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어락 위로 손을 얹었던 진주는 멈칫하고서는 손을 뗐다. 손끝에 익숙한 감각이 맴돌았지만 차마 버튼을 누를 수는 없었다. 두 달 전만 해도 이 집의 비밀번호는 진주의 생일인 ‘1219’였다.
지금도 그 번호가 그대로일지, 아니면 다른 숫자로 바뀌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설령 번호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한들, 이제 진주에게는 자연스럽게 숫자를 누르고 이 문을 열고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도어락의 파란 백라이트가 스르르 꺼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진주는, 결국 천천히 손을 들어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적막한 복도를 울리는 초인종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진주는 마른침을 삼키며 문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지방에서 열린 대규모 기획 전시 파견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향한 곳이 이곳이었다. 피곤함에 절어 당장이라도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두 달 동안 묵혀두었던 숙제를 어떻게든 오늘 안으로 끝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문 안쪽에서 슬리퍼가 바닥에 끌리는 짧은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찰칵 하고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현관문이 열렸다.
"왔나."
성진이었다. 품이 큰 밝은 티셔츠에, 자다 깬 듯 조금 헝클어진 머리. 향료 회사 영업팀에서 일하는 성진은 외근이 몰렸던 주에는 주말마다 늦잠을 자곤 했다. 진주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헤어지던 날 진주를 향해 굳어 있던 날 선 표정 대신, 지금 그의 얼굴에는 짙은 피곤함과 숨길 수 없는 어색함이 뒤섞여 있었다.
"응. 방금 올라왔어."
진주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하게 나왔다. 문턱에 서서 가만히 안을 들여다보던 진주는,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선을 실감하며 성진과 눈을 맞췄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뛰어들어가던 공간이었지만, 이제는 타인의 집이 되어버린 곳.
"……들어가도 돼?"
진주도 이 집 문 앞에서 허락을 구한 건 처음이었다. 성진은 잠깐 그녀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 옆으로 비켜섰다.
"어, 들어와라."
진주는 그제야 현관으로 들어서서 운동화를 벗었다. 거실로 걸음을 옮긴 진주는, 내심 짐작하고 기대했던 풍경이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진주가 성진에게 아끼던 몬스테라 화분을 맡긴 것은 두 사람이 헤어지기 불과 사흘 전의 일이었다. 오늘 오전에 미리 ‘오후에 화분 찾으러 갈게’라고 건조한 메시지를 남겨두었으니, 당연히 화분이 현관문 앞이나 신발장 바로 옆에 꺼내져 있을 줄 알았다. 다녀가는 사람이 굳이 집 안 깊숙이 들어올 필요 없이 바로 들고 나갈 수 있게 구석으로 밀려나 있는 것이 ‘헤어진 연인의 물건’이 갖는 당연한 위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몬스테라는 예전 진주가 직접 놓아두었던 그 자리 그대로, 거실 창가 가장 볕이 잘 드는 명당자리에 굳건히 놓여 있었다.
진주는 천천히 거실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당장이라도 들고 나갈 수 있게 종이백에 담겨 있기를 바랐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화분은 마치 이 집이 원래부터 자신의 영원한 자리인 것처럼 평온하고 윤기 나는 자태로 놓여 있었다. 흙 위에는 적당한 습기가 머물러 있었고, 시든 잎사귀 하나 없이 줄기는 꼿꼿했다.
심지어, 잎이 하나 더 나 있었다.
아직 짙은 녹색으로 완전히 물들지 않은, 연두색의 여린 새잎. 몬스테라 특유의 찢어진 모양새를 완벽하게 갖춘 채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안 죽이고 잘 키웠네."
진주가 새잎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툭 던지듯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 같았으면 성진은 '내가 바쁜 와중에도 신경 좀 썼다', '새 잎 난 거 봤나? 내 덕이다'라며 특유의 넉살을 부렸을 것이다. 하지만 거실 입구에 엉거주춤 서 있던 성진은 아무런 생색도 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묵묵히 다가와 화분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바닥에 깔려 있던 물받침을 조심스럽게 빼내어 미리 준비해 둔 듯한 빈 비닐봉지 안에 넣었다.
"가져갈 거가. 생각보다 꽤 무겁다."
물받침이 든 봉지를 진주에게 건넨 성진이 화분의 양쪽을 잡으려다 멈칫하더니, 진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두 달 전보다 잎이 무성해진 몬스테라는, 두꺼운 도기 화분의 무게까지 더해져 진주 혼자 들기에는 벅찬 크기였다.

그의 투박한 손과 조심스러운 태도를 마주하는 순간, 가슴 한구석에서 묘한 서운함이 피어올랐다. 눈앞의 식물은 이 사람의 보살핌 속에서 이렇게나 무성하게 새잎을 틔웠는데.
진주가 처음부터 성진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연애 중반을 넘어서며 성진이 습관처럼 진주와의 약속을 뒤로 미루기 시작했을 때, 진주는 분명하게 말했다. 일이 늦어질 것 같으면 미리 연락을 달라고, 오늘 못 만날 것 같으면 다음 약속을 네가 먼저 잡아주면 안 되겠냐고.
성진은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당분간은 노력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일이 바빠지고 급한 연락들이 끼어들면 상황은 여지없이 반복되었다. 진주와의 약속은 그의 일정표에서 가장 쉽게 지웠다 쓸 수 있는 만만한 칸이었다. 같은 서운함을 반복해서 말하는 자신이 어느 순간 구걸하는 사람처럼 느껴졌을 때, 진주는 부탁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 무렵부터 둘은 잘 싸우지 않았다. 진주가 서운한 일을 먼저 말하지 않았으니까. 성진도 그 차이를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결정적인 균열은 진주가 두 달짜리 지방 파견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 주말에 벌어졌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야 하니 그날만큼은 온전히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했건만, 성진은 갑작스레 바뀐 견적서를 다시 쓴다며 회사에 남았다. 월요일 오후까지 보내면 된다던 자료였지만, 그는 그날 마저 끝내고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진주가 약속 장소로 출발하기 직전에야, 전화를 걸어왔다.
