 걸려 출입증으로도 들어갈 수 없는 시간이었다. 열쇠 수리공을 부르기엔 시간도 늦었고, 비까지 오고 있었다. 내가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자, 강영현이 내 뒷덜미를 고양이 잡듯 훅 끌어올렸다.
"아, 쫌! 아프다고!" "아프라고 잡은 거야, 이 화상아. 넌 진짜 서른이 코앞인데 덤벙대는 건 초딩 때랑 똑같냐. 어떻게 된 게 발전이 없어." "그럼 어떡해... 찜질방 가야 하나..."
우울하게 중얼거리는 내 이마에 그가 딱밤을 가볍게 먹였다. '아야!' 하고 이마를 문지르는 나를 보며 그가 자신의 수트 재킷을 벗어 내 어깨에 무심하게 걸쳐주었다. 그에게선 비 냄새와 섞인, 옅지만 묵직한 비누향 향수 냄새가 났다.
"찜질방은 무슨. 험한 세상에 술 취한 널 거기다 어떻게 버려두냐? 가자." "어디를?" "어디긴, 우리 집이지. 여기서 택시 타면 10분이야."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빗속으로 성큼 뛰어들어 지나가는 빈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리 집? 강영현의 집? 사실 꽤나 자주 왕래했던 그의 집이었지만 어깨에 걸쳐진 그의 재킷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술기운 때문인지 몰라도 이상하게 낯설고 뜨겁게 느껴졌다.
이 회차의 댓글
이름과 비밀번호로 남기는 감상. 수정하거나 삭제할 때 같은 비밀번호가 필요해요.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