‘진주야, 미안한데 내 오늘 일이 좀 안 끝나네. 저녁 쪼매 미뤄야 할 것 같다. 니 먼저 먹을래?’
화를 내는 진주에게 성진은 피곤한 기색을 섞어 대꾸했다.
‘니 파견 갔다 와서, 그때 다시 시간 맞춰가 맛있는 거 묵으러 가면 되잖아.’
두 달 뒤에도 맛있는 식당은 당연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주는 오늘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다. 진주가 ‘나는 계속 네가 시간이 되는 날만 기다리는 대기조 같다’고 토로하자, 방어적으로 맞서는 성진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결국 진주가 이별을 고했고, 성진은 제대로 묻지도 붙잡지도 않은 채 물러나 버렸다.
"같이 들자."
진주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화분 반대편으로 다가섰다. 큼직하고 차가운 도기 화분의 양끝에 두 사람의 손이 닿았다.
"이쪽이 좀 더 두껍다. 손 미끄러질라, 단디 잡아라."
성진이 화분의 테두리 모양을 가리키며 짚어주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 그의 거친 손끝이 진주의 손등을 스쳤다 떨어졌다. 진주가 입술을 꾹 다문 채 그가 일러준 곳으로 손을 고쳐 잡자 성진은 서두르지 않고 기다렸다. 예전에도 이런 일에는 늘 그랬다.
그런데 약속 시간이 바뀔 때마다 진주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기다리는지는, 몇 번을 말해도 자꾸 잊는 사람이었다.
"든다. 하나, 둘."
성진의 작고 낮게 깔린 구령에 진주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두 사람이 동시에 화분을 들어 올렸다. 묵직한 도기의 무게가 팔 근육을 타고 팽팽하게 전해졌다. 성진이 뒷걸음질을 치며 길을 만들고, 진주가 팔목에 비닐봉지를 건 채 그를 따라 걸으며 거실을 가로질렀다.
"잠깐 내려놓자."
현관 턱에 다다랐을 때 진주가 말했다. 성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주의 속도에 맞춰 화분을 바닥에 내렸다.
진주가 먼저 쪼그려 앉아 운동화를 신는 사이, 성진도 슬리퍼에 발을 꿰고는 한 손으로 잽싸게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무거운 철문이 닫히지 않게 성진이 몸으로 문을 버티고 선 채 화분을 다시 쥐었다.
집을 나서 엘리베이터 앞까지 가는 동안, 둘은 필요한 말만 주고받았다.
"문 닫힌다."
"내가 잡고 있을게."
어색한 침묵으로 가득 찼던 엘리베이터 안에서, 오직 발걸음과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만으로 그들은 서로의 무게 중심을 읽어내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두 사람은 진주의 흰색 SUV가 주차된 곳을 향해 걸어갔다. 성진이 코너를 돌며 걸음을 늦추면 진주도 자연스럽게 보폭을 줄였다.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지하 주차장의 서늘하고 습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맞춰 걷는 걸음이었다. 예전에 함께 마트 장바구니를 나눠 들 때도, 무거운 가구를 옮길 때도 늘 이랬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보폭을 알고, 어느 타이밍에 멈춰야 할지 아는 사이.
그 익숙한 물리적 합을 느끼며, 진주는 손끝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은 트렁크 앞에 화분을 내려놓았다. 도기가 바닥에 닿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팽팽했던 팔 근육의 긴장이 풀렸다. 손을 떼고 나서도 눌린 손가락이 바로 펴지지 않았다. 진주가 흙이 묻은 양손을 번갈아 쥐었다 펴자, 곁에 서 있던 성진이 물었다.
"손 괜찮나."
"응. 문부터 열게."
진주가 겉옷 주머니에서 스마트키를 꺼내는 동안, 성진은 바닥에 놓인 화분을 차 쪽으로 조금 돌려 잡았다. 옆으로 길게 뻗은 몬스테라 잎이 트렁크 가장자리에 닿아 상하지 않도록 각도를 튼 것이었다.
'덜컹- 위잉.'
자동으로 올라가는 트렁크 문 아래로 몸을 숙인 진주가, 팔에 걸고 있던 봉투에서 플라스틱 물받침을 꺼내 매트 안쪽에 내려놓았다.
"이쪽으로 넣으면 되겠어."
"어. 다시 들자."
이번에는 오래 들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힘을 주어 화분을 트렁크 턱에 얹자, 성진이 화분 밑동을 잡고 안쪽으로 쓱 밀어 넣었다. 진주는 트렁크 천장에 닿아 꺾일 것 같은 넓은 잎들을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받쳤다.
성진이 완전히 손을 빼고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진주도 받치고 있던 잎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끝이었다. 이제 트렁크 문을 닫고, 고맙다고 인사한 뒤 운전석으로 가면 됐다.
성진이 화분 가장자리를 한 번 가볍게 밀어보고 옆으로 비켜섰다. 진주는 손바닥에 묻은 흙가루를 바지 옆선에 문질러 닦았다.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가, 트렁크 안으로 다시 시선이 갔다.
짙은 잎들 사이로 연두색 잎 하나가 유난히 밝았다.
"저 잎."
돌아서려던 성진이 고개를 들었다.
"새로 난 거. 언제 났어?"
진주는 트렁크 닫힘 버튼으로 뻗었던 손을 내리